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사회

최다 독립운동가 배출한 안중근 가문

pulmaemi 2009. 2. 21. 08:35

최다 독립운동가 배출한 안중근 가문
(블로그 '보림재' / 정운현 / 2009-02-19)

 

▲ 김삼웅 저 <안중근평전>

며칠 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집으로 책을 한 권 보내고 싶으니 집 주소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안중근평전>이라고 했다. 김 전 관장은 지난해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안중근 평전’을 장기간 연재하였는데, 이번에 이를 단행본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김 전 관장은 지난 2004년 8월 <백범 김구 평전>을 시작으로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등 애국선열들의 평전을 잇달아 펴내고 있다. 은퇴 후 서울 근교의 덕소에 자리를 잡은 그는 근현대 역사인물 집필 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한편, 김 전 관장이 펴낸 <안중근평전> 후반부에 백범과 안중근 가문과의 인연, 또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진영과 인연을 맺고 활동한 안 의사의 형제, 조카들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김 전 관장에 따르면, 백범과 안중근 가문이 더욱 가까워진 계기는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이며, 안 의사 가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사는 무려 4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이 적지 않지만 숫자만으로 볼 때는 안중근 가문이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해방 후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영광’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겪어야 했다.

▲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 선생과 동생 정근(왼쪽), 공근

이 집안의 독립운동가 면면을 살펴보자. 먼저 안 의사의 형제들인 ‘근(根)’ 자 항렬부터 보면, 친동생들인 정근(定根), 공근(恭根)과 사촌형제인 명근(明根), 경근(敬根)을 꼽을 수 있다. 이어 조카들인 ‘생(生)’자 항렬로 내려가면, 춘생(椿生), 원생(原生), 진생(珍生), 미생(美生), 우생(偶生), 낙생(樂生), 민생(民生)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도 이 대열에 동참한 인물이다. 이들 가운데 명근은 1910년 12월 황해도 선천역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가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몇 차례 감형되어 15년 동안 복역하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27년 중국 길림성에서 병사하였다.


안 의사의 친동생 정근, 공근의 항일투쟁

 

안 의사의 형제들 가운데 백범과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은 친동생 정근과 공근이었고, 두 사람 가운데는 공근이었다. 안 의사 의거 후 정근, 공근 두 형제는 형의 유지를 받들고 유족을 돌보기 위해 연해주로 떠났다. 안 의사의 아내 김아려 여사를 포함, 일족은 모두 8명이었다. 정근은 가족들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니콜리스크에서 상점을 열었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던 동생 공근은 나중에 정근의 가게 일을 돕기도 했다.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정근은 1915년 8월 러시아 국민병으로 종군하게 되고, 공근은 은신하면서 벼농사에 성공해 200석가량의 쌀을 수확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 결과 1918년 1월 노령(露領)에서 한인사회당이 결성되자 정근은 여기에 가입하였고, 공근은 1918년 6월 니콜리스크에서 결성한 한인 비밀회합에 참여하는 등 두 형제가 모두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들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1919년 3.1만세의거 후 그 해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였다. 이에 앞서 1918년 11월경 상해로 건너갔던 정근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즉시 참여하였다. 이후 정근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11월 길림에서 조소앙이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또 1922년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한-중 양국 간의 친선과 대일항쟁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선전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또 이해 5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국회)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23년 10월 교민단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임시정부와 관련을 맺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정근은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49년 3월 상해에서 타계하였다.

▲ 백범과 안공근의 '협력시대'. 앞줄 가운데가 백범이며, 뒷줄 왼쪽 네 번째가 안공근.

