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김동렬 펌 / 2010-1-13 07:51)
아바타의 인종주의
영웅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10-01-13)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백인의 판타지가 맞다.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그런 씁쓸한 기분을 맛봤을 것이다. 우월한 백인이 열등한 미개인을 구한다는 내용.
헐리우드 영화에 늘 반복되는 판에 박힌 스토리. 백인을 중심부에 배치하고 아세안이나 아프리칸, 인디언을 주변부에 꼽살이 끼워준다. 백인이 무려 은혜를 베푼다는 식이다. 백인이 사고치고 백인이 수습했으니 됐다고. 웃기고 있어!
인종주의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주변부 문화를 존중하며 다 함께 손잡고 조화롭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한다며 옹호한다. 확실히 그렇다. 작가나 제작자의 의도는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알리바이 몇 숨겨놨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수준이 들통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별할 의도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포용하지는 못했다. 흥행에 비례하여 걸맞는 비판이 따라야 한다.
물론 대다수의 평범한 관객들은 이 영화를 옹호할 것이다. 재미있게 봤다고 말할 것이다. 인종이 어떻고 그런 골치아픈 이야기에는 관심없다고 말할 것이다. 구태여 그들을 계몽할 필요는 없다.
평범한 관객은 평범하게 놔두고 좀 아는 사람끼리 아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 필자의 글은 아는 사람끼리 이야기다. 모르는 사람은 가라. 애들은 가라. 관객이 되려면 몰라도 되지만 감독이 되려면 알 건 알아야 한다. 어느 분야든 리더가 되려면 생각은 하고 살아야 한다.
흔히 문제되곤 하는 오리엔탈리즘. 구색맞춰주기. 아시아를 인정해주는 척 하지만 결코 중심부에 배치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서구인이 한국의 민화를 보고 반색한다 해도(한국인이 무시하는 민화를 보고 열광한다고) 그것을 예술의 본질적 가치보다 상업미술의 관점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할 뿐이다.
그렇다. 변방의 한국인들은 서구의 주류가 장악한 본질을 취하려 들고 거꾸로 중심부의 그들은 변방의 아이디어를 훔치려 든다. 그들이 한국의 민화를 높이 평가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이미 완강한 질서(전복되어야 할)가 숨어있다는 점이다. 그 질서는 현대회화의 창시자 세잔이 만든 거다. 절대 그 질서를 양보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민화붐으로 완강한 서구의 질서를 부수고 전복할 수는 없다.
그들이 능호관의 설송도나 추사의 세한도를 이해하기 전에는 그들과의 어떤 대화라도 허무할 뿐. 소통은 불가. 진정성 제로. 엇박자는 계속. 진정 마음을 열 수는 없어.
한때 아프리카 붐이 있었다. 화가들이 일제히 아프리카로 달려갔지만 아프리카의 아이디어를 약탈했을 뿐이다.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일 뿐이다. 빼먹을거 빼먹는 거다. 대접은 전과동.
아바타. 산스크리트어로 불교에서 말하는 화신(化身). 네트워크 운운하면서 동양적 사고를 약간 가미했지만 수박 겉핥기에도 못 미쳐. 동양정신에 대한 이해는 완전 제로. 아주 꽝 수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알아야 한다. 무식하다는 그 자체로 무시한 거다. 상대를 존중하려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 무식한 주제에 함부로 나대는 바로 그것이 비판되어야 할 오만. 헐리우드에 늘 있어왔던 틀에 박힌 이야기 전개.
뮬란(중국인의 정신적 지주인 용을 애완동물 취급. 미친 놈들 아냐?)이나 포카혼타스에서 제기되었던 문제. 여전히 편견을 가지고 있고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버릇 못 고치는 한 작품수준에서는 이류다.
중요한건 플롯이다. 이야기 뼈대가 이런 식이면, 영화의 스타일이 이런 식이면 어떤 식으로 풀어가도 인종주의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구조가 잘못됐다. 구조론적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다.
