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사회

‘일본은 없다’ 당사자 유재순, 승소후 직접 밝힌 심경!

pulmaemi 2010. 1. 15. 17:06

(서프라이즈 / 제이피뉴스 / 2010-1-15 11:49)



‘일본은 없다’ 항소심을 끝내고 나서
전여옥과 만난 후, 19년간 묵혀두었던 이야기를 풀다

(제이피뉴스 / 유재순 / 2010-01-15)


그제 13일 아침, ‘일본은 없다’ 재판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당연한 결과지만 1심에 이어 2심도 승소했다.

 

판결결과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5년 반 동안의 재판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분노, 억울함, 재판, 불면증, 신경쇠약 등등. 그래도 용케 견뎌왔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래서 담담하게 그동안의 재판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거짓말 1. 첫 만남

 

90년대 초였던가. 당시 나는 도쿄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편과 함께 한국주간지 특파원으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때 중앙일보 문화부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KBS 기자로 있는 후배가 도쿄특파원으로 가니 사람도 좀 소개시켜주고 돌봐주라.’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기꺼이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는 친구의 부탁대로 한 아름 꽃을 사들고 NHK 방송국 안에 위치한 KBS 도쿄지국을 찾아가 전여옥을 만났다. 물론 당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날 저녁 NHK 국제국 스태프들과 함께 회식도 했다.
 
그 당시 나는 3년 단위로 NHK 국제국 라디오 한국어 방송과 계약을 체결하여 매주 토요일마다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KBS에 들러 잠깐 전여옥을 만난 것이었다. 또한, 방송이 끝난 후 회식을 할 때 국제국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얻어 전여옥까지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때의 상황을 전여옥은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앞 부문 생략…

원고(전여옥)가 일본에 간 지 한 2주 정도 지났을 때 유재순이 원고를 NHK 지국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당시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아울러 유재순에 대하여 호감도 갖게 되었습니다…. 중간부문 생략

그리고 일본에서 원고를 가끔은 써도 한국에서처럼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항소이유서 5쪽)

2004년, 내가 오마이뉴스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여옥은 거짓말의 천재다.’라고.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거짓말의 천재였다. 그것도 얼굴색깔 하나 변하지 않고 아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잘했다.

 

전여옥은 항소이유서에서 위의 인용문장에서처럼, 나를 아주 빈한한 유학생 마누라로, 그리고 일거리가 없는 여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일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라고 큰 아량을 베푼 것처럼 묘사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100% 거짓말이다.

나는 전여옥을 만나는 첫날부터 내 지인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고, 이 같은 관계는 그녀가 특파원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게다가 당시 나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80년대 중반 이후 몇 년은 매월 여성동아 원고를, 그 이후에는 우먼센스, 세계여성, 일요신문 등 시사주간지 원고를 번갈아 가며 쓰느라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아사히 신문사 계열의 시사주간지 <아사히저널(현재휴간)>, 아사히그라프 등에도 일본르포를 쓰면서 그 틈틈이 다른 일본 주간지나 월간지에 칼럼까지 썼다. 또한, 매월 두세 차례씩 JAL항공사, 시민단체 등에 강연을 다녔다.

 

일본에서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6년에 내 르포집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81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의 생활(혹은 르포)을 기록한 나의 원고가 ‘신동아 논픽션’에 당선되면서, 이후 나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수년간 ‘여성동아’ 에 매월 10여 페이지 정도의 사회 저소득층에 대한 심층르포를 썼다. 또한, 주간지 ‘스포츠동아’에는 내 룸메이트였던 미국 여성 메리의 도움을 받아 3년에 걸쳐 취재한 이태원 르포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본언론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1년에 두세 차례씩 강연요청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한국주재 일본 특파원들이 나에 대한 기사를 꽤 여러 번 쓴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일관계가 이슈가 될 때마다 어김없이 일본에서 강연, 혹은 대담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87년 중반에 일본에 유학을 왔을 때는, 자주 일본을 왔다갔다해서인지 일본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덕분에 취재를 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동안 닦아놓은 인맥만으로도 취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의 인맥을 풀가동하여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우노 수상 등 웬만한 역대 수상을 차례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나에게 전여옥은 ‘그래도 여성은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쓰라’며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말을 할 게재가 못됐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인맥을 그녀에게 소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에 재직하고 있던 내 친구가 자신의 후배라며 전여옥을 소개시켜 준 이유도 바로 내 인맥을 소개받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녀는 사실과 반대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의적으로 꽃을 사들고 간 사람에 대해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라고 마치 내가 대단히 가난한 유학생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묘사’를 했다.

