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사회

둔한 놈, 미래가 없는 놈, 고생할 놈

pulmaemi 2009. 3. 27. 11:20

(사회디자인연구소 / 김대호 / 2009-03-25)

지난 3월23일 사회디자인연구소 주최 정기 포럼(사회디자인 포럼)에서 참여정부 평가(총론) 토론을 했다. 내가 발제를 하고, 김두수 상임이사가 사회를 봤다. 지정 토론은 김성환 전 청와대 정책조정(총괄)비서관이 했다.
 
참여정부는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한국 정치인, 정당, 정책 담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지적 보물창고다. 너무 많고 소중한 타산지석의 교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보물창고 문을 따고 들어가 곳곳을 누비면서 보물을 쓸어담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외환위기, 신용카드 대란, 대구지하철 화재, 숭례문 화재, 태안 기름유출 사건 등 대형 사고가 생기면 온 나라가 야단법석을 떨다가, 몇몇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버리고, 백서 하나 남기지 않고 덮어버리는 행태가 여기서도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 나라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꽤 자신있게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참여정부의 배신을 떠벌이는 자(신자유주의 운운하는 자), 좌파 어쩌구 하는 자, 노무현의 거친 말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는 자는 역사의 퇴물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실사구시에 게으르고, 통찰력도 없는 사람들 주변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의 이념, 정책적 행보를 화두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거의 6년이 됐다. 최초 문제의식이 싹튼 것은 2003년 중반 노 대통령이 안기부의 (국내 정보)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소문과 2003년 10월경 최도술 총무비서관의 비리 혐의로 인해 대통령 재신임 투표를 거론하는 것을 보고서다. 대통령에 대한 도덕적 신뢰라는 달성하기도 어렵고, (국가 경영자로서는) 비본질적인 가치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깜량’을 아는 A급 선수들이야, 참여정부 초기 인수위, 청와대 비서실, 내각 인선 때부터 강한 문제의식을 느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2003년 가을 이후 참여정부에 대한 문제의식은 계속 심화, 확대되었다. 근 1년간 묵힌 문제의식을 원고지 100매 가량의 장문으로 2004년 10월호 신동아에 실었다. 사전에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 돈도 궁하고 해서, 글이라도 좀 팔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혼자 원고를 써서 월간중앙과 신동아에 게재 여부를 타진했는데, 신동아가 먼저 OK했기 때문이다. 신동아 편집부가 내 원고를 참고로 하여 글 제목과 소제목을 자의적으로 정하는 바람에, 글이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뉴라이트류의 비판처럼 좀 싸가지 없게 느껴졌다. 제목은 [“한 운동권 출신 386의 참여정부 직격 비판” -망치 들고 허상과 곁가지만 좇는 짓은 이제 그만!-] 이렇게 되어 있었다. 소제목은 “미래 담론 없는 12대 국정과제 / 산업 마인드 없는 교육·보건정책 / 공무원과의 전쟁 없이는 정부혁신 불가능 / 富는 ‘파이’가 정해진 판돈이 아니다 / 국부 손실시킨 ‘정책 과거사’ 청산하라”였다. 관련 정보, 자료, 인적 네트워크가 너무나 부족한 시기에 쓴 글이지만, 지금 봐도 그리 부끄럽지 않은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 위치(온갖 모순, 부조리가 농축된 대우자동차에서 9년을 일하고 나온 실업자)가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글 느낌을 편집부가 자의적으로 바꾸는 행태를 보고 신동아에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물론 청탁도 해 오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 이후 참여정부의 전체적인 행보와 노선(?)에 대해서 글을 쓸 일이 계속 생겼다. 그렇게 몇 년간 숙성시킨 연구, 고민을 집약하여 <진보와 보수를 넘어>(2007년 5월 출간)에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헛발질”이라는 중간 제목(이건 내가 붙였다)으로 50페이지를 쏟아냈다. 2008년에도 참여정부 관련해서 글 쓸 일은 계속 생겼다. 대선, 총선 평가를 하면서, 새로운 정당의 정치노선을 연구하면서, 사회디자인연구소 창립기념 심포지엄을 하면서. 이 과정에서 수많은 토론, 자료, 책임자들의 증언(사실 확인) 등을 접하면서 문제의식이 좀 더 풍부해지고, 사실에 좀 더 근접하게 된 것 같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참여정부의 성과, 한계, 오류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전체상에 접근했다는 느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비판을 하는지, 그 비판이 어떤 측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보이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하는 참여정부평가 관련 토론회는 참여정부와 관련된 내 연구, 고민의 결정판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글의 형식이 <노무현 시대의 좌절>에 실린 조형제, 김양희, 양재진 논문에 대한 토론문 형식을 취하다 보니 내가 몇 년에 걸쳐서 한 연구, 고민의 성과들이 다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몇 년에 걸친 연구, 고민의 성과들을 파워포인트 파일에 담았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은 이것이다.

