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잡동사니

'마음의 구조'<책 소개>

pulmaemi 2011. 2. 17. 14:23

(서프라이즈 / 아란도 (arrando) / 2011-2-17 12:25)


 

 

 

마음의 구조라는 책이 나왔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 마음 하지만 정작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때는 남감하다. 그 마음에 대하여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구조론으로 풀어놓은 책이 나왔다. 그래서 '마음의 구조'라는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글을 같이 인용하여 나의 생각들도 함께 풀어가보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해서 불행해진다. 불행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마음이 가는 길을 알지 못해서 마음이 추구하는데로 쫒아가다보면 다시 불행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은 모두 하부구조다. 마음의 상부구조를 보아야 하는데 눈앞에 드러나는 하부구조에만 천착하게 된다. 생각과 감정은 마음의 하부구조다. 그리고 대체로 감정이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감정이 시키는데로 행동하고 표현한다. 불행해지게 된다. 감정은 마음의 최종 결과다. 감정은 마음활동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물론 이 결과가 다 해결되지 못하면 다시 피드백된다. 이렇게 남은 잔재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마음의 상부구조는 정신과 의식이다. 정신은 자신의 외부를 통제하고, 의식은 자신의 내부를 통제한다. 그리고 의도가 있다. 이 의도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연결한다. 그리고 이 의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의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의도가 충족되면 좋고 의도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의도는 상대에게 맞추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대응한다.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 의도가 만연하면 의도에만 머물러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수준높은 사회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의도를 가져야 한다. 의도가 있어야 무언가가 진척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의도에 머물러서 판단하면 안된다. 그것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중에 하나다.

 

 

마음은 내부에서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안에 의식이 의식안에 의도가 의도안에 생각이 생각안에 감정이 담겨있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감싸고 있다.

 

정신은 외부적으로 존엄을 추구하고, 의식은 외부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고, 의도는 외부적으로 사랑(관계)을 추구하고, 생각은 외부적으로 성취를 추구하고, 감정은 외부적으로 행복을 축한다.

 

그래서 행복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해옥을 추구하면 할 수록 불행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은 그 상위 단계들이 충족되어야 결과로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정신(존엄)>의도(자유)>의도(사랑)>생각(성취)>감정(행복)으로 풀어보자면,

 

얼마전에 TV드라마 '결혼해주세요' 에서 김지영이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하였고 결국 이혼하였는데, 이혼 사유는 표면상으로는 남편의 외도였는데, 본질은 김지영이 더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그래서 이혼을 한 것은 사실 남편의 외도와는 상관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행복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결과다. 그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불만족이다. 무엇에 대한 불만족일까? 남편과 다른 가족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불만족이었다. 이 불만족이 그녀를 행복하지 않게 했고, 이 불만족에 의해서 그녀는 행복을 찾아 나셨다.

 

자신의 비참함을 구원 받고자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행복만을 쫒아서는 그녀 자신이 행복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비참했다. 이혼을 해도 비참했고, 가수가 되어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왜 비참했을까? 왜 지금 그녀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사랑도 만족 스럽지 않고, 성취도 없고, 자유도 없고, 그러니 당연하게 비참하다. 왜? 존엄을 획득하지 못했으니까...?

인간이 비참한 이유는 존엄이 없기 때문이다.

 

존엄은 인간이 자신 스스로만이 얻어낼 수 있다 누가 가져다 주지 않는다.

존엄을 얻으려면 자신 스스로 세상과 맞서야 하고, 거기서 자신 스스로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만나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중심이란 어디일까? 먼저 정신안에 존엄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자기자신을 스스로 존중해야 하고, 그 존중감에 의해 스스로 인격을 획득해야 한다. 그 존엄이 자신을 충만하게 한다. 연민을 품게 한다. 세상을 품을 만큼 넓은 마음을 갖게 한다. 그렇게되면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이 저절로 쭉 연결되어 나타난다. 드디어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먼저 그것에 대해 전제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먼 길을 돌고돌아서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인간은 인식을 하기 때문에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이 행복>성취>사랑>자유>존엄의 형태로 나타난다. 존재론의 방향이 인식론으로 펼쳐지기에 그렇게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드라속의 그녀는 행복하지 않아서 성취를 추구하였고, 성취로도 행복하지 않아서 사랑을 추구하였고, 그러나 사랑으로도 행복하지 않아서 자유를 추구하였으며, 자유로도 행복하지 않아서 존엄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존엄을 회복하고서야 그녀는 행복해졌다. 연민의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타인을 바라보게되고, 자신을 다시 살필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마음다침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김동렬님의 직접적인 답변을 들어보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오. 이건 사실여부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표현의 문제이오. ‘자유라는 단어가 한국에 없을 때도 자유는 있었지만, 누군가 자유라고 이름붙여주어야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오. 마음을 다쳐야 ..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단지 영판 모르는 하수들에게 설명하기 위함이요. 하수들은 도무지 공감하지 않으면 소통되지 않으니까. 실연당해보지 않은 풋내기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해봐야 입만 아플 뿐. 그래서 둘은 같은 이야기요. 존엄을 보면 필연 마음을 다치오.