‘니모를 찾아서’라든가 ‘슈렉’이 인정받는 이유는 애초에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헐리우드식 영웅이 등장하지만 그래도 덜 떨어진 영웅놀이에 빠져있지는 않다. 원초적으로 접근방식이 다르다.
아바타의 주인공을 비장애인에 흑인으로 설정했어야 했다는 말도 있는데 그래도 마찬가지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수준은 높아지지 않는다. 헐리우드 스타일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웅주의를 버려야 한다.
영웅이 세상을 구한다는 발상 자체가 중심부 관점이다. 주류적 사고다.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 연개소문과 대결할 때 하던 그 이야기다. 연개소문이 장성을 쌓으며 백성을 괴롭히니까 고구려 백성 구해준다는 식. 웃겼어.
상대방을 종속변수로 보고 주변부에 위치시키는 관점 자체가 문제를 야기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비뚤어졌다. 과연 영웅이 그 잘난 팔뚝 힘으로 세상을 구하는 것일까? 아니다.
영웅타령은 힘을 가진 자가 약자의 일에 함부로 개입할 때 내세우는 핑계일 뿐이다. 결국 힘있는 놈이 힘쓰고 싶어 안달난 거. 세상은 힘으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구해진다. 약자의 무기는 지혜니까.
아바타, 힘으로 밀고 들어와서 힘대결을 벌였다. 힘에서 밀려 쫓겨가는 설정을 했지만 억지다. 힘으로 하면 애초에 이야기가 안 되는 거다. 지혜는 뒀다가 뭐하나? 백인이 리틀빅혼에서 인디언 앉은황소에게 깨지고 인디언의 힘에 눌려 쫓겨갔지만 병력 열배 이끌고 또 쳐들어 오더라. 힘으로 하자면 안된다.
영웅이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설정. 세상은 원래 위기가 아니다. 위기는 애초에 없었다. 그러므로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주변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재미있게 살아간다.
그들을 구해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이미 행복하니까. 위기가 도래했다고 고함질러대는 설정 자체가 불량배들로부터 구해주겠다며 업소에 접근하는 깡패들 수법이다. 누군가를 구한다, 돕는다, 도와준다는 발상 자체가 비뚤어진 사고다.
돕겠다며 손을 내미는 한 주변부 사람들은 절대 마음을 열지 않는다. 몇푼 줘봤자 그들은 술먹고 탕진한다. 돕는다면서 사람 버려 놓는다. 차라리 내버려두라. 그들에겐 존중받아야 할 그들 방식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있다.
그들의 존재로 하여 세계는 더욱 커졌다. 더 큰 세계의 발견으로 궤도수정 해야한다. 물리력에 의한 문제아의 제거가 아니라 깨달음에 의한 소통과 공존이 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 흥행하기는 쉽지 않다.
슈렉을 보자. 그들은 좀 골칫덩이다.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고 대단한 영웅도 아니다. 고양이나 당나귀 혹은 만사 귀찮아 하는 습지괴물이다. 이 방식으로 흥행한 영화는 예전에 잘 없었다.
수호지를 보자. 초반부는 호걸들의 적나라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나라를 구하지 않는다. 도둑질이나 할 뿐이다. 잘해봤자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다. 그들이 하나 둘 씩 양산박에 모인다.
108명의 호걸이 양산박에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끝나야 한다. 그런데 뒤에 구차한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그건 다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가짜라고 김성탄은 말했다. 70회본을 넘어서 120회본까지 뒷부분 가짜가 충의수호지다.
도둑들이 갑자기 나라를 구하겠다며 오바질 시작이다. 이게 잘못된 거다. 도둑이 졸지에 영웅되나? 영웅놀이 시작하면 망가진다.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낮은 세계에는 낮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중심부의 가치를 주변부에 이식하려고 해서 안 된다. ‘세계는 하나다’고 외치지 않아도 좋다. 영웅이 나타나서 구해주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우리대로 이미 행복하다. 꼴사나운 영웅들 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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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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