 

아마도 전여옥은 한국사회의 ‘프리랜서’에 대한 인식이 희박함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하려 한 것 같은데, 솔직히 이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촌평은 재판 내용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도 항소이유서 상당 부분을 나에 대한 인신공격, 그것도 대부분 인간적으로 비하하는 듯한 내용을 작문으로 지어 기술했다.

 

1987-94년 말까지 유학하는 동안 우리 집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기 이전이어서 일본거주 한국유학생이나 일본에 오는 여행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만큼 유학생들은 외로움을 많이 탔고, 또 여행자들은 여행자들대로 언어불편이나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는 곳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한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우리 가족끼리 잠을 자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 집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손님 중에는 국회의원, 연예인, 샐러리맨도 있었고 나중에는 돈 떨어진 여행객이 유학생의 소개로 재워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아파트는 105,106호 두 개를 빌려서 살았고, 손님이 많은 만큼 대형 냉장고 두 대가 풀가동됐다.

 

이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 큰오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 그 당시 제법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던 큰오빠는 형제 우애가 대단히 강했다. 그래서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남편을 도쿄지사장으로 발령을 내고, 그 월급과 3개월마다 지급되는 보너스를 고스란히 우리 생활비로 쓰게 했다. 거기에 나의 원고료, 강연료 수입이 더 있었다.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대부분의 유학생들에 비해 우리 가족의 생활은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런 연유로 유학기간 동안 3년에 걸쳐, 매년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 7-8명을 초청하여 민단 조총련에 관계없이 재일동포들의 애환과 실상을 듣고 토론하는 심포지엄을 내 개인적으로 주최하기도 했다.

 

이때 의원들의 초청경비 및 진행에 드는 비용은 대략 300-500만엔 정도. 그 부담은 모두 내가 원고료, 강연료로 충당했다. 다만, 진행에 있어 자원봉사 형식으로 유학생들의 힘을 빌렸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아랫지방 규슈에서부터 북의 홋카이도까지 재일동포들은 자신들에 대한 기록을 한 아름 안고 도쿄 심포지엄 장소로 달려오곤 했다. 그때 매년 재일동포들을 위해 행사장에 나와 무료로 법리적 해석을 해주신 분이 바로 재일동포 변호사 1호 고 김경득 씨였다.

 

이런 나를 가리켜 전여옥은 자신이 도와주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 매우 남루한 차림으로서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원고는 유재순의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들었고 그 차림도 허름한데 원고를 위해 꽃을 사온 데 대하여 놀랐으며…’ 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전여옥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표현을 한 이유는, 도작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상황적으로 우위에 서기 위함이다. 내가 일이 없어 수입이 없고, 그래서 빈한하게 생활한다는 것을 나타내, 그런 나를 동정해서 격려하고 도와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항소이유서 또 다른 페이지에서 형편이 매우 어려운 나를 동정해서 많이 도와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도움을 준 것은 전여옥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여옥에게 내 일본인 인맥과 재일동포들을 소개시켜 주고, 그리고 집에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했다. 반대로 내가 전여옥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에 돌아가서는 거꾸로 내게 자신의 인맥을 소개시켜 주고 도움을 준 것처럼 진실을 호도했다.

