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칼럼] 전국민 정신검진, ‘우생학의 부활’ 될까 걱정된다

pulmaemi 2014. 1. 7. 20:59

최보문(가톨릭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한국의료윤리학회 회장)

 


국민들의 정신건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우울증 스크린을 하겠다는 계획안이 나온 지 채 1년도 안된 지난해 6월 보건복지부가 ‘정신건강증진 종합대책(안)’을 발표했다. 우울증 스크린 계획이 언론에 흘러나왔던 초기부터 비판과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지라 과연 진행이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와중에 느닷없이 발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복지부가 종합대책안을 마련해 발표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여러 가지 의혹이 든다. 비판과 반대를 회피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내부에서만 진행해 결정하고 발표함으로써 반박할 여지를 두지 않으려한 것은 혹 아니었는지, 정책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논의 이 두 가지가 배제된 이유가 무엇인지, 또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일차의료도 아닌 행정기관에서 건강과 질병 스크린을 하는 곳이 없는데 이 정책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등등이다.  

이 정책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스크린 정책은 필요한 것인가? 그 효과에 대한 의과학적, 사회과학적 근거가 성립되어있는가? 질병스크린을 위한 기본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가? 예방과 조기치료의 임상효과가 입증되어있는가? 또 비용대비 효율적인가?

애초 우울증 스크린에서 출발한 정책이므로 우울증을 중심으로 정신건강 스크린 정책의 문제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울은 인류와 함께 항상 존재했으나 그 성질을 대변하고 명칭을 붙이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져왔다. 정신의학이 의학의 한 분야로 성립되고 정신과 질환이 분류되고 이름이 붙여지는 과정에서 우울증 또한 정신의학의 당대 패러다임에 따라 각기 다르게 개념화되어왔다.

정신분석 이전 시대에는 기질성 원인을 가지는 멜랑콜리(melancholy)와 반응성으로 우울해지는 비멜랑콜리로 분류되었던 바 있고, 정신분석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우울증은 심인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20세기 후반 정신의학이 정신분석을 버리고 의학의 적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대대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면서 우울증의 개념은 한 가지로 통일되는데, 주요 우울장애가 바로 그것이다. 주요 우울장애의 원인은 ‘뇌의 화학적 불균형’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이 단어는 일상적 용어로 쓰일만큼 유행하기도 했다. 어쨌든 주요우울장애는 무분별한 생활이나 무기력한 성격 등과는 상관없이 뇌의 문제로 귀결됐다. 따라서 그 개인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이는 항우울제에 의해 치료되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 이후 정신의학을 지배해 온 것은 정신질환 진단에서 심인성 등의 원인론을 배제하고 증상 중심으로 진단분류를 한다는 과학정신이었다. 치료는 생물학적, 다시 말해 정신과 약물로 치료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항우울제의 급격한 증가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의 보편화와 무관하지 않다. 항우울제의 판매 급증은 주요우울증 진단이 급격하게 증가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WHO 발표에 의하면 우울증은 2000년에 이미 전 세계적 질병부담율의 원인 2위이었으며, 2020년에는 질병빈도상 2위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함께 항우울제 판매는 지난 20년 동안 40배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정신과 질병 역병의 시대(psychiatric epidemics, invisible plague)'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들리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듯 ‘우울증 역병의 시대’에 이르면서 나라마다 우울증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미국이다. 정신의학의 분류체계를 만든 나라답게 주요 우울증의 진단이 가장 많으며, 항우울제 또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나라답게 우울증 조기발견과 조기치료에 대한 대책을 세운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에 general medical setting에서 시행되었던 우울증 스크린은 'detect-treat-improve'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곧 비판을 받게 된다. 스크린 프로그램들이 윤리적, 효율성, 임상적 근거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90년대 후반 대폭 수정된 우울증 스크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차의료 환경에서 하는 우울증 스크린은 권장되고 있으나, 다만 더 자세한 진단과 치료 및 추적이 가능한 곳에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신과 전문의가 상근하고 있어서 스크린에서 positive로 나온 대상을 진찰해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계속 치료할 수 있으며, 치료효과를 추적할 수 있을 때에만 스크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 정신질환 스크린은 제약기업이 후원하고 있다. 캐나다, 호주 등 역시 같은 조건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반면 보건의료가 국가재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영국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영국의 NICE(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에서는 일차의료 영역에서 우울증 고위험군에게만 스크린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 근거는 WHO의 ‘Wilson & Jungner classic screening criteria’를 상당부분 차용한 것이다. 보건의료 스크린에 대한 원칙과 기준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National Screening Committee에서 권하는 것을 상세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우울증 스크린, 잘못 진단할 확률 높아

