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훈련은 북에서 급변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에 대비한 한국군과 미국군의 북한 장악 계획인 작전계획 5029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작전계획 5029가 규정하는 북의 급변 사태는 내전, 쿠데타, 반군의 대량살상무기 해외 반출 판매, 대량 난민 발생, 천재지변, (개성 공단 등에 근무하는) 한국인의 인질화다. 가령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군이 아이티로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아이티로 진주했던 것처럼 북에서 대홍수라도 나면 한미 연합군이 북으로 밀고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만약에 북이 중국과 손잡고 남쪽에서 급변 사태가 발생했을 때에 대비하여 수시로 군사 훈련을 벌인다고 가정해보자. 가령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처럼 정권을 위협하는 국민 저항이 벌어졌을 때, 한강과 낙동강이 범람하는 대홍수가 벌어졌을 때, 5.16이나 12.11 같은 군사 정변이 일어났을 때 북중 연합군이 밀고 들어와서 남쪽을 점령하는 군사 연습을 해마다 몇 차례씩 벌이면서 접경 지역에서 수천수만 발의 포탄을 쏘아댄다고 가정해보자. 한국 국민은 극도의 분노와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북중 군사 훈련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 경제는 마비될 것이다. 그러나 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러시아나 중국과 합동 군사 훈련을 벌인 적이 없다. 북의 군대를 ‘괴뢰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괴뢰’라는 말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괴뢰’는 그냥 싫은 대상에다 갖다 붙이면 그만인 무의미한 욕설이 아니다. ‘괴뢰’는 영어로는 puppet이라고 한다. 꼭두각시, 허수아비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쟁이 나도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결정할 권한조차 없는 자국 군대의 처지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노무현 대통령의 전시작전권 환수 추진에 결사반대한 한국 군대의 고위 장성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같이하던 시절에도 이웃 중국이나 러시아와 한 번도 합동 군사 훈련을 한 적이 없는 나라를 설마 ‘괴뢰’국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리라. 미국은 작전개념 상태에 머물렀던 5029를 작전계획으로 바꾸어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작전으로 완성시키자고 참여정부에 압력을 넣었지만 참여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주한 미군의 존재 이유는 한국 방어에 있고 북한 내부의 급변 사태와는 무관하며 북한의 급변 사태는 북한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작전계획 5029에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급변 사태라는 것은 규정하기 나름이다. 전시군사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북의 핵시설을 장악하기 위해 모종의 구실을 만들어 북을 공격할 경우 한국군은 동족에게 총부리를 대는 분쟁에 말려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은 작전개념 5029를 작전계획 5029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 3월의 키리졸브 훈련, 7월의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까지 동원한 불굴의의지 훈련, 8월의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9월의 반잠 군사 훈련, 이번의 호국훈련까지 규모가 큰 군사훈련만도 다섯 번이나 벌였다. 당연히 남북 긴장은 고조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연평도 포격이 일어났다.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12-06)
북의 연평도 포격을 보도하는 서방 언론의 논조는 천안함 침몰에 이어 북의 호전적 도발에 남쪽이 또다시 피해를 입었다는 동정론이 지배적이었다. 북의 포격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한국군과 미국군이 호국훈련이라는 연합 훈련을 벌이면서 3600발이 넘는 포탄을 쏘았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간 서방 언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 지난 7월 동해에서 열린 한미연합훈련(불굴의 의지)에서 미국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9만7천t급)와 한미 함정들이 대열을 형성, 기동하고 있는 모습
핵우산은 없다
이 정권은 천안함 침몰을 북에다 뒤집어씌우면서 다시 도발을 감행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바다가 아닌 땅에서 300발의 포탄을 맞고도 겨우 몇십 발 포탄을 쏘면서 반격을 하는 둥 마는 둥하고는 입으로만 북한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접을 떨었다. 왜 반격을 제대로 못 했을까? 전시작전권을 가진 미국이 반격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쌓자는 북의 요구를 거부해온 미국은 북과 한판 대결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북이 정말로 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떠보려고 연평도 해상에서 대대적으로 군사 훈련을 벌였다. 그리고 북이 정말로 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아무리 섬이라지만 바다가 아닌 육지로 포를 쏜다는 것은 정 그렇다면 한번 붙어보자는 의사의 표현이다.
미국은 확전이 두려워서 물러섰다. 핵무기 보유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상대 핵무기 보유국의 결사 항전 의지다. 미국과 소련이 맞선 냉전시대가 역설적으로 조용했던 것은 미국도 소련도 상대방의 핵무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핵우산은 없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옛말이 있다. 북이 독한 마음을 먹고 미국에 대해 핵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한 개입하지 말라고 밀어붙일 경우 미국이 과연 한국을 지켜줄까? 지켜주리라고 굳게 믿는 사람은 차라리 가스통에 매달리는 게 나을 것이다. 자기는 자기 힘으로 지키는 수밖에 없다.