…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항상 원고를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했고 글을 계속 쓰라고 격려했고 원고가 귀국할 때는 원고의 가재도구도 소파며 세탁기, 냉장고 등 살림이 어렵다 해서 다 주고 왔을 정도였습니다…

항소이유서 9쪽

만약 나를 모르고 우리 집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전여옥의 이 같은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주로 상대방을 사주는 쪽이었지 얻어먹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나를 아는 기자들이나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다.

또한, 전여옥이 대부분 나를 찾아왔지 내가 찾아간 적은, 그녀의 특파원 생활 동안 세 손가락 안에 손꼽을 정도다. 내가 취재원 혹은 일본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늘 전여옥을 불렀고, 그러면 선약이 있지 않은 한 그녀는 그 장소가 우리 집이 됐든 도쿄시내이든 간에 어디든지 달려왔다.

 

식사비? 몇 번 얻어먹은 적은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베푸는’ 차원의 대접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특파원 생활을 끝내고 귀국할 때 자신이 쓰던 물건을 다 내게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물건들은 내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유학생들에게 나눠 준 것이다. 물론 그녀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도 항소이유서에는 마치 나를 도와주기 위해 그 물건을 준 것처럼 이 역시 호도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주재원이나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대개 사용하던 물건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간다. 일본에서는 버리는 것도 돈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전기 제품은 버리는 데도 한 개에 최소 5천엔 이상을 줘야 가져간다.

 

때문에 귀국하는 사람은 이삿짐을 싸기 전 필요한 사람을 알아보고 이사하는 날 나누어주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우리 집에 있는 낡은 피아노는 다섯 집을 거쳐 내 딸아이 것이 되었고, 작년 여름에는 귀국하는 주재원의 냉장고가 우리 집 냉장고보다 새것이어서 기꺼이 물려받았다. 대신 우리 집 냉장고는 구청을 통해 5천 엔을 주고 가져가게 했다.

 

나는 평소 내 주변의 주재원 중에 귀국하는 사람이 있으면, 쓸만한 물건이 있나 물어보고 있으면 그 물건들을 받아 놓았다가 나중에 필요한 유학생들에게 나누어 준다. 전여옥에게 받은 물건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필요한 유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가전제품을 다 주고 귀국했다'라고 항소이유서에 뻔뻔하게 기술해 놓았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그 물건들이 탐난다고 해도 우리 집에 들여놓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이미 두 채의 아파트에는 내 책과 문학전공인 남편의 책으로 빈 공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형냉장고 두 대가 방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어서 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사정을 잘 모르는 재판부의 약점을 이용해, 유학생들을 위한 선의의 내 행동을 항소이유서에서는 사실을 100% 왜곡해서 기술했다.

 

결정적인 왜곡 또 하나. 그녀가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에게서 20만 엔을 꾸어갔다. 이유는 결혼할 준비로 보석을 사야 하는데 돈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꺼이 꾸어줬다(나중에 서울에 가서 받음).

 

만약 내가 그녀가 표현하는 대로 그렇게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면 한 번에 20만 엔씩이나 하는 목돈을 흔쾌히 꾸어줄 수가 있었을까?

 

결국, 전여옥은 ‘사람 소개시켜 주고 먹여주고 재워 준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행위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뒤의 항소이유서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 전여옥의 항소 이유서 ©JP News/ 김현근


거짓말 2. 표절 소문

…유재순은 원고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하며 ‘일본은 없다’는 표절이라고 했습니다. 기자들도 원고에게 문의했습니다. 그래서 원고는 잘됐다 싶어 ‘그렇다면, 공동 기자회견을 하자. 그래서 가릴 것은 가리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동기자회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유재순 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었습니다(이점에 관하여는 당시 이를 주선하였던 레이디경향의 유인종 기자의 확인서를 제출한 바 있음).

나의 1차 일본생활은 87년 6월부터 94년 12월까지이고, 2차 생활은 99년 2월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생활한 기간은 95년 1월부터 99년 1월까지 4년간이다. 그리고 ‘일본은 없다’가 출판된 것은 93년이고.

