(서프라이즈 / 初雪 / 2009-02-26)
학업성취도라는 해괴한 일제고사가 아이들의 꿈을 짓누르고 있다. 그리 안 해도 엉망진창이었던 교육이 더 쓰레기 같은 교육으로 변해버릴 모양이다.
학교장들을 쥐어짜니 지레 겁을 먹고 운동부 학생들을 그 같지도 않은 시험에 제외 시켰단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재단 이사회에서 다부지게 달려들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그저 시발점이다. 하여 앞으로 우리 교육의 미래는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논리만 살아남아 변해가는 기로에 서서 눈치나 보고 뒷배나 맞추는 소아 정신병동이 될 것은 자명하다.
교육의 목적은 깨달음이라고 본다. 배움의 가치가 학교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인간관계속에서도 자연에서도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피드백 구조는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애들을 키우는 데 있어 학교에 보내면 또 학원만 보내면 또 허리 휘어지게 과외만 시켜놓으면 다 되는 줄 아는 철없는 부모가 있다. 자식 키우는 게 그렇게 쉬우면 부모는 뻘로 있는가? 이러니 엉망진창의 교육이다. 방관의 교육이다. 그 모든 게 저급한 교육일 뿐이다.
일본의 한 속담에는 그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
그렇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거지에 절제를 배우고 규범을 배운다. 어쩌면 사고의 확장과 창조적인 문제를 그런 곳에서 습득해 나갈지도 모른다.
어느 외국인 학자가 한국의 교육을 질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유교적인 영향력을 꼽았다고 한다. 바로 그곳에 창조력의 부재가 생긴다고…. 이 나라 언론은 그것을 무슨 대단한 호재거리나 된 듯 양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박아 놓았더라.
그러나 그것은 아닌 말이다. 유교는 유교라는 유의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 이 한국사회 교육에 그 어떤 절대성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고착화되고 정형화 된 딱딱한 주입과 서열을 따져 묻는 못된 버릇이 유교적 영향이란 말인가? 이지메 놀이는 인간 기본의 성질이다. 하물며 욕망이라는 것도 인간의 기본적 심성 아니던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고 훈화하고 소통해온 것이 한국 문화의 잠재력이다. 선악의 저울질이 아니라 소통하고 어우러지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공동의식 구조의 뼈대를 지켜주는 것이 인간 본연의 학습인 것이다.
일찍이 서구사회에서는 데카당스라는 풍의 사조가 유행했었다. 그렇게 사생아 같은 샤를 보를레르가 나왔고 보를레르 뒤에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 아르튀르 랭보가 나왔다. 아르튀르 랭보는 스스로 견자(見子)를 꿈꾸며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절제적 양식을 거부했다.
동성애로부터 시작하여 절필 선언에 마도로스를 꿈꾸며 매독까지…….
그래서 무엇이 나왔나? 참된 자유가 나왔나? 아니면 합리가 나왔나? 그저 한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나가기 위해 괴벽을 몸소 실천했을 뿐, 난 그것을 인간의 궁긍적인 목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세상이란 게 참 그래서 알 수 없는 거다. 하물며 애들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나 쉬울까?
이렇듯 한 인간에 인식의 성장을 그 어떤 단선적인 사고로 규정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수천 수만 가지의 색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끌어내고 길러줄 수 있는 토양이 바로 가치관을 길러주는 일이다. 중심의 무게를 길러주는 일이다. 그 중심의 무게를 바탕으로 규범 양식이 바로 서고 절제된 양식이 바로 서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되는 것. 인간으로서 차마 욕심부려서도 안 되는 것.인간이 인간적인 사회에서 인간적으로 살아나아 갈 수 있는 환경을 배우고 습득하며 지켜나갈 줄 아는 것.
그렇다. 교육이란 사람을 사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평가하려고 줄 세우려고 또 남들보다 모가지 빳빳하게 내세우라고 가르치는 거 아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그래서 쓸 곳이 없다. 아이들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위해 혼재된 가치양상에 이러 저리 배회하게 만드는 교육은 그래서 쓸 곳이 없다.
일제고사 하면 달라지나? 그것이 참된 경쟁인가? 하물며 그것이 곧 능력의 기회란 말이던가? 인간의 사고력이 높아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넓어져야 하는 데에 있다. 대한민국이 서구의 높은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무조건 높은 사고력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하버드 교육이 그러한가? 영국의 옥스포드 또한 튜터제도가 그러한가? 어느 대학이나 인문학이 기본 아닌가? 살아나가며 詩 하나 읊어댈 줄 모르고, 가슴속에 따뜻한 노래 하나 간직하지 못하는 인성이 무엇을 해나갈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높은 사고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스스로 자정하고 귀납적으로 유추해낼 수 있는 토양이 없다면 말짱 허사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중용을 모르고,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잃어버리며, 법조인이 정의감을 잃어버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배우고 학습할 수 있는 피드백 구조가 이 사회의 단선적 사고로 오염된 교육적 실태 속에 노출되어가며 살아나가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는 데에 그 호용의 가치가 있다. 입신과 성공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동기부여와 야망을 심어주는데 그 깊이가 있다.
가정, 학교, 사회, 국가, 지구촌이라는 무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1등이 아니라 보다 공영적이고 선도적인 가치성을 체득해 나가며 소통해 나가는데 그 의의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르침은 예로부터 우리들의 선린적인 삶 속에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자신을 몸소 다스릴 수 있는 가르침을 이해한 자가,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 또한 천하를 잘 다스려 나아갈 수 있는 이치가 곧 깨달음이다. 그러한 이유로 한 나라에 교육의 책임이 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더불어 그 사회에 또한 학교에 그리고 가정에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간헐적이든 지속적이든 그 소통양식에 따라 가치관과 사회관 그리고 국가관이라는 철학적 의문이 잉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교육은 다양해야 한다. 더불어 상호작용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특수화만 필요한 게 아니라 평준화도 필요하다. 아무리 사회가 고도로 분업화되었다 해도 교육마저 분업화 하면 안된다. 아무리 사회가 능력을 강조한다 하여도 몇 가지의 능력에만 국한한 체 좀 더 포괄적인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개개인의 수만 수천 가지의 잠재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대립이 아니다. 본질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다만, 이 가정이 그리고 사회가 또한 국가가 그만큼 무능하다는 방증일 뿐이다.
기러기 아빠들이 교육 서비스업에 수백 달러를 가져다 바치는 한, 이 나라 교육의 해법은 전혀 풀리지 않는다. 좌절을 이해해도 어설프게 이해하지 말고 똑바로 이해해야 한다. 현상에 매몰되지 말고 본질을 간파해내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은 바로 이러한 무책임성에 배회하고 있다. 친구에게 부모에게 또한 선생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 또한 지도자에게 처절하게 외면되어간 채로 살아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바로 이래서 망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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