 

존엄을 보지 못한 자는 죽을때까지 마음을 안 다치고 낄낄거리며 속편하게 잘먹고 잘 살다가 갈 것이오. 악어가 마음 다칠 일 있겠소? 반면 존엄을 본 권정생 선생은 북한 어린이가 걱정되어 밤잠을 못 이루다가 수명이 단축되었소. 마음을 다치는 것은 존엄을 다치는 것이며, 존엄을 발견한 자만 존엄을 다치오. 환경을 발견한 자는 사대강이 고통일 것이며, 환경을 발견못한 자는 사대강에 아무런 느낌도 없소. 마음을 다친다는 말은 .. 고통을 겪고, 슬퍼하고, 찌질하고, 울고불고 이런게 아니오. 내 마음 안에 다른 것이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게 마음을 다치는 것이오. 사랑의 크기와 마음을 다치는 크기는 정비례하오. 물론 하수들이나 지질대는 사람들이 마음을 다치는 것은 약간 다지만 그래도 본질은 같소.

존엄을 본 자는 신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것이며, 유마힐이 밝혔듯이 중생의 병이 나의 병이 될 것이며, 진리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것이고 그것을 보지 못한 자는 아무 느낌도 없이  풀어져서 잘 살 것이오.  

 

 

그렇다.때때로 문득문득 마음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 많아져서..왜 그럴까? 생각해보니...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기억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 아프냐..별로 잘한게 없었다는 것이...그때는 아무렇지 (혹은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던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올라서 왜 그렇게 밖에 생각을 못햇을까? 결정을 했을까? 사소하다 생각했던 일들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런 사소한 결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때때로 인생의 길이 달라져 가게 되었구나도 느끼고...그리고 분노를 크게 느낀 것은 세상이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다는 것..도대체 나는 무슨 세상을 보고 살았길래...다시 본 세상이 그렇게 아프게 여겨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마음 다칠일이 적어질 줄 알았던 것도 착각이었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마음은 너무 아프고 아프다는 것을 알게되니..... 문득 존엄과 마음 다침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것이 궁금해졌었다. 한편으로 존엄과 마음다침은 정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 생각했기에 더 모순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큰 충격도 그럴 것이나 작고 사소하다 여겨지는 일들에서도 ... 반드시 신을 만나지 못해도..더 크게 마음이 올라서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것들의 하나가 풀려버리면 연쇄적으로 막힌 것은 사라져서 풀려버리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는 작은 것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크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그 무엇인가에 자신의 존엄이 다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그것이 해결이 안되면 마음의 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마음이 아픈 이유가 자신의 존엄이 다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계속해서 의도는 되갚아 주거나 자신을 스스로 가둬버리는 형태로 가기에 생각 역시 그렇게 진행이 된다고 생각되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생각에서 도출되어 나온 것은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감정으로 풀게 될 수밖에 없어서 악순환은 되풀이되고, 통제가 안된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하는 생각이나 행동이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다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혹은 사회(공동체)가 개인들의 존엄을 다치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 둘이 모두 협조하는 형국이라면 개인은 질식하게 된다. 개인이 질식하는 사회 역시 병들어 가게 된다.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어 버리기에...정화(?)를 외치게 된다. 개혁이나 혁신 등등...

 

그러나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자신 스스로의 존엄을 다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해도 곧 마음은 해방이다. 스스로 억압하고 구속한 상태(노예상태)에서 풀려나게 된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존엄을 다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해도 자신의 존엄과 타인의 존엄을 동시에 존중하는 것이 된다.

 

자신이 왜 아픈지를 모르기를 때문에 그 아픔을 가져다 준 타인과 사회(외부자극)에 대해서 바르게 대응을 못하게 된다. 자학, 회피, 원망, 화풀이, 분노, 미움 등등의 것으로만 풀어 버리려 하기 때문에 자신은 더 마음이 다치게 된다. 스스로의 존엄은 더 훼손되어 버린다. 자신의 마음이 아픈 이유가 자신의 존엄이 다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스스로 존엄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고, 존중받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면 대응책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마음이 아픈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유를 얻은 것과 같고, 의식은 제 자리를 찾아 갈 것이나..이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되며 ..그래서 강한 개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나 아닌 타인들이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짓밟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는 것 역시 아프다. 그것은 우리의 존엄이 같이 짓밟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므로.... 더구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그렇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더 직접적으로 나의 존엄이 짓밟힌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하니까.