 

지진, 화산 모델

 

참여정부를 평가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참여정부가 2002년~2004년 당시 다수 유권자(지지자)들의 요구와 기대에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유산으로 남은 법, 제도, 문화가 뚜렷하지 않고, 참여정부의 정신을 계승한 정당, 정치세력, 유력한 정치인도 뚜렷하지 않고, 새로운 산업이나 외교적 성과 등 유형적인 치적도 뚜렷하지 않기에 시간이 흘러도 지금의 평가가 획기적으로 바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이명박,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보다야 높겠지만......

 

나는 2004년부터 참여정부가 허상과 곁가지를 좇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의 뿌리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겉표심만 보고 (유권자 스스로도 잘 모르는) 속표심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거칠게 말해서 참여정부는 수면 아래 있는 거대한 모순•부조리의 빙산을 보지 못해서 우선순위와 정책기조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해서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정치는 수학문제나 공학 문제와 달라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 못지않게, 대중의 표면적인 요구, 기대, 정서에 부응해 주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의 본질적인 요구와 기대는 자유, 풍요, 행복, 안전과 안정, 정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신분차별철폐, 왕정 타파-민주공화국 수립, 독립국가 건설, 민주화(직선제 개헌), 개방화, 산업화, 자유화 등이 당면 과제로 등장했다. 당시에도 빈곤, 기아, 양극화가 있었겠지만, 민주화, 자주독립 같은 구호를 내걸고 운동도 하고 전쟁도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열린우리당에 과반의석을 준 표심이 요구한 것은 양극화 해소, 경제성장 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반칙과 특권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화의 제도적, 문화적 완성’으로 정리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를 입증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도 있다. 이는 그가 파악한 표심이자 그가 받아 안은 시대적 과제이다.

 

(대선 때) 공정한 경쟁을 무력화하는 반칙의 시대, 특혜의 시대, 그걸 좀 청산하자고 했지 않았나, 지금 얼추 다 되어 가지 않느냐.…… 정부서는 검찰이 좀 센 편이고 정부 바깥에서는 아무래도 제일 센 것이 재계고 그다음이 언론 아니냐.…… 특권구조, 유착의 구조를 저는 거부하고 그것을 해체해 나가자는 민주주의 발전전략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권을 갖고 있는 집단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 2006.12.27 ‘부산 북항 재개발 종합계획 보고회’ 후 가진 오찬. 균형발전 추진, 작전통제권 환수합의, 특권구조 해체를 들면서)

 

