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사회

[정치] 중딩 언플

pulmaemi 2012. 5. 30. 15:50

한국 TV는 아이들에게 치몀적인 선악 구도, 폭력과 진영논리에 길들어지도록

 

텔레비젼이 프로그램을 만들 때 성인시청자를 상정하지 않는다. 오후 5~7시 어린이시청 시간대의 편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거의 전 시간대에 중딩 수준 이하의 가상 시청자를 염두에 둔다. 울 나라만의 현상도 아니다. TV 선진국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 텔레비젼의 주된 현상이다.

 

왜냐면 TV는 프로그램 장사를 통해 영위되는 사업이 아니기때문이다. 광고 시간을 팔아야 수익이 나는 구조다. 시청률이 높아야 광고 시간을 비싸게 팔 수 있는 만큼 되도록 많은 머릿수를 TV앞에 끌어들이는 것이 운영의 묘미다.

 

성인 시청자 수준에 맞춘 프로그램은 이러한 법칙을 위배한다. 일정 연령이나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의 시장가격에 기여하지 못한다. 따라서 TV는 나이가 어리고 취향이 유치한 시청자를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런 콘텐츠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취미가 고상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물론 단순한 연령의 하향 조정만이 프로그램의 제작 원칙은 아니다. 질적 하향성, 초딩 교육 수준의 도덕적 요구도 당연히 따라간다. 아이들이 섬세한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만큼 TV는 단순하고 강한 자극을 지향한다. 드라마는 선악구도라는 단순성에 의지하고, 코미디는 일정부분의 폭력을 활용하며, 뉴스는 정당의 수준만큼 피상적인, 좌우진영 구도의 레토릭을 구사한다.

 

한국 TV는 위선과 도덕의 버무림으로 미풍양속이란 이름의 편성 원칙을 고수한다.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 함양은 그 자체로 애매함의 교과서 같은 표현인데 TV에서는 그것을 성인용 시청시간대 편성에서조차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성인 시청자는 그 자신의 도덕적 판단력이 아니라 아이들의 부모, 삼촌, 할아버지의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야한 장면을 볼 수 없는 것 이상의 위선이 시청자에게 조직적으로 내재화된다. 이들 중 많은 숫자가 죄의식화된 성인본능을 보상받기 위해 기형적인 룸싸롱 산업의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서도 아까 말했듯, 아이들에게 훨씬 더 치명적인 선악구도, 폭력, 진영논리에  어려서부터 푹 젖어들게 한다는 문제의식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또 어색할만큼 반듯하게 차려입고 캘로그 광고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상업적 착취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제적 비교에서도 매우 관대한 법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을 이용한 광고의 대부분은 소유냐 미소유냐를 기준으로 계층의식과 왕따의식을 조장하는 '이상한 미풍양속'을 퍼뜨린다.

 

TV의 이와같은 어린이 지향성을 'TV 소아주의'라고 부른다. 정치인과 언론인은 이렇게 길들여진 시청자인 유권자, 국민의 눈높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 양당제의 폐해 중 하나가 극단화된 개념의 이원대립을 낳는다는 것이다. 공화당과 민주당밖에 없는 미국 선거는 모금액과 여론이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데 정당과 정치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선명성'을 강조하는 언어와 정책을 내세운다.

 

오바마는 건강보험 문제, 관타나모 수용소, 서프라임 모기지 문제, 금융개혁 등 공화당과 대척점을 이룬 몇 가지 공약들의 내세웠는데 건강보험은 그 화려한 제목과는 달리 극히 일부의 수급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갔고, 관타나모는 그 자신도 철수 의지가 없는데다, 금융 세력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적 자금 투입에 사인하고 서프라임 원흉이라는 골드만삭스에 대해 그들의 2주일치 영업이익에 해당하는 솜털같은 벌금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이제 재선되어야 겠으니 또다시 '동성애혼'이라는, 전통적으로 공화당과 대립된 견해를 내세웠던 켸켸묵은 식별표시를 끄집어내 '난 쟤들과 여전히 달라요, 달라'를 외치고 있다. 하긴 오바마는 무엇보다 중요한 혁신인(듯 보이는) 까만 피부를 이미 한 번 써먹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토끼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아이들은 형아에게 뺏긴 장난감 권총을 대신해서 엄마가 쥐어주는 밥주걱에 잠시 속아준다. 문제는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을 위해 끊임없이 밥주걱과 국자를 강요하는 권력자들..그리고 애초에 내가 원한 것이 밥주걱인지 장난감 권총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소아적 유권자들....

 

심지어 이젠 권총을 내놓으라 외치는 박봉팔 닷컴 같은 일부 세력에게 '야. 형은 니 적이지만, 엄마는 니 편이잖아, 후레자식 같으니' 라고 훈수두는 나꼼수 같은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대중을 세력기반으로 발언하는 '권력 행위'에 동참하고 있음을 모른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여전히 국민을 아이 수준으로 우롱한다. 박원순의 돌고래쇼, 시청 옥상 양봉쇼, 시청 직원 반바지 쇼, 뒤로 재건축 용적률상향 본색은 권총 대신 주걱을 들이대는 엄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징의 다채로움을  구사한다. 