우선 우울증이 중요한 건강문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우울증의 연간 발생률은 약 8~12%이고 우울증에 의해 삶의 질이 저하된다는 점에서 경제적 손실 또한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우 연간 약 830억 달러, 영국의 경우 80억 파운드로 알려져 있다. 미국이 영국보다 약 6배 이상의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는 셈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는 의료재정의 구조와 연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역학과 임상과정이 과연 충분히 밝혀진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쟁거리이다. 특히 최근의 진단분류체계 변화와 더불어 그동안 마법의 약으로 알려졌던 항우울제의 효과에 대한 논쟁이 차츰 격화되면서 우울증 자체의 개념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우울증 환자에 대한 장기추적 및 역추적 조사에 따르면 초기에 일반의사가 인식하지 못했던 환자일지라도 의료서비스 나중 단계에서 대부분 확인이 되고 치료를 받게 된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한 우울증 스크린에서는 일시적 스트레스나 삶의 과정에서 비롯된 우울감도 positive로 나오며, 이들 대상의 대부분은 2~4주 이내에 우울감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코크란센터에서는 경도 혹은 중등도의 우울증은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대기요법(watchful waiting) 기간이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우울증은 인구집단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스크린 한다는 관점에서는 스크린 대상의 하나로서 고려될 수는 있겠으나, 사람의 정서가 수시로 변하며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위양성(false positive)을 대량 양산해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나중의 의료서비스 단계에서 확인되는 비율이 높다는 점에서 스크린의 대상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검사 도구에 관한 것이 있다. 스크린에 사용되는 검사는 타당성이 확립되어 있어야 하고 간편하며 정확해야 한다. 임상에서 사용되는 자가측정 척도는 대부분 민감도(sensitivity, 75% 이상)와 특이성(specificity, 85% 이상)이 확립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울증의 빈도를 10% 전후로 볼 때 예상되는 positive 값은 50% 이하이어서 유용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서비스를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검사 도구는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용인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환자의 경우 혼자 측정할 경우 정확성이 높아지지만 의료 환경에서 사용될 경우 그 용인도는 30~60%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 중 하나이다. 의사들이 자가측정 척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우울증으로 진단된 환자의 증상개선 정도를 알아보거나 우울증 병력이 있는 사람의 재발여부를 알아보는데 사용하는 것이지, 새 환자를 검색해내는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무엇보다 조기 발견을 함으로써 조기 치료하는 것이 질병과정에 충분히 밝혀져야 하며 임상적으로 보건관리과정이 스크린을 시행하기 이전에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의학계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임상지침은 ‘임상적으로 의의 있는’, 다시 말해서 중등도 혹은 중증의 우울증 환자에 관한 것이다. 경도의 우울증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과 비교했을 때 약물 치료 혹은 정신치료 어느 쪽도 치료효과가 뚜렷하지 않고 성격적인 면이나 삶의 상황과 맞닿아 있어서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조기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근거가 없다.

