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슬기로운 빈둥이공동체마을 사용설명서
지은이 - 필명 nurimaem
제 9 화
넷째 날 (월요일)
나라는 새벽에 벌써 깨어 있었지만 벨소리가 나면 일어나려고 누워 있었다.
언제부턴지 새벽에 눈이 떠지면 다시 잠들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7시에 핸드폰의 알람이 울리자 일어나서 대충 씻고 나서,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어제 밤에 이어 계속 읽었다.
'암은 자연치유된다'라는 책의 저자인 자연의원의 원장님은 2005년도에 자연 속에서 암을 치유하기 위해, 암 환자들과 함께 경주 산내면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거기서 그들과 함께 황토방을 짓고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암에 대해서 공부해야 하고,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식생활 등의 생활습관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치유 아카데미'란 학교를 세워 암환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했다.
책을 읽고 있는데 도현이한테서 카톡이 왔다. 벌써 나갈 시간이 되었다. 1층에는 성일이와 도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로 가는 숲길은 낙엽이 두텁게 쌓여 있고, 맑은 공기 속의 늦가을의 햇살은 따사롭기만 했다.
힐링카페로 다가가자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뒤에서 나라의 이름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최정금이가 작업복 차림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식목 팀장, 어쩐 일이야?" 나라도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빨리 왔어. 원래 우리 일들은 하루에 4시간만 작업하는 양이잖아. 그래서 빈둥이공동체에서 운행하는 승합차를 타고 오전 10시 전에 도착하면 돼."
"그리고 오전에 2시간 작업하고 점심 먹고, 또 2시간 일하면 끝이 나. 그런데 오늘은 이 지역 마을 주민이 새로운 작업을 요청해서, 미리 협의하고 작업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일찍 나왔지." 정금이가 말했다.
"재미있었어? 며칠 있었다고 얼굴이 좋아 보이네." "그래, 이렇게 푹 쉬면서 친구들과 같이 지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집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 나라가 대답했다."
힐링카페에 들어가서 4명이 자리를 잡았다. 도현이가 4명의 주문을 받아 카운터 테이블 안쪽 주방으로 갔다.
카페 담당자들이 어제 카페 문을 닫기 전에, 오늘 아침에 카페에 방문할 연구원들을 위해 커피 원두를 갈아놓았다. 도현이가 줄을 서서 기다린 후 아메리카노를 뽑아서 돌아왔다.
"정금이는 오늘 작업이 있고, 나라는 뭐 할 거야?" 성일이가 물었다.
"어제 도서관에 갔었는데 책 관리하시는 분이, 예술창고에서 그림 그리는 분 이래. 그래서 시간 되면 한 번 놀러 오라고 해서 오전에 거기에 가보려고. 그리고 오후에는 목공 작업실에 갈 생각이야." 나라가 대답했다.
"도현이 너는?" 정금이가 물었다. "공연 준비하는 한 녀석이 연습하는 거 한 번 봐달라내" "그 친구는 학교 안 다니는 친구야? 월요일 아침부터 여기로 오게?." 나라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여기가 편한가봐." 도현이가 말했다.
"도현이가 편한 것이 아니고? 그래도 신기한 것이 도현이랑 얘들이 너무 잘 어울려다니고 열심인 것 같은데, 도현이는 재밌냐?" 정금이가 물었다.
"나름 괜찮아, 얘들이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면서 즐거워 하는 것을 보면 나도 젊어지는 느낌이야." 도현이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뭐? 춤도 춘다고?" 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을 했다.
"성일이는 공동체 관리한다고 오늘도 여전히 바쁘지?" 나라가 물었다.
"빈둥이공동체마을 주민이 늘어나고 여러가지 사업들도 많아져서 이래저래 챙길 것이 많네. 빈둥빈둥 놀려고 여기로 왔는데, 어찌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간다." 성일이도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오전에 각자 일한 후, 점심때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른 시간이라 도서관에서 책을 좀 보다가 예술창고로 가기로 했다.
도서관을 들어서니 남쪽 창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와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창쪽 근처에는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산마루 방에는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그림책을 같이 보고 있었다.
또한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책도 보고 핸드폰도 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한 곳에서는 여러 명이 모여 책 읽기 모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라는 서가 쪽의 조용한 곳에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암은 자연치유된다"의 저자인 자연의원 원장님은 암이 치유되는 과정은 한마디로 ‘암세포가 더는 자랄 수 없는 몸의 환경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암 덩어리가 작아지는 것은 증식만 하는 암세포의 성질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자연치유로 암세포가 자살하는 것은 암세포가 더는 증식할 필요 없는 몸의 환경이 만들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
"암이 없어졌다는 것은 혈액 상태가 바뀌고, 따라서 혈관도 막히지 않고, 무산소 환경과 젖산 발효를 해야 하는 환경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정상적인 환경으로 돌아가니 암세포가 있을 이유가 없고 자살하는, 즉 세포가 정상화하는 것이다."
도서관을 나와 예술창고로 가려면 전원주택 단지를 지나가야 했다. 황토주택의 굴뚝에는 한가로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어떤 곳은 집을 수리하느라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전에 여기가 사과나무 밭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곳곳에 사과나무들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또한 개성있는 집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나름대로의 특색을 갖추고 있었다.
단지 내의 정원에는 볕이 잘 들어오고 경치 좋은 곳곳에, 방문객들을 위한 벤치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방문객들을 환대하는 전원주택 주인들의 마음이 읽혀졌다.
카페에서 온 손님들이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홀로 영남알프스의 전경을 감상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나라도 건너편 영남알프스 산들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즐겼다.
어느 자리든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깨끗이 치우고 정돈한 후, 자리를 떠나는 이들의 모습이 나라의 눈에 자주 띄었다.
