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슬기로운 빈둥이공동체마을 사용설명서
지은이 - 필명 nurimaem
제 29 화
2층에 몸빼 입은 여걸 삼총사가 둘러앉았다. 성일이가 와인과 함께 견과류 등의 안주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보영이가 어떻게 빈둥이 마을로 와서 공정여행에 참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다.
10여 년 전에 보영이는 딸과 함께 누리샘의 필리핀 공정여행 및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보영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후로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그나마 동창회에 나와 친구들의 얼굴 보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동창회에서 오 원장한테 해외여행 얘기를 듣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일을 놓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현실의 모든 것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마음에, 딸과 함께 누리샘의 공정여행에 참여했다.
그때 누리샘 해외 의료봉사단이 간 곳은 필리핀 수빅 근처의 조그만 마을이었다. 남국의 전형적인 맑은 날씨에 높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고, 비포장도로에 들어서자 원두막처럼 대나무와 야자잎으로 만든 집들이 보였다. 먼지를 일으키며 한참을 달린 후 드디어 원주민 마을에 도착했다.
보영이는 인사 나온 그 마을의 원주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생김새가 여느 필리핀인들과 다르게 아프리카 흑인을 더 닮아 있었다. 머리가 곱슬곱슬했으며 키는 아주 작았고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오 원장에게 물어보았다.
오 원장의 말에 의하면 1991년에 필리핀의 가장 큰 섬인 루손섬에 위치한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다고 했다. 그때 그 산에서 원시적인 삶을 살고 있던 피부색이 검은 아에타족이, 재난을 피하여 저지대로 내려오게 되면서 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수빅 지역 근처에 정착했다. 보경이가 딸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러 간 곳이 이 아에따족의 마을이었다. 아이들은 윗옷도 안 입은 채 맨발로 마을 곳곳에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보영이가 외상을 처치하는 자원봉사활동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3살도 채 안된 아에타족의 아이가 울면서 엄마 손에 이끌려 왔다. 가만 보니 맨발로 다니다 발에 상처가 났는데, 오랫동안 치료를 하지 않아 상처가 덧나 있었다.
처음에는 무섭기도 하고 아파서 그랬는지,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치료를 다 끝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르르 웃기도 하고 눈도 찡긋거리면서, 외부에서 온 일행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보경이의 가슴속이 뭉클하면서 벅찬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보경이는 검은색 피부에 해맑게 웃는 그 아이의 눈망울을 마음에 새긴 채, 의료봉사를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문득문득 그때의 여행이 생각나고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동창회에서 오 원장이 봉사활동을 다녀온 얘기를 할 때마다 계속 관심이 가고 유심히 듣곤 하였다.
그러던 차에 한번은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하고 오 원장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법은 있는데 힘들 텐데!" 하며 뜸을 들였다. 방법이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해져 재차 물으니 "보경이도 가봐서 알겠지만 현실적으로 의료분야 쪽이 더 필요하고, 지역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라고 오 원장이 말했다.
"농담하지 말고 나 진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이 나이에 그게 가능하니?" 보영이가 어이없다는 투의 물음에 오 원장도 진지한 표정으로 "간호조무사를 하면 될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단지 자원봉사자로 도우미 역할이라도 할 생각으로 얘기를 꺼낸 건데, 의료봉사를 위해 간호조무사에 도전해보라는 오 원장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천천히 알아보고 생각을 해보자"고 오 원장이 말했다. 그 후 인터넷을 검색하고 간호조무사 카페도 가입하여, 간호조무사가 어떤 직업인가 그리고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1년이라는 과정 속에 실습과 이론공부를 한 후 자격시험을 치는데 다행히 나이 제한은 없었다.
게다가 국가가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인 것 같았다. 더하여 체력이 받쳐주고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도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고, 생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후기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물론 실습과정이 어렵고 힘이 부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는 부정적인 후기 글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의사의 지도 감독 하에 병원에서 진료 전반에 대한 보조업무를 다할 수 있어, 의료봉사를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때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딸아이의 적극적인 지원과 영숙이와 오 원장의 성원으로 무사히 1년이라는 힘든 과정을 마치고 무난히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로 누리샘의 의료봉사활동이 있을 때마다 참가하였고, 초동 동창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그들에게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였다.
특히 이번에 간 곳은 빈둥이마을여행사 네팔지부에서 새롭게 개척한 마을이었다. 2015년 네팔 대지진 후 마을 전체가 붕괴되어 현재까지도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특히 이곳의 아이들은 무너진 학교의 운동장에서 임시 천막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에 네팔지부 한준서 지부장은 빈둥이 마을에 긴급구호자금을 요청하여, 봉사단이 도착 석 달 전부터 현지 주민과 함께 학교 건물 짓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해외 공정여행 봉사단은 3주간 봉사활동을 통해 학교 리모델링 사업을 마무리하고, 그 학교가 속한 마을을 중심으로 공정여행을 비롯해서 의료 및 교육봉사활동을 병행하는 큰 사업을 진행했다.
이 여행단의 총괄단장은 오랫동안 오 원장과 호흡을 맞춰온 이 교수가 맡았으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번 해외봉사단에 참석하지 못한 오 원장을 대신하여 보영이가 처음으로 의료봉사팀을 맡아, 현지주민과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도록 고군분투하였다.