 

아마도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바로 이 기간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한국에서의 생활 동안 전여옥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버젓이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화번호나 주소를 몰랐다면 그것 또한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95년 2월 내가 딸아이를 낳자 가장 먼저 달려온 친구가 바로 전여옥을 내게 소개시켜준 중앙일보의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전여옥과는 이화여대, 학보사 직계 선배였고, 두 사람 모두 언론계에서 일하기 때문에 자주 만나는 관계였다. 따라서 우리 집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자회견이 있는 줄도 몰랐을 수밖에.

 

더더구나 기가 막힌 것은 전여옥이 기자회견을 주최했다는 유인종이라는 잡지기자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1심에서는 그의 진술서도 제출했단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도 그 당시 여성동아, 우먼센스 편집장의 진술서를 받아 법정에 제출했다. 물론 기자회견에 대한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잡지의 경우, 어떤 기자회견이 있을 때는 편집장에게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은 다음에 취재를 가더라도 가야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여성동아, 우먼센스 편집장을 비롯하여 다른 매체 편집장들도 그런 보고나 사실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은 없다’에 대한 소문은 언론계나 출판계에 널리 퍼져 있는 상태여서, 기자회견이 있다면 일부러 찾아가서 취재를 해야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들은 적도, 연락을 받은 적도 없다고 당시 잡지편집장들은 한결같이 증언했다. 나는 당연히 이 증언을 기록한 진술서를 받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한, 2심 재판에 당시 우먼센스 편집장이 우리 측 증언자로 나와 그때의 잡지계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증언해 주었다.

 

또 하나 더 큰 결정적인 거짓말은 내가 유인종 기자와는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유인종 기자를 처음 본 것은 2심 재판 법정에서였다.

법정에서 우리 측 송호창 변호사가 유 기자에게 물었다.

 

“유재순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유재순 씨의 집 전화번호를 압니까?”

“모릅니다.”

“아니 유재순 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유재순 씨에게 기자회견을 한다고 연락을 했습니까?”

“후배가 했습니다.”

“그럼 그 후배이름은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 이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국회 청문회를 할 때 의원 나리들이 자신의 잘못을 에둘러 감추려 할 때마다 상습적으로 남발하는 말이다.

 

이러면 바로 상황 끝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삼척동자라도 잘 알 것이다. 고로 '공동기자회견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자 유재순 쪽에서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은 불필요하게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100%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온갖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울고불고하며 ‘일본은 없다’는 표절이라고 했습니다.”라고 기술했던 말도 100% 거짓말이다.

 

94년 12월 4일에 귀국한 나는 그때 임신 8개월이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전여옥 부부가 전화를 걸어와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부어대며 서울에 오면 죽여버린다고 협박을 해, 나는 한국에 귀국해서도 진짜 무서워 위해를 당할까 봐 아이를 낳을 때까지 만나는 사람 없이 조용히 지냈었다.

 

그때 전여옥뿐만 아니라 그 남편까지 나서서, ‘옆집 신발공장에서 똑같은 신발을 만들었기로서니 뭐가 잘못이냐. 우리에게는 돈과 힘이 있다’고 아주 당당하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다.

전여옥 부부가 번갈아 가며 8개월 된 임산부를 상대로 험한 말을 쏟아 부을 때, 우리들의 대화를 메모 혹은 머릿속에 메모리 형태로 기록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소 우리 집에 와서 자주 밥을 먹던 유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이 그렇게 기록했다는 것을 나중에 서울에 귀국한 후에야 알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집은 105,106호 아파트 두 채를 빌려서 살았다. 손님도 많고 책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전화를 양쪽 집에 연결해서 사용했다. 그 때문에 전화가 오면 양쪽 집에서 똑같이 받을 때가 자주 있었다.

 

이삿짐을 싸던 날, 전여옥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도 양쪽 집에서 수화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바로 이를 유학생들이 번갈아 가며 메모를 했고.