 

'마음의 구조' 저자 김동렬의 글을 인용하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앞이 캄캄하게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곤 한다. 내가 17살에 깨달은 것은 ‘가던 길을 슬금슬금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후회하게 될 때까지, 일단 가던 길을 계속 가보는 것이지 무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가다보면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서 어울리다보면 세력이 만들어지고, 세력이 만들어져야 통하는 법이다.


 
공자도 사실은 여불때기로 대박이 난 경우다. 공자는 미련한 증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증자가 강조한 효는 공자 아니라도 중국 전통의 사상이었다. 진보적인 공자의 사상을 약간 변형하여 보수적인 중국 전통사상에 가미하여 증자가 써먹은 것이다. 공자는 구태여 그것을 말리지 않았을 뿐이다.


효란 즉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고, 곧바로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기술로 변형되니, 곧 유교가 군주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는 공자가 기대한 방향이 아니었다. 엉뚱하게 여불때기로 뒷패가 붙어서 대박이 난 것이다. 이후 맹자는 증자 계열이니 증자가 공자의 정통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점은 예수도 비슷하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예수로 변개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 필요했고 또 현장에서 먹혔기 때문이다. 황제는 선지자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 역시 여불때기로 뒷패가 붙어서 엉뚱하게 대박이 난 것인데 예수가 돌아온다면 이를 찬성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내 입장도 비슷하다. 구조론이 대박이 난다면 여불때기로 뒷패가 붙어서 대박이 나는 것이며, 이는 내가 원해서 되는게 아니고 시대가 그것을 필요로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불교도 본토인 인도에서는 망하고 엉뚱하게 중국에서 뒷패가 붙어서 여불때기로 대박이 났다. 지금 불교사상의 핵심과 석가가 처음 생각했던 것은 다르다.

지금이 더 진보한 사상일 수도 있고, 원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한 것일 수도 있다. 석가가 돌아오면 노장사상이 가미된 한중일의 선불교를 과연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


내 짐작으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은 다 하느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라고 공자도, 예수도, 석가도 변명할듯 하다. 세상이 그걸 원하는데 어쩌겠는가? 세상의 일은 세상에 맡기고 나란 가던 길을 계속 가보는 수 밖에 없다.

 

길이 있으면 일단 가보는 수 밖에.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잘못되면 다 하느님 책임이니까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고. 세상이 다 무너져도 다 하느님 잘못이지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고, 일단 가는 길을 계속 가는게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열일곱때 깨닫고 곧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피곤해졌을지 모르겠으나 잘못된 만큼 잘될 가능성을 찾았다. 하나가 실패할 때마다 더 큰 가능성을 얻었다. 나는 무수히 실패하였지만 성공의 확률은 조금씩 쌓아갔다. 그 확률이라는 자산은 내 일생동안 조금도 줄지 않고 계속 늘기만 했다.


일은 남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통 내가 잘했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남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 운명의 기로에서 내가 옳은 선택을 했는데도 남이 잘못된 행동을 해서 모두 나빠져 버렸다 해도 그게 내가 고민할 바는 아니다.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이며 거기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전부는 크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에서 겉으로 드러난 10프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나머지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는데 60프로 정도의 승산이 있다고 하자. 그 일을 해서 성공하면 만인의 칭송을 얻는다. 그러나 40프로의 실패위험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보통 정치게임에서 60프로 승산을 보고 도박을 해서 성공시키면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그 40프로의 위험에 대비해야한다. 완벽하지 않은 승리가 다음번 싸움의 패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욕을 먹더라도 그 위험에 대비할 때 다음의 승리는 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너무 내가 다 책임지려 하지 말고 일단 한번이라도 이겨만 놓으면, 다음 일은 다음 타자가 어떻게든 해결해 준다. 그러니까 요행이든 뭐든 일단 이겨놓는 것이 중요한 때도 있다.


동그라미가 있고 그 바깥에 더 큰 동그라미가 있다. 내가 바른 선택을 했을때 안쪽의 작은 동그라미가 붕괴되었어도, 바깥의 큰 동그라미에는 이득이 된다. 내가 바른 선택을 해서 내부고발을 하면, 내가 속한 조직이 붕괴되지만 대한민국은 건강해진다. 전체의 이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조직의 이득은 유형의 드러나는 존재이다. 무형의 드러나지 않는 전체의 이익에 기여해야 진짜다. 이때 나의 옳음을 누가 알아주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 할 일을 함으로써 신의 성공확률을 올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내 일을 옳게 해서 내 가족이나 내가 속한 조직은 실패하더라도 신은 성공확률을 올렸다. 그 점이 중요하다.