역사의 진보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확산되고 권력이 보통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진보의 동력은 민주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4.19는 역류했으나 87년 6월 항쟁은 문민정부 시기의 하나회 척결을 통해 군사독재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그다음 과제는 특권과 유착을 통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해소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과제는 참여정부 들어 상당히 진전되었다.……민주주의의 다음 과제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이며 상호 헌신과 관용에 기초한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로 가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축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지 않고 소비자인 일반국민이 시장과 정치를 지배하는 소비자주권의 시대가 올 것이다. (2006.12.28.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신규 위원들과 오찬)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를 만들어 준 표심에 충실히 부응하였다. 대선자금 수사에서 검찰의 역차별을 받으면서도 특권과 유착을 통한 부정부패 척결에 헌신하였다. 관행적으로 행사되어 온 대통령의 제왕적 권능을 포기하면서까지 권위주의 청산에 전투적으로 임하였다. 지역주의를 탈피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물론 성과에 관한 한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이 표심에 부응한 대통령은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선과 총선에서 참여정부와 범진보세력을 외면한 민심이, 이들이 수행한 일의 성과가 적어서 돌아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심이 돌아선 것은 거칠게 말하면 참여정부와 범진보세력이 국민의 진짜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긁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시대정신의 대전환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지난 대선, 총선의 엄청난 표심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2002년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시대정신이 2007년~2009년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 이는 정치사회적 대격변, 혹은 환경적 대재앙이 휩쓸고 간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번에 지진/화산과 여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지각(단층)구조 모델을 만들었다. 내가 말한 모순과 부조리의 빙산은 일종의 지각 단층구조에 해당한다. 원래 지각구조를 알아도 지진과 화산 폭발 시기와 양상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지각구조를 알면 징후를 빨리 포착하고(각종 계측 장비와 인력을 통해서), 재난 시에 좀 더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뿐이다. 참여정부는 과잉시장-과소시장-이권(무능)국가라는 독특한 한국의 지각구조를 천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동시에 운이 나빴던 측면도 있다.

 

참여정부 집권 시기는 1961년, 1987년, 1997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제반 질서(시스템)의 모순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기였다. 자살율, 출산율, 청년실업과 장년•노년 실업, 영세자영업과 비정규직 등 3비층 위기, 양극화 문제, 신용카드 사태, 부동산 폭등 사태, 사교육비, 공무원연금 적자 등 수많은 모순들이 화산처럼 폭발하였다. 이는 노무현의 말대로 참여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만들어져서 참여정부에 와서 터진 것이다. 이로 인해 2002~2004년 초까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보낸 열화와 같은 요구와 기대가 일거에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시대정신의 대전환이 일어나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것이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패는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하고 이전처럼 행동했다는 데 있다. 이는 정치지도자들이 모순과 부조리의 빙산 전체를 통찰하지 못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한국 진보 정치권과 진보 지식사회의 존재 기반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순과 부조리가 심하게 나타나지 않는 중심부(정치경제적 기득권층)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기에 감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주변부나 말단, 혹은 약한 고리에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이를 조기에 감지하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정치세력(참여정부에서 민노당까지)이나 진보 사회세력(민노총과 전교조 등)이나 전임교수들이 주도하는 진보 지식사회는 대체로 기득권층이다 보니 여기에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폐한 정치생태계도 정치적 경륜 축적을 어렵게 하기에 민생 문제에 둔감하게 만들었다.

 

관료 편향성, 진보•보수 이익집단 편향성

 