빈둥이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에는, 주인이나 방문객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삶이 고단하여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동안 이곳에 머물게 되다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치유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 있게 전원주택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어 점심시간이 다 되어갔다.
오후에 예술창고로 가기로 하고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빈 테이블이 별로 없었다. 탐작동(편집자주 : 탐구하고 작당하는 동네)으로 나가는 문쪽에 식탁이 비어있어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12시가 다 되어가자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가 자리에 일어서서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네." 도현이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성일이와 정금이도 곧이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갔던 일은 잘됐어?" 나라가 궁금해서 정금이에게 물었다. "그래, 전에 우리가 일손을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싶었나봐. 근데 사무국에서 거절을 했단다."
"강성일 사무국장은 왜 그래 지역주민을 섭섭하게 한 거야?" 정금이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게 아니고, 우리 인력이 단가가 비싸잖아. 그리고 4시간씩 일을 하니 기간도 많이 걸리고. 그래서 다른 곳에 알아보라고 했지."
"그런데 정금이가 가서 잘 협의하고 일도 잘 처리해 그 주인장이 만족했나봐. 사무국으로 연락이 왔더라. 좋은 사람 보내줘서 고맙다고. 최정금 식목팀장 덕분에 내가 칭찬을 받았네." 성일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강 국장이 미리 잘 조율해줘서 그런지 주인이 벌써 마음을 비우고 있더군. 또한 다행히 오늘은 드림팀으로 구성이 되어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어." 정금이가 말했다.
"나라는 예술창고에 가봤어?" "아니 못 갔어. 도서관에서 책 읽고 가려고 했는데, 전원주택을 지나가는데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많아서 여기저기 구경하고 사람들도 보다가, 점심시간이 다되어 바로 여기로 왔지."
"근데 전원주택의 주인들이 다들 예술적인 안목이 있어서 그런지, 집도 그렇고 정원들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더라."
"처음에 전원주택 단지 전체를 설계하면서 집주인들한테 부탁을 했지. 자연과 어울리면서도 특색 있게 집을 지어달라고. 그리고 빈둥이공동체마을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정원도 개방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다들 고맙게도 흔쾌히 동의해주고 관리도 잘해줘서, 얼음골의 핫플레이스가 되어버렸어."
"그래서 이웃사촌이 중요한 거야." 정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예술창고는 오늘 못 가보겠네?" 도현이가 물었다. "아니야, 목공실은 젊은 친구들이 잘하고 있을 테니, 예술창고 들려 구경하고 목공 작업실에는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은데?" 나라가 말했다.
다들 이런저런 얘기하느라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는데, 힐링카페를 책임지고 있는 경애가 들어왔다.
"평소에는 젊은 친구들 먼저 점심 먹이느라 늦게 오더니, 오늘은 웬 일로 빨리 왔지?" 정금이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당연히 나라 얼굴 보러 서둘렀겠지." 도현이가 넘겨짚듯이 말했다. "아니, 어째 알았어?" 경애가 놀란듯이 물었다. "우리가 같이 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것도 모르니!" 도현이가 기분좋게 웃으며 말했다.
"어휴, 다행이다. 나는 혹시 너희들이 식사 다하고 간 줄 알고 걱정했는데. 아직 밥도 안 먹고 있었던 거야?" "네가 올 줄 알고 주린 배를 부여잡고 참고 있었지." 도현이가 이그러진 표정으로 얘기하자 다들 웃었다.
"일단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점심시간이 다 끝나겠다." 성일이가 말하자 다들 일어서서 주방 쪽으로 갔다.
점심은 닭볶음탕, 에그 스크램블과 새우 야채 카레가 주메뉴로 나왔다. "닭볶음탕과 카레에 감자가 안들어갔는데도 맛있내!" 나라가 신가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뿌리채소들 중에는 당분이 많이 있는 것들이 있는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가 그렇지. 특히 거기에 튀김 갑옷을 입혀버리면 건강에 더 안좋겠지." 성일이가 말했다. 나라는 좋은 음식으로 알았던, 뿌리채소들을 더 조심해야 된다는 말에 적잖아 당황했다.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 있어서, 얼굴 보기 힘든 박 팀장 보러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잘 되었네." 성일이가 말했다. "또 뭔데? 강 사무국장이 부탁할 일이 생기면 겁이 난다."
"자원봉사자 1명 더 받아주라." "우리 팀은 자원봉사자 수용인원은 벌써 넘겼어." 박 팀장이 난색을 하며 말했다.
"요즘 나이 불문하고 카페나 바리스타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다들 카페에서 일해보려고 줄을 서고 있내, 특히 박팀장이 잘 가르쳐준다고 입소문이 나서 그런 것 같아." 정금이가 말했다.
"이번에는 특별하게 부탁을 받았어." 성일이가 난처한 듯이 말했다. "어떤 사람인데?" 도현이가 물었다. "20살의 발달장애(편집자주 : 자폐증)가 있는 친구야." 순간 박 팀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빈둥이공동체마을에서는 인문의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모든 활동의 주축이다.
인문의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필수 자원봉사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자원봉사를 할 수가 있다.
2년 전에 힐링카페에 발달장애 청년을 자원봉사자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힘든 결정이었다. 팀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에서 박 팀장이 그들을 설득하여 같이 일해 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그 청년은 일이 익숙해지는데 일반인보다 2~3배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박팀장이 옆에서 도우미 역할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팀원들도 마음을 열었고, 그 친구는 하나하나 일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나 이제 손님을 상대하며 주문까지 받을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제 일이 익숙해져 바쁜 시간에도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그 어느 날, 그 친구는 갑자기 사라졌다. 다들 걱정이 되어 수소문해보니 그의 가족 모두가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카페 팀원들의 충격은 컸다.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 상황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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