내가 옳게 했는데 세상이 잘못되면 신의 책임이다. 오지랖 넓게 신을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신이 잘못하면 신의 탓이고, 역시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모를 때는 그 상황에서의 옳음을 추구하는게 중요하다.


구조론은 입력부와 출력부만 본다. 중간은 보지 마라. 가장 멀리 있는 등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방향타를 보라. 그 중간의 파도와 지나가는 갈매기 두 마리는 볼 필요가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신과 함께 가는 것이다. 그 중간은 그만 잊어버려라.


물론 답을 알면 그 답대로 하면 된다.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일단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신에게 쓸모있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방법으로 신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신의 책임이다.

 


<'마음의 구조' 책 본문에서 부분적으로 발췌>

 

마음의 작동 원리를 그동안의 심리학에서 복잡하게 설명하지만 김동렬의 '마음의 구조'에서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5단계로 집적하여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복잡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 사랑,성취, 행복 이 모두는 하나의 사건에 따른 연속적인 과정이고 지 전체과정이 모두 욕망이다. 그러나 존엄은 다른 모든 욕망을 예속시켜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다. 이성을 회복하여 욕망을 통제하고 그 욕망이 함부로 노출되지 않게 단속한다.인간은 단지 존엄욕,자유욕,사랑욕,성취욕,행복욕을 가질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존엄욕 하나로 환원된다. 그 외에 성욕이나 식욕, 승부욕, 재물욕, 명예욕, 안전에 대한 욕구기타 등등 소설가들이 지어낸 무수한 욕구들은 케이스바이 케이스로 열거한 것이라 논리적인 의미가 없다.

 

이런저런 욕망을 말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바람은 하나다.인간은 먼저 행복하고자 하며 이에 실패한 다음에 성취를 꾀하고, 성취하고자 하여 실패한 다음에 사랑을 꾀하고, 사랑하고자 하여 실패한 다음에 자유를 꾀하고, 자유하고자 하여 실패한 다음에 존엄을 깨닫게 되지만 이 순서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전개 순서와 맞지 않는 것이기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일으킨다.

 

존엄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자신을 존중할 때 모든 마음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모든 욕망이 그림자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석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선언한 것이다. 세상 전부를 자기 마음안에 입체적으로 통섭하여 포함시켜 버렸더니 싸울 대상이 없어져서 문득 마음의 갈등이 사라져버린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천상천하를 내 안에 품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담하게 진보에 나서야 한다.

 

그러한 본질을 모르면서 그저 자기만을 존중하고자 하여 우쭐대면 자기는 작아지고 만다. 내 몸뚱이 하나만 존중하게 되고 타인을 차별하게 된다.

 

그 경우 더 많은 것들이 점점 나에게서 이탈하여 떨어져 나간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세력이 육지에 상륙한 태풍처럼 한순간에 소멸하고 만다.

 

그 결과 도리어 자신을 차별한 셈으로 된다. 타인을 차별하는 행동은 타인에 의해 그대로 자신에게로 반사되기 때문이다. 구조원리상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 자기 포지션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똥밭에 머무르면 자연히 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자기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격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진정으로 자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축구팀이 시합을 하되 나도 이기고, 상대팀도 이기고, 관객도 이기고, 심판도 이기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기는 경기를 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이나 어렵다. 모두가 이기는 경기를 하려면 그 시합에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여야 한다. 최고의 플레이를 해서 챔피언의 면모를 과시함으로써 만인에게 정상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형태로 영감을 던져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모든 행동은 존엄한 것이며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타인을 자극하는 모든 행동은 비루한 것이다.창의하여 타인에게 영감을 주었을 때 최초 하나의 아이디어가 또 다른 아이디어를 낳는 형태로 증폭되어 세력화 되는 것이며 그 진보의 발전의 성두에 서는 것이 존엄이다.

 

시합의 승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난해보다 더 진보한 무엇인가를 그 현장에 남겨놓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관객이 승부에서 영감을 얻는다.아무 남는 것이 없이 그냥 승자는 축제를 벌이고, 패자는 울고 있다면 허망한 것이다. 그냥 막연히 남을 존중하겠다는 다짐은 허무하다. 진보하여 하고 혁신하여야 하고 우일신 하여야 한다.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지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그 나아지는 것에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참여한 각자에게 역할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가치를 알게 하는 방법은 모두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뿐이며 그것은 오직 진보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장 크게 한국인을 존중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다. 당신의 한글은 한국인 모두를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상승시키는 것에서 바른 방법은 병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이다. 병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그것이 그다지 문제되지 않게 비켜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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