이번에 나는 4대 국정원리-12대 국정과제-100대 정책과제를 비교적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이로부터 새로이 발견한 것이 많다. 12대 국정과제는 인수위 때 발표한 것인데, 지금 돌아보면 사상이념적 정체성이 민주노동당(진보신당 포함)이거나 북유럽식 사민주의인 사람들의 체취가 짙게 묻어 있다. 실제 이런 사람들이 인수위에, 각종 위원회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12대 국정과제와 곳곳에 포진한 시대착오적 좌파들을 보고서, 재계에서 참여정부를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 같은 무슨 ‘혁명 정부’처럼 오해할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100대 정책과제는 12대 정책과제를 구체화 시킨 것이 아니라 사실상 새로 작성한 것처럼 보였다. 100대 정책과제의 수행주체는 전적으로 정부부처이기에 관료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 있다. 이는 퇴임 후 자리 등을 매개로 관료를 포획하는 재벌•대기업 편향성을 의미한다. 동시에 관료의 체취는 전교조나 스스로 공공성을 체현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공공부문(경영자와 노조) 등 이미 자리를 잡은 진보 기득권 집단과의 공생을 의미한다. 사민주의는 여기에 그럴듯한 이념을 제공해 준다. 한편, 관료는 자신들의 특권과 특혜를 침해하는 개혁안도 피해간다. 안전빵 위주이기에 오랜 관행과 틀을 흔드는 개혁에도 미온적이다. 기존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정거래 문제와 벤처중소기업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이 뒷전으로 밀렸다(재벌•대기업 편향성). 보건, 의료, 복지, 교육, SOC 서비스 부문에서는 신분이 공무원이나 공기업(공단) 직원인 공급자들의 기득권을 충실히 보장했다. 그러나 공공병상 30%로 늘리기 같은 일은 예산과 비효율 문제로 인해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공공부문에 대한 하드웨어적 개혁이 실종되었다. 민영화, 경쟁화, 구조조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진보 기득권 집단과 공생). 조만간 한 해 수조 원의 세금이 들어가는 과도하게 좋은 공무원 연금 개혁은 실종되고, 대신에 “(공무원) 보수 합리화와 공무원 삶의 질 향상(정책과제 23번)”이 들어갔다. 공직비리수사처 등 공무원에 대한 강력한 감시 시스템 도입은 뒷전으로 밀리고 솜방망이나 다를 바 없는 “공직부패에 대한 체계적 대응 및 공직윤리의식 함양(정책과제 18번)”이 들어갔다.

 

교육 관련 정책과제도 학교교육체제 혁신(85번), 대학입학제도 개혁 및 대학 교육력 제고(86번), 직업교육체제 혁신(87번), 지역 교육력 강화(88번)가 제시되어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매우 안이하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교육소비자의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없다. 부동산 문제도 주거비 부담의 인하, 부동산 가격의 하향이 아니라 “부동산시장 안정기조 유지(정책과제 75번)”가 들어갔다. 지방토호들의 놀이터가 된 지방정부(지방의회) 관련해서는 꽤 급진적인 분권 정책이 거론되었다. 중앙권한의 지방이양 및 사무구분체계 개선(정책과제 28번), 교육자치제도 개선 및 자치경찰제도 도입(29번), 지방자치권 강화 및 지방정부의 책임성 확보(30번). 그러나 대통령이 내놓을 권한은 확실히 내놓기에 냅다 가져가지만, 기존 국가경찰이나 중앙부처가 내놓을 권능(예산, 조직)은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급진적인 분권 정책(예컨대 자치경찰제도)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100~200만 명 규모의 일자리 창출 사업인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과제는 사라지고 기존에 해오던 취로사업 식의 “사회적 일자리 창출(정책과제 78번)”, “자활지원사업 활성화(정책과제 79번)”가 들어갔다. 요컨대 정책과제를 보면 외과수술이 필요한 중병환자에게 운동요법, 식이요법, 한방치료 같은 처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대 국정과제를 만들 때 큰 힘을 발휘했던 민주노동당, 사민주의 경도자들은 노동계와 정부의 충돌로 인해, 또 시간이 가면서 점점 짙어지는 기업, 시장, 미국 편향성으로 인해, 예산 부족으로 인한 공공부문 늘리기의 좌절로 인해 참여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한미FTA로 인해 극에 달했다.

 

4대 국정원리의 철학과 현실 인식

 