미국 예방의료특별위원회(USPSTF)에서는 스크린에 의한 조기치료가 효과가 있었다고 2005년 발표한바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스크린에 의한 효과만을 본 것이 아니고, 환자교육, 전화상담, 정신치료, 약물치료 및 의사에 대한 교육까지 포함한 다차원적 종합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어서 이를 스크린의 효과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캐나다의 경우 스크린 자체가 우울증 환자의 유병률을 줄이거나 우울증 증상을 개선시킨다는 근거가 없다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전문적 치료가 가능한 곳에서만 필요시 스크린 할 것을 권하고 있다. 결국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에서도 인구집단에 대한 우울증 스크린이 조기발견과 조기치료의 효과로 이어진다는 근거를 아직 확립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스크린의 해와 이득을 비교할 때 해보다는 이익이 확실히 큰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 가능한 해악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잠재적 우울증이라는 판단을 받음에 따른 낙인효과, 일시적인 우울감을 질병으로 판단함에 따라 오는 해로움, 즉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로서 우울증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효과를 자아내어 그렇지 않으면 개선될 증상을 도리어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정신질환 잠재성만으로 보험회사 등에서 받을 수 있는 차별 등이 개인에 대한 것이라면, 인구집단 차원에서 오는 해로움 역시 주목되어야 한다. 일시적 스트레스에 의료재정이 소요되면서 정작 중증의 우울증 환자가 치료받을 수 있는 서비스혜택은 상대적으로 박탈되는 것이며, 의료인력의 에너지가 분산되면서 의료서비스를 받는 시간과 진료의 질 또한 축소될 가능성은 의료재정 못지않게 강조되어야 할 문제이다. 

의학적 접근보다 사회 구조적 관점서 바라봐야

결론적으로 영국 NICE에서는 일차의료 환경에서 일상적으로 우울증 스크린을 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앞서 살펴 본 북미의 연구결과도 우울증 스크린이 효과적이자 효율적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울증 스크린은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주제이다. 무엇보다 의료정책은 인구집단에 대한 보건의료라는 점에서 집단에 대한 의료윤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국가 전체의 질병부담과 경제적 손실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분배정의의 윤리성을 가지고 있다. 즉 범국가적 차원에서 개인의 요구를 고려해야 하며, 또한 사회 모두가 인정하는 가치에 바탕을 두고, 소요되는 재정과 효과에 대한 과학적 근거에 따라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개인의 요구 차원에서 볼 때, 시장주의 문화가 판을 치는 경쟁위주의 사회에서 부와 권력이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며, 심적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심적 고통을 둔화시키기 위해 항우울제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취업도 어렵고 신분상승의 사다리도 작동되지 않으며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지도 못한 채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고난 앞에 놓인다면 어쩌면 항우울제만이 고통의 예봉을 피하는 유일한 수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의 성격이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의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란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약을 복용하고 고통을 잊음으로써 실재하는 사회적 문제는 은폐돼 버리고, 구조적 문제를 말하는 개인의 외침이 침묵하는 곳에서 사회는 한층 기형적으로 되어갈 것이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문제를 사회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의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해 개선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인 셈이다.         

반면 한정된 의료재정을 효율적이자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인구집단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에게는 정당할지 모르는 요구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가벼운 증상을 개선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인해 중증환자가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의료서비스의 공정한 분배는 차별과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가뭄 시에 각 개인에게 일정한 양의 물을 분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이다. 중증환자에게 더 많은 재정이 소요되고 감기환자는 자가치료 해야 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불가피한 차별과 선택을 해야만 하는 보건의료당국이 정책을 만듦에 있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야 하고 스크린 지침을 충실히 따라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류애, 복지, 인도주의 등의 수식어가 붙는 정책은 흔히 프리패스 되기 쉽다. 자살예방운동이 반세기가 넘었으나 아직 자살률을 줄이지 못하고 예방효과도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자살예방운동과 우울증 스크린은 그 관점은 물론 재정책임 또한 각기 다름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올해 시행될 정신건강 스크린 정책은 일차의료 영역이 아닌 행정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정책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서울시 학교정신건강 스크린 정책 전문가 회의에서 한 학회 단체장이 한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지금이 나치시대도 아니고, 이건 우생학의 부활입니까?“  

최보문은?

1977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 신경정신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이후 가톨릭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년 옥스퍼드대학교 의료인류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006년 9월 가톨릭대 의대에 인문사회의학과를 개설했다. 현재 한국의료윤리학회 회장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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