나라는 보영이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를 들으니, 그의 삶이 어렴풋이 이해게 되었다. 힘들었을 때 서로 챙겨주지 못한 서운함과 미안함이 뒤섞인 채,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서로 마주 앉게 된 것이었다. 보영이는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자주 보자고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라의 목공 얘기로 넘어갔다. "어떻게 젊은 친구들이 그렇게 나라를 따를 수 있니? 특히 윤 팀장은 나라를 보는 눈에서는 존경의 눈빛이 가득하던데?" 보영이가 웃으며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오후에 나는 조마조마하더라고? 원래 나라 성격이 나서는 거 안 좋아하고 생색내는 거 좋아하지 안잖아.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나라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떡하니 '신나라 특별전시회'를 기획하고 전시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내가 더 나라의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 영숙이가 말했다.
"사실 나도 무척 당황했지. 목공 반 전체가 주인공인데 내 작품을 따로 전시해 놓으니 기분이 그랬지." 나라도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서울에서도 목공에 관심이 있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가능한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려고 해. 우리는 살면서 오염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잖아."
"그들 나름대로 감성이 있으니 들어야지. 우리는 판을 깔아주고 혹시나 조언을 구하면 내 생각만 얘기해주고, 판단은 젊은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때로는 실수를 해도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더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토요일 나라의 출발을 위해 이제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 장면 4
"샘, 의논할 게 있습니다." 송윤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도현이한테 다가왔다. "무대 춤을 구상하고 있는데 그림이 잘 안 나옵니다." 힘들어 죽겠다는 윤후의 표정에 도현이가 걱정되는 듯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봐. 그 분야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 많이 안타깝네. 우리 윤후가 힘들어서 어떻하지?" 도현이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게 아니고예. 멤버가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샘한테 말하는 겁니다." 윤후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나한테 말한다고 멤버가 생기는 것이 아닌데, 나한테 지금 화풀이 하는겨?" 도현이도 윤후의 짜증나는 표정을 따라 하며 말했다.
"그리 말입니더. 지금 당장 어디서 친구를 데려올 수도 없고, 이 오지로 올 친구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예, 샘이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윤후가 진지하게 말했다. "허걱, 뭐? 다시 말해봐. 나? 지금 나보고 같이 하자고? 농담하지 말고" 도현이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진짭니다. 농담 아닙니다." 윤후의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자 도현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 보이스 트레이너야, 그리고 나는 너희 아버지뻘보다 더 먹었거든" 말했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습할 때 관심도 가지시고 한 번씩 따라 하는 것을 보니 소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왕년에 한 번 놀지 않았습니까?" 윤후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야, 그야, 내가 너희 때는 아주 거칠게 놀았지. 그래도 이쪽 분야는 아니거든. 물론 춤 잘 추는 친구들은 나의 로망이었지만, 이건 아니잖아 " 도현이가 당황한 듯이 말했다. "샘, 한번 해보입니더. 백 댄서 수준으로 하면 됩니다. 샘~~!" 윤후가 어린애 조르듯이 말했다.
"말도 안돼. 이런 사실을 우리 친구들이 알면 나보고 노망 났다고 엄청 머라 할 거야. 특히 너는 오 원장하고 강 사무국장과 친하다고 막 말하고 다닐 거 아니야?" 강하게 부정하는 도현이에게 "샘, 공연 전까지 아니 공연할 때까지 절대 얘기 안 하겠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윤후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지. 절대 얘기하면 안 돼. 우리 친구들 반응들이 빤하거든." 도현이가 그래도 불안한 듯 말했다.
# 장면 5
1주일 후, 다시 윤후가 혼자 몰래 연습하고 있는 도현이를 찾아왔다. "샘, 할 말이 있습니다." "또 뭐. 네가 할 말이 있다고 하면 겁부터 난다. 나, 너 때문에 이렇게 고생이거든." 도현이가 일부러 화난 듯이 말했다.
"샘, 연습하는 거 보니 왕년에 진짜 이 바닥에서 놀지 않았습니까?" 윤후가 웃으며 물었다. "얘는 어른한테, 지금은 니가 내 춤 사부지만 나도 보이스 트레이너야." 힘든 얼굴로 말했다. "샘, 가만 생각해보니 공연할 때 중앙무대에 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윤후가 진지하게 말했다.
"뭐? 뭐라고? 나 백댄서 하기도 힘든데, 지금 나보고 중심에 서라고?" 도현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샘, 기왕 망가지는 김에 다들 좀 놀래드립시다. 참석하는 사람들이나 친구분들 한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도 재미있잖습니까?" 윤후는 기발한 생각을 인정받으려는 듯 도현이를 바라보았다.
"거 진짜 말도 안 되거든, 너희들의 공연에 왜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되는 거니?" 도현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현샘, 솔직히 말해서 이 축제는 밀양골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는 공연입니다. 당연히 샘이 주도적으로 공연을 하면 다들 충격을 받아 뒤집어질 겁니다. 샘도 느끼셨겠지만 소질이 있다니까요. 제가 한눈에 알아봤다 아입니꺼?" 윤후의 말에 도현이의 표정은 울상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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