4대 국정원리는 참여정부가 처음으로 제시한 것인데, 이를 노무현 대통령이 매우 강하게 의식하였다는 것을 김성환의 토론을 통해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볼 때, 하나같이 좋은 말이긴 하지만, 한국인 독특한 체질•性情(성정)과 사회 발전단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반동적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단적으로 대화와 타협은 무망하고, 분권과 자율은 반동적으로 작동하였다. 공정과 투명은 과거나 지금이나 가장 위력적이고 유효한 개혁적 가치지만 시스템으로 정착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노무현의 핵심적인 가치인 “원칙과 신뢰”는 어떨까? 사실 이는 정치인 노무현의 정수이자 나머지 국정원리를 포괄하는 최상위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바보 노무현’을 탄생시킨 배경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힘도, 야당의 탄핵 위협에 굴하지 않는 것도,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압승하도록 만든 것도 바로 나름의 원칙을 견지하려는 비타협적인 태도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원칙은 참여정부의 아마추어 시비, 오만, 독선 시비의 원천이자, 범진보의 극심한 대립, 갈등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대연정과 한미FTA는 지지층에 연연하지 않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는 ‘대통령으로서의 원칙’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 과제이다. 검찰 등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독립시키려 하고, 대통령 재신임 투표를 자청하고, 국가기관 과거사 진상을 규명하고, 인위적 경기부양책을 거부하고,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반대하는 등, 거의 모든 극심한 논란 사건 뒤에는 노무현 대통령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문제는 이 원칙이 올바른 철학, 현실(역사적 감각)에 근거해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본래 원칙이 올바르면 대단히 건설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내가 아는 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집권 시기에 설정한 원칙은 결코 올바른 철학, 현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오류는 한국 사회의 강고한 모순•부조리와 제약조건을 직시하지 못했고, 정치주체의 일천한 역량(정치제도, 이념, 정책, 조직(정당), 네트워크 등)에 비해 너무나 획기적인 개혁을 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정무적으로도 무능했다, 도덕성과 진정성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겸손하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이것이 보잘것없는 외형적 성과와 대비되어(일종의 보색이 되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한계나 오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잘못된 철학과 현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참여정부가 하려던 개혁도 사실 문제제기 방식은 파격적이었으나 실제 내용은 관료의 정치적 상상력과 이해관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그리 파격적이지도 않았고, 시대정신에 부합되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개혁 내용은 한국사회 발전의 주적(진보와 보수 기득권 집단과 이권•무능 국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급변하는 환경과 낡은 시스템, 리더십의 충돌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엉뚱한 데서 변죽을 올렸다. 한마디로 문화적으로는 급진적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급진적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모르면 관료 말, 삼성 말을 들어야

 

내가 참여정부의 관료 편향성, 재벌•대기업 편향성, 진보(공공성을 내세우는) 이익집단 편향성, 토호들에게 장악된 지방정부 편향성을 얘기하면 박수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술 더 떠서 참여정부를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관료의 정권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정치권과 지식사회가 과연 관료를 리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장과 민주주의의 오작동으로 인해 혹독한 고통의 쓰나미가 밀려왔다고 해서 시장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획기적인 모델인 북한 모델, 이란 모델, 베네수엘라 모델이 대안이 아니듯이, 북유럽 사민주의 모델도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방적 시장 경제를 채택한 대한민국이 혹독한 양극화와 경제위기를 심하게 앓는다고 해서, 그 전략적 방향성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듯이 참여정부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 방향성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여정부의 이념, 정책적 계승자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당연히 “노빠”라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나는 국민의 입장에서, 전문성의 관점에서 관료보다 못하면 관료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삼성보다 못하면 삼성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의 문제는 관료보다 못한 놈들이 관료를 휘어잡으려 하다 보니 얼마 되지 않는 관료의 창의와 열정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정부는 적어도 비록 60점 수준도 안 되는 관료의 창의와 열정을 죽이지는 않았다.