미국은 정면 승부로는 러시아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끝없는 군비 증강 경쟁으로 러시아가 국민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으로 자원을 배분하지 못하고 군수산업에 매달리게 만들어서 러시아 국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누적시키는 전략으로 러시아를 공략했고 그 전략은 보기 좋게 먹혀들었다. 그리고 북에도 그런 전략을 들이밀고 있다. 한미 군사 연합 훈련을 벌이면 북은 생산 활동을 중단하고 온 나라가 비상에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북을 흔들면서 북이 경제 발전에 전념할 수 없게 흔들려는 것이 미국의 시간 끌기 전략이다.
그러나 북은 러시아와 다르다. 방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는 갈등 관계에 있는 제국 안의 소수 민족 집단에 핵무기가 들어가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국처럼 핵무기 확산을 두려워하므로 아무리 미국과 사이가 안 좋아도 미국의 적대국에 핵무기를 공급할 가능성은 없지만, 북은 제국주의의 업보가 없으므로 행보가 자유롭다. 첨단 무기를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나 제공할 수 있다.
▲ 발사 중인 최대 사거리 350km ~ 1500km의 Shahab 미사일 |
실제로 최근 들어 이란이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에 잇따라 성공하고 한국은 몇 번이나 그것도 남의 나라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도 실패한 인공위성 발사에 단번에 성공한 것도 북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미국도 러시아도 북이 첨단 군사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애써 부정한다.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리는 약소국들의 관심이 북의 저렴한 첨단 무기에 쏠릴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미국은 이란이 북으로부터 19기의 첨단 미사일을 중국을 경유해 수입했다면서 중국 정부에 이것을 막아달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키리크스는 또 이스라엘과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란 주변의 왕정 국가들까지도 이란의 핵시설을 폭격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공격했을 경우 이란의 보복이 어떤 수준으로 이루어질지를 가늠할 수가 없어 공격에 나서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란이 최근 들어 잇따라 미사일과 인공위성 발사 실험을 한 것을 서방 언론에서는 도발로 받아들였지만, 이란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이런 보복력을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우리를 공격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자위 차원의 경고였던 셈이다. 그 경고는 먹혀들어가서 이스라엘은 감히 이란을 공격하지 못했다.
적어도 중동에서 또 다른 전쟁을 막은 것은 이란의 군사력이었고 그 군사력의 배후에는 북의 무력이 있었다. 북의 무력이 신경쓰이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은 3차대전의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란을 공격했을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한 이슬람 공화국 이란은 이스라엘에는 재앙이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막고, 어쩌면 3차대전을 막은 것은 이란과 북의 무력이었다. 이란과 북은 팔레스타인처럼 힘없는 민족을 끝없이 괴롭히는 이스라엘 같은 나라에만 악의 축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어 보이니까 얼마 전부터는 공작원을 이란으로 침투시켜 이란의 핵물리학자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돌아섰다. 올해 들어 벌써 3명의 이란 핵과학자가 출근길에 폭사 당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악의 축은 정말로 있다.
케네디가 두려워한 것
1961년 1월 17일 고별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산복합체가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항시적으로 운용되는 군수산업을 갖지 않았고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민수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전환해왔지만 이제는 항구적 군수산업을 육성하면서 수백만 명이 고용되면서 그 자체가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지적이었다. 아이젠하워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존 에프 케네디는 3년이 채 못 되는 재직 기간 동안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군부와 CIA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 카스트로와 케네디 그리고 피그만 계획을 주도한 CIA 간부 하워드 헌트 |
1961년 4월 2천 명의 망명 쿠바인을 앞세워 쿠바를 침공한 피그만 사건도 이미 전임 대통령 당시 결정이 된 사안이라 케네디는 작전을 마지못해 재가했지만 미국 군대의 지원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합참의장은 50km 이내로 쿠바 해안선에 접근하지 말라는 케네디의 지시를 비웃으면서 쿠바 본토로 항공모함을 바짝 밀어붙였다. 미국 군부는 어차피 민간인만으로는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일단 사건이 벌어지면 군대를 어떻게든 투입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작전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의 완강한 미군 투입 거부로 피그만 침공은 참패로 끝났다. 군부는 케네디에게 이를 갈았다.