 

그는 몇 마리 돌고래가 휴머니즘을, 시청 벌 나비가 환경주의를, 반바지가 탈권위를 상징하며 재건축 용적률 상향의 진실을 덮는 데코레이션이 되어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데코레이션들의 총합은 바로 인간 박원순의 '반이명박스러움'으로 해석될 것이이라는 중층적 계산도.

 

증오를 동력으로 한 언론플레이는 결국 식별표시를 통해 구현된다. 식별표시는 소아적 감수성 훈련에 익숙한 사람에게 잘 먹혀들어간다. 빨간 새누리당과 노란 민주당 보라 진보당은 구별의 편리성을 제공함으로써 소아적 요구에 부응한다. 더 나아가 보수 새누리당, 중도 진보 민주당, 노동, 복지 진보당은 그 색깔들이 웅변하는 약속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소위 정치적 지향성이라는 저 구호들 역시 약속이 아닌 식별표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수십년을 통해 경험해 왔다. 그 상징 안에는 아무런 약속이나 책임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단순히 표시의 대립을 기반으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는 운명에 놓였 있었던 것이다.

 

그 원흉이 TV만은 아닐 것이다. TV와 리얼리티와의 차이를 자신의 사고 영역에서 갈무리하지 않은 개인과 그에 대한 문화적 압박은 모두 '식별이 지배하는 세상'의 기여자다. 모난 돌이 정맞는 문화에서 대중 취향에 묻어가기는 안전과 익명성, 주류에 대한 편승을 보장한다.

 

안철수는 오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안이 대중에게 던지는 그물은 박원순보다 더 넓기때문에 식별표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애매함의 전법'을 구사한다. 그러나 이는 나름 예리한 판단의 결과물이다. TV 주요 프로그램은 다양한 연령, 다양한 캐릭터, 다양한 직업을 참여시켜 다다익선의 원리를 구현한다.

 

스폰지 패널, 공동 MC, 소녀시대같은 떼거지 전법, 양,한식 라이프스타일과 조부, 부모, 자녀 관계를 기본으로 삼는 드라마 등은 모두 TV시청률의 잡식성을 표적으로 하는 포맷이다. 거기에 소수 취향은 고려되지 않는다. 안철수는 딱 이 공식을 따르고 있다. 시장도 아니고 대통이 되겠다는데 화끈한 데코레이션은 대중성이 떨어진다. 화끈함은 아무런 거시적 비젼 없이 대딩들 편드는 언플로 족하다.

 

오바마 대선 슬로건은 '우리가 믿는 꿈'이었다. 역시 애매함의 전법을 통해 대용량 그물을 드리운다는 점에서, 꿈이라는 달달하고 보편적인 용어를 통해 호소한다는 점에서, 소아적 감수성을 겨냥한 전형적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성급한 유권자들은 오바마가 채택한 Dream이라는 표현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 선언인 'I have a dream'을 의미한다며, 그가 인권, 개혁의 선도자로 나서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치하했다. 그랬다. 오바마는 그런 선언의 효과를 기대했다. 다만 그는 식별표시만을 사용했지, 약속을 담지는 않았을 뿐이다.

 

양대 정당에서 이탈한 또 하나의 정당이 단순한 식별표시에 기생했을 뿐이라는 사실에, 오직 자파의 권력 독점을 목적으로 거짓된 약속을 흘렸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으로 딜레마를 벗어날 수는 없다. 어려서부터 훈련된 나와 너, 좌와 우, 선과 악이라는 대립적 인식을 경계할 때, 변화는 스스로 도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대립적 인식에 묻어가는 것이 사실 약싹빠른 권력 행위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식별표시에 의지하지 않은 희귀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인민의 안위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정치적 포석이랄 수 있는 대립적 상징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그는 FTA를 하면서 신자유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고, 종부세를 거두면서 좌파포퓰리스트라는 욕을 먹으면서 토론공화국을 만들어 이 모든 유치한 대립의 기반을 파헤치려 했다.

 

그러나 언론도, 국민도 자신의 편리한 사고방식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익숙한 상징에 대한 해석법이 그대로 이어지길 원했다. 왜냐면 그것은 학습이라는 원치 않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학습된 방식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학습의 점유권을 내놓지 않았다. 부르디외는 전문가주의의 폐해 중 하나가 '용어에 대한 독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쉽게 말해 서울시장이 많이 팔아먹는 '생태주의', '거버넌스'같은 용어들이 관련 단체나 기업에 대한 서울시 예산 배분으로 귀결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용어를 통한 권력 독점은 지식인의 방식으로서 이는 소통과 교육보다는 그 용어를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 간의 식별표시, 지식 권력의 불평등한 배분에 이바지한다.

 

긴 얘기 마무리한다. 정치에서 엄마/그외다수를 구분하는 생존형 식별표시의 수준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런 습관은 자주 스스로의 요구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돌아온다. 정치인과 언론과 지식인이 어떤 상징에 의존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상징은 현란한 탈바꿈을 계속하지만 정치적 영역에서는 대개 일정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중딩 언플(언론플레이)에서 출발한 그들의 수사가 설정된 중딩 관객의 입맛에 봉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