 

이런 얘기는 참 오해의 소지가 많은 얘기다. 그래서 강조하는데, 나는 한국 관료 수준으로는 강고한 모순과 부조리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집권을 꿈꾸는 정치세력들은 관료와 삼성과 참여정부를 훨씬 능가하는 이념, 정책 역량과 인재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여정부의 성과, 한계, 오류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성과는 계승하고, 한계는 감안하거나 뛰어넘고, 오류는 시정하자는 것이다.  범진보세력에서 아직도 참여정부가 국가경영 능력이 1등이지만, 이쪽의 1등으로는 집권이 택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2007년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 순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둔한 놈, 미래가 없는 놈, 고생할 놈

 

참여정부를 주제로 수많은 사람들과 토론을 해봤는데 가장 답답한 사람은 물론 ‘노빠’와 ‘노까’들이다. 둘 다 대중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둘 다 실사구시가 너무 부족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충분히 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한 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답답한 사람이 참여정부 하에서 범진보의 이념적, 정책적 균열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는 사람이다. 이른 바 둔한 놈이다. 사민주의에 경도된 사람이나 구 운동권 물이 덜 빠진 사람은 예산 부족과 언론 지형 때문에 사민주의 가치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보개혁 세력의 균열은 현실적 한계를 아는 사람(자기 자신)과 모르는 사람(재야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의 차이 정도로 생각한다. 당연히 참여정부 기간에 일어난 진보개혁 세력의 극심한 분열은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는 실개천 정도로 본다. 오해가 풀리면 간단히 봉합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암만 봐도 진보개혁 세력의 간극은 결코 실개천 수준이 아니다. 대기업•공기업 주도의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 경제•금융 정책, 한미FTA 정책, 보건, 의료, 복지, 교육 정책 등을 종합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로 간주했기에 배신감에 치를 떨지는 않는다. 그러나 온건 민노당 성향이랄까, 사민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참여정부 주류를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배신자들로 간주한다. 반성문을 쓰고, 정치적으로 매장되어야 할 존재들로 생각한다.

 

나는 참여정부 시기에 일어난 범진보의 대립, 갈등을 범진보의 진화, 발전 과정으로 본다. 극심한 대립, 갈등을 “미래가 없는 놈”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시대착오적 진보(북유럽 사민주의)와 미래는 있을 지라도 고생 길이 훤한 21세기 집권 가능한 진보의 분화로 본다. 군사독재가 맹위를 떨칠 때는 민노당부터 참여정부 좌•우파는 물론이고 한나라당 일부까지 동지였다. 하지만, 군사독재가 퇴조하고 나서는 이념, 정책, 지역, 개인적인 이해관계 등을 좇아서 다양한 분화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복지 수준이 형편없을 때는 사민주의와 자유주의가 한목소리로 복지 재정 증대, 사회안전망 강화(국민건강보험 사각지대 해소, 공적 보장율 향상, 고용보험 강화 등), 공적 복지 전달 체계(보건 복지 관련 공무원 증원 등) 강화 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복지 수준이 올라가면 전략적 방향성에서 차이가 난다. 조세•재정 정책에서도, 노동, 교육, 경제금융 정책 등 다방면에서 심각한 충돌이 생겨난다. 참여정부 기간은 바로 이런 시기였다.

 

예컨대 복지예산이 1조 원 있다고 치자. 1조 원은 연봉 4천만 원 짜리 공무원 2만 5천 명을 고용할 수 있는 돈이다. 사민주의 정책은 거칠게 말하면 대략 8천억 원을 들여 2만 명의 복지전달 공무원을 채용하고, 나머지 2,000억 원으로 건물 짓고, 공간, 차량 임대한다. 그리고는 복지 수혜자가 복지담당 공무원을 찾아오게 하거나, 공무원이 찾아가는 서비스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신규 채용되는 사람(철밥통 공무원)은 팔자 고치는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공공부문 노조의 새로운 조직기반이 될 것이다. 물론 조직과 예산은 한번 늘려놓으면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정책은 이를 복지 소비자에게 바우처로 나눠주는 것이다. 거칠게 계산하면 연 수입 1천만 원짜리 10만 명 분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복지서비스 제공자들은 일정한 교육훈련을 받게 하여 요양보호사 같은 자격증을 부여하고, 복지서비스를 시장에서 팔게 한다. 당연히 건물 짓고, 공간 임대하는데 비용은 거의 안 쓰게 되어 있다. 반면에 알선 중개하는 (수수료 따먹으려고 하는) 사업체가 곳곳에 생겨난다. 개중에 사기 치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 선택권이 있기에 경쟁이 있고, 복지서비스를 잘하는 사람은 연간 수입이 3~4천만 원이 될 수도 있다. 못하는 사람은 몇백만 원, 아니 자격증만 따놓고 그냥 파리를 날릴 수도 있다. 소비자 선택권이 있는 한 서비스 질은 점점 개선될 수밖에 없다. 철밥통 공무원에게는 일거리가 없으면 신나는 일이지만, 요양보호사에게는 일거리가 없으면 죽음이다. 이 서비스가 공짜가 되면 요양보호사와 복지수혜자의 담합이 일어날 것이기에 공짜로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칙, 편법이 없을 리 없다.