한편, 니콜리스크에 남아 있다가 1920년 5월 상해로 건너온 공근은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 안창호의 발탁으로 임정 최초의 러시아 대사 겸 외무차장에 임명되었다. 안창호는 그가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 사정에 밝은 것을 높이 사 발탁을 한 셈이다. 실지로 공근은 1922년에는 모스크바로 건너가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모친과 큰형 안 의사 가족의 생계까지 떠맡아 구미 공사관에서 통역과 정탐원 노릇을 하며 생활을 꾸렸다. 1926년에는 상해한인교민단 단장이 돼 한인들의 인권보호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공근이 백범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30년 1월 백범, 안창호 등 민족주의자 228명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깊이 관여하였으며, 이듬해 11월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만들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 증언에 따르면, 한인애국단 본부는 공근의 집에 설치되었으며,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이 여기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한 예로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의 선서식이 공근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공근의 차남 낙생의 집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공근의 집은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 있었는데, 이곳은 단원들의 비밀아지트 겸 연락처로 활용되었다. 당시 공근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한인애국단의 실질적인 운영자나 마찬가지였다.


백범-안공근의 갈등, 그리고 안공근의 실종

 

한편, 1937년 7월경 공근이 독립운동 무대에서 돌연 퇴장하였는데, 그 원인은 백범의 신임을 잃게 되면서부터였다. 공근이 백범의 신뢰를 상실한 배경을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우선 중국정부로부터의 독립자금 창구역할을 해온 공근이 자금 사용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과 중일전쟁 발발 후 큰형인 안 의사의 가족들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해오자 백범은 당시 상해에 남아 있던 안 의사 가족과 공근의 가족을 구출해 오도록 공근을 상해에 파견하였으나, 공근은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나왔다. 이에 백범이 크게 노하였다. <백범일지>의 관련 대목을 보면,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여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공근은 자기의 가속(家屬)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하지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 해방 후 경교장에서. 오른쪽부터 김구의 비서였던 안우생, 백범, 백범의 며느리 안미생, 장우식

한편, 백범과 ‘갈등’을 빚어오던 공근이 1939년 5월 30일 돌연 ‘실종’되었다. 안 의사 순국 이후 안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던 공근의 실종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독립운동 단체 내부의 분파투쟁에서 희생되었다는 주장, 또 하나는 일제 밀정이 암살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독립운동가 정화암은 “안공근이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중국정부에서 거금을 받아 멋대로 낭비해 백범이 공근을 질책한 후 두 사람이 소원해졌다. 그 후 공근이 장개석 정부의 정보기관과 손잡고 백범을 제거하려 하자 백범이 이를 알고 공근을 중국정부와의 교섭업무에서 배제시켰는데, 그 뒤 공근의 소식이 두절되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김삼웅은 <안중근평전>에서 “두 가문의 관계로 볼 때 설혹 안공근이 ‘일탈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제거’까지 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고 썼다.


해방 후 불우한 삶을 산 안 의사 가문의 후예들

 

안 의사의 형제 항렬 가운데 사촌 동생 경근(敬根)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환국 후 백범을 곁에서 보좌하던 그는 1948년 백범의 밀서를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과 김두봉을 만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 반(反)이승만 대열에 서서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경근은 5.16군사정권 시절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타계했다. 이 집안에서 경근과 비슷한 역경의 삶을 산 사람은 또 있다. 안 의사의 5촌 조카인 민생(民生) 역시 해방 후 평화통일운동과 교원노조운동을 하다가 5·16 이후 반국가사범으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상해에서 한국청년전위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92년 사망했다. 그는 평양 통일열사릉에 묻혔다.

 

안중근 가문의 후손들은 해방 후 빛을 보기는커녕 탄압을 받거나 해외로 흩어져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해방 후 그나마 이름 석 자를 낸 사람은 춘생(椿生) 정도다. 1912년생인 춘생은 안 의사의 당질(5촌 조카)로, 1917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후 일제의 만주침략이 격화되자 남경으로 건너가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1936년 졸업과 함께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하였으며, 이후 중국군에 배속돼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40년부터는 광복군에 편입돼 사병훈련과 정보수집 등을 담당하였으며, 1942년 4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육사 제8기로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제8사단 사단장, 국방부 차관보 등을 역임한 뒤 196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국회의원, 광복회장, 초대 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국민훈장 동백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 안춘생의 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장(좌), 육사 교장 시절의 안춘생(우)


※ 원문 -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37260

 

ⓒ 정운현/seopri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