미국 군부는 이듬해인 1962년에도 쿠바 침공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렘니처 합참의장은 이번에는 민간인을 끌어들이지 말고 아예 공개 비공개 작전을 모두 미군이 주도하기로 하고 군사 훈련을 벌이는 척하다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바로 침공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쿠바 군복을 입힌 쿠바인을 앞세워서 미군의 관타나모 기지를 침공하는 것처럼 꾸미는 방안, 미군 기지 안의 무기고를 일부러 폭파시키는 방안, 미군 희생자가 나온 것처럼 꾸며서 가짜 장례식을 벌이는 방안이 거론되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쿠바 정부의 소행으로 몰아간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시민들이 다니는 마이애미 거리를 폭파시키거나 도미니카, 과테말라, 니카라과 같은 이웃 나라를 공격하고 쿠바 공산 체제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운다는 안도 거론되었다. 관타나모 앞바다의 미군 함정을 폭파시키거나 미국 군용기를 쿠바 비행기가 파괴한 것처럼 꾸미는 방안도 검토되었고 심지어 미국 민항기를 납치하거나 미국 대학생들이 탄 미국 비행기를 쿠바 상공에서 폭파시키고 쿠바에 책임을 물어 쿠바를 침공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렘니처 합참의장은 이 노스우즈 작전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렘니처를 유럽의 나토 총사령부로 보냈다.
미국의 잇따른 침공 위협에 불안을 느낀 쿠바가 소련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요청하면서 불거진 미사일 위기 때도 케네디는 해안 봉쇄를 하여 기지 건설에 필요한 물자의 반입을 막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미국 군부는 쿠바를 침공해야 하며 소련이 개입할 조짐을 보이면 소련에도 선제 핵 공격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네디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장성들이 엉뚱한 마음을 먹지 않게 잘 단속하라고 신신당부했다. CIA는 미군의 침공을 예상하고 쿠바에 요원들을 대거 침투시켰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케네디 대통령은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참모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에게 만약 대치가 계속되면 강경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형을 밀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하면서 미사일 기지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소련도 온건파인 대통령과 강경파인 군부의 대립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앞으로 두 번 다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사일 기지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서도 승패와는 상관없이 미군을 철수시킬 참이었다. 1964년 말 재선에 성공하면 1965년부터는 아무리 욕을 얻어먹고 빨갱이로 몰리더라도 전쟁을 끝낼 참이었다. 그러나 케네디의 종전 방침은 언론으로 새어나갔고 뉴욕타임스에 보도가 나간 다음 날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왈드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40분 뒤 경찰관을 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오스왈드는 두 범행을 모두 부인했다. 그리고 이틀 뒤 호송 도중 잭 루비라는 나이트클럽 소유자에게 살해당했다. 루비는 나중에 경찰과 마피아와 두루 선이 닿은 인물로 밝혀졌다.
케네디가 암살당했다는 결정적 증언은 전직 CIA 요원으로부터 나왔다. 과테말라 정부를 무너뜨리고 반카스트로 공작을 주도한 전직 CIA 핵심 요원 하워드 헌트는 2007년 임종을 앞두고 아들 앞에서 케네디 암살을 CIA와 린든 존슨 당시 부통령이 주도했고 자기도 관여했다고 털어놓았다. 린든 존슨은 군부와 절친했다. 군부는 베트남전쟁 전황 보고도 린든 존슨에게만 제대로 알렸다. 린든 존슨은 대통령직을 승계하자마자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을 백팔십도 뒤집고 전쟁을 북부베트남까지 확대하면서 증원군을 대거 증파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6월 유명한 평화 연설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미국의 전쟁 무기로 팍스아메리카나를 세계에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무덤의 평화나 노예의 안전도 아니고 진정한 평화, 지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게끔 만드는 그런 평화, 사람들과 나라들이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줄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는 평화, 단순히 미국을 위한 평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 단순히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만대를 위한 평화”라고 말했다. 케네디는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을 전쟁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그런 대통령은 생존 가치가 없었다.
작전계획 5029의 가장 큰 목적은 북의 핵무기를 장악하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위험한 세력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그러나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자국 군부의 강경파들이 핵전쟁이라는 불장난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평화를 염원하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 케네디와 말이 통한 것은 군산복합체의 이익만을 대변하던 미국 군부의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수호 집단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타도하려는 세력이라고 군산복합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언론이 매도해온 인민민주주의자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를 실전에 쓴 적이 있는 군대, 자국 대통령한테조차도 핵 통제력을 불신받았던 군대가 타국의 대량살상무기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타국의 대량살상무기를 장악하여 안심하고 타국을 상대로 대량살상무기를 써먹기 위해서다.
북의 포격으로 연평도에서 여러 사람이 죽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지만 불행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것은 화해와 공생을 위해 서해의 공동어로 구역 설정 등 남과 북 사이에서 이루어진 6.15 합의와 10.4 합의를 짓밟고 전시작전권도 없고 막상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무런 자위력과 보복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미국의 눈치만 봐야 하는 본인의 처지도 못 헤아리고 미국의 장단에 맞추어 말로만 강공책을 일삼아온 이 정권이다. 이 정권은 평화를 지킬 힘도 없고 전쟁을 치를 힘도 없는 호구 정권이다. 훗날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을 막론하고 후손이 함께 밟아야 할 동족의 땅을 타국인 중국에 떼어주고라도 동족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막장 정권이다. 구제불능의 쓰레기 집단이다.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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