 

당연히 복지서비스가 웬 돈벌이 대상이냐는 둥,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일자리라는 둥, 부정 비리의 온상이라는 둥 온갖 비난이 진보 언론과 공공부문 노조에 의해서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상식이 있는 국민들은 이들의 분노와 비난이 현실에 대한 무지나 기득권 보호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을 단박에 알 것이다.

 

문제는 일자리와 소득 구조

 

솔직히 한국에서 일자리를 절실히 원하는 사람이 실업률 공식 통계에 나와있는 80~100만 명 수준이라면, 서비스가 좀 나쁘고, 예산과 조직이 좀 경직된다 하더라도 사민주의적 해법을 채택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국은 일자리 사정이 너무나 열악하다. 연봉 4천만 원 아니 3천만 원짜리 일자리라도 철밥통이기만 하면 그 일자리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1,000만 명은 될 것이다. 비경제활동인구에서, 영세자영업에서, 비정규직(임시, 일용노동자)에서, 중소기업에서 그 일자리를 가지겠다고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진보를 고창하는 학자들 상당수와 공공성을 고창하는 조직노동은 수백만 실업자, 반실업자, 청년세대의 고통과 기회 부족에 눈을 감고, 일자리를 만들려면 최소한 자신들이 누리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못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대로 된 일자리는 북유럽과 달리, 1인당 국민소득의 최소 2배 정도(연봉 3천5백~4천만 원)는 된다. 고용안정은 공무원, 교사나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노조원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의 전반적인 기업 능력과 학부모들의 교육비 부담능력과 국가의 재정 능력은 이런 일자리를 수백만 개를 추가적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이는 우리 생산력에 비추어 보면 거의 귀족 수준이다)가 나오면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 된다.

 

한국에서 진보와 공공성을 고창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적자 재정을 편성해서 좋은 일자리(철밥통 공무원)를 많이 만들라고 말한다. 생사를 다투는 기업에게는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말고, 고용이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 많이 만들라고 말한다. 세금 왕창 더 걷자고 말한다. 당연히 국민적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비록 소득세 한 푼 안 내는 영세자영업자, 중소기업근로자, 청년실업자라 할지라도……. (그런데 이들이 세금을 안 내는 것이 아니다. 담배 피우고, 소주 먹으면서 간접세는 많이 낸다.) 어쨌든 증세도, 공공부문의 좋은 일자리 창출도, 민간부문의 좋은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런 시대착오적 비전, 전략을 제시하는 진보에게 미래가 있을 리 있겠는가? 나는 한국 진보좌파가 맛이 가 버린 것은 그들이 이미 한국에서 상당한 기득권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울산 북구에서 민노당, 진보신당 후보 단일화 방안으로 민노당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참가하는 일명 민중경선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민중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총칭했다. 그러나 지금 민노당이 말하는 민중이 과연 그런가? 이들은 명명백백한 귀족이다.

 

물론 이들은 사민주의를 대단히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사민주의가 고용안정-큰 공공부문-노조의 높은 정치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민주의를 부르짖는 존재들이 사민주의의 핵심인 사회적 연대성, 책임성은 수용할 것 같지가 않다. 기업이 떼돈을 버는 존재가 아닌 이상, 자신의 노동시간과 임금 수준을 대폭 떨어뜨려 고용을 늘리든지, 아니면 돈 좀 버는 사람이 세금을 무지막지하게 떼어내서 못사는 사람들과 청년세대들과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자칭 진보(좌파)는 진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우파적 개혁 없이 좌파적 개혁 없다

 

자유주의, 시장주의, 소비자 중심주의를 신봉하는 나는 복지재정 늘리는데 훨씬 당당하고 적극적이다. 철밥통 복지 전달 공무원을 늘리는 식이 아니라 복지 소비자를 더 만족시키고, 복지 부문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는 한국의 생산력(평균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공공부문의 처우(임금, 연금 포함)를 최소한 동결하든지 낮추고, 그 여력으로 더 많은 유연한(시장 및 소비자 친화적인) 고용을 창출하려고 한다. 재벌대기업에 대해서는 독과점과 불공정거래를 엄단하여 벤처중소기업이 적어도 선진국에서 겪지 않는 설움은 없애주려 한다. 증세를 얘기하기 전에 쓸데없는 건물 짓고, 도로 놓고, 공항 짓는 데 사용되는 재정부터 합리화하여 복지재정을 늘리려 한다. 요컨대 지금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시장주의, 소비자중심주의 원칙에 충실해야 만 좌파적 정책(연대성에 기초한 일자리 창출)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시장주의, 소비자 중심주의는 (소비자 중심주의는 아니지만) 재벌대기업이 원하고 기업이 원한다. 동시에 이들에게 들이대는 칼이기도 하다. 사민주의는 공공부문 종사자 다수가 원하고, 대기업•공기업 조직노동이 원한다. 그러면 거대한 3비층, 벤처중소기업근로자들, 청년세대는 무엇을 원할까? 개인적으로는 사민주의를 주창할 수 있는 직업, 직장을 원하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자유주의, 시장주의, 소비자 중심주의를 원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을 대표하는 기업 엘리트들(기업가, 사무기술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각종 보호장치 안에서 잘 먹고 잘사는 전문직들은 어떨까? 자신에게 유리한 규제, 보호장치는 유지하고, 불리한 것은 풀려고 할 것이다. 모순적 자유주의, 시장주의를 원한다는 얘기다. 이들은 여론 주도층이긴 하지만 숫자가 많지 않다.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사민주의는 대화와 타협, 분권과 자율, 탈권위를 주창한 노무현처럼 한국 사회를 참 아름답게 보려고 한다(노무현을 그렇게 비판하면서도 실제 사회관은 나이브 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좀체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 단적으로 한국 선거법은 유례없이 엄격한 규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출마자들이 그만큼 변칙, 편법에 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의 창의성, 치열성, 민첩성의 징표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국가가 개인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면, 즉 서비스가 공짜거나 개인의 부담이 덜하면 그 어떤 나라보다 낭비가 심하게 일어난다. 공짜 의료를 누릴 수 있는 일부 사람들(기초생활보호대상자)의 의료소비 행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북유럽과 달리 시민 사회에 뿌리 박은 감시, 고발, 자제 문화도 없다. 이런 것이 있었다면 정규직-비정규직 격차도, 전임교수-시간강사 격차도 애초에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사민주의 토양과 너무 멀다. 자유주의는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

 

참여정부 이념과 정책의 정수, 달리 표현하면 진보적 자유주의, 시장주의, 소비자중심주의는 구 운동권 물이 많이 들어있는 쪽, 세상물정 모르는 맘씨 좋은 강단 학자들, 진보언론, 공공성을 팔아먹고 있는 조직노동 등 미래가 없는 쪽에서는 다수가 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을 아는 기업 엘리트층, 이념적 편견이 없는 청년세대, 벤처중소기업 종사자, 거대한 3비층 등 다수 국민들에게는 압도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의 주도권을 쥐는 과정에서 엄청 고생할 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 출처 - http://www.goodpol.net/inquiry/statistics.board/entry/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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