 

한국에 귀국해서 잠시 들른 유학생을 만났을 때, 그 유학생은 내게 서류 한 통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그 전화통화 내용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서류였다. 그것도 일본에서 공증까지 해서 말이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는 당시 그 유학생은 내게 말했다.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유학생들은 앉으면 전여옥 이야기인데 혹시 나중에 법정소송으로 갈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유학생들의 증언을 모아서 공증해서 갖고 온 거예요. 혹시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몰라서요. 그러니 잘 보관하고 계세요.”

 

그의 말대로 나는 10년이 지나서 법정에 섰다. 내 성격에 생각지도 못한 소송이었다. 그것도 피해를 당한 사람이 피고가 돼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 유학생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조차도 ‘전지모(전여옥을 지지하는 모임)’는 전여옥이 자신의 말이 녹음되는지도 모르고 마구 욕을 하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엉뚱하게 추켜세웠다.

 

아무튼, 95년 2월,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모유를 먹였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이후에는 집안의 우환으로 바깥 활동을 할 겨를이 없었다. 또 약 8년에 걸쳐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고는 친밀하게 지내는 기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물며 상황이 이러한 데 일일이 찾아다니며 울고불고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낯 간지러워서 좋은 이야기이든 나쁜 이야기이든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울며불며 언론사를 찾아다녔다? 내 성격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그런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전여옥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전여옥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그녀가 언론매체에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야기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자회견에 대해서도, 어떤 매체에는 내가 ‘기자회견장에 안 나오고 도망갔다.’라고 하고, 또 다른 매체에는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을 격려해 주었다.’라고 전혀 상반되는 말을 했다. 그리고 2심 항소이유서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취소했다고 또 다르게 기술했다.

 

‘기자회견장에 안 나오고 도망갔다.’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고 자신을 격려해 주었다.’

‘일방적으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각각 다른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전여옥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매체에 따라 장소에 따라 말이 달라졌다. 또 기자회견을 주최하고 나에게 연락을 했다는 유 기자도 나와는 법정에서 만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초면의 사람이었다.

 

 

어쨌든 이 모든 거짓말이 매스컴을 상대로 한 ‘언론플레이’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다.

▲ '일본은 없다.' 표절공방, 19년 만에 풀어놓는 이야기 ©JP News/ 김현근


거짓말 3. 사실 호도

전여옥의 특징과 장기는 자신의 허물을 역으로 남의 허물로 뒤집어씌우는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 원고가 ‘일본은 없다’를 낸 지 한 2-3년 뒤 유재순은 ‘하품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에는 서문부터 원고에 대한 악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에 원고는 참을 수 없어 아는 출판사에 ‘이젠 법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뒤 며칠 뒤 유재순이 책을 거두어 들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재순의 이야기로는 ‘자신이 쓴 책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라고 밝혔지만 원고 생각에는 소송을 할까 봐 겁이 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 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먼저 ‘하품의 일본인’이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하품의 일본인’은 일본에서 먼저 낸 책이다. 아니 원래는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이름으로 나왔어야 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 반 이상을 전여옥이 가져갔다. 대화내용, 취재수첩메모, 초고 등 가져가는 방법도 다양했다.

 

물론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올 때까지 나에게 단 한마디도 책을 쓴다는, 준비한다는 이야기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책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서울에서 전화를 걸어온 기자 친구를 통해서였다.

 

“야, 근데 니 책 내용이 왜 그 애 책에 다 나오니?”

그때서야 내가 철저하게 전여옥한테 당한 것을 알았다.

나는 전여옥을 만나기 전부터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일본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밝혔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일본기자들이나 내 독자들은 내가 어떤 류의 책을 준비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자료나 취재원이 있을 때는 그들은 협력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런 만큼 나는 친구로 지내고 있는 전여옥한테도 당연히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에 관계된 초고는 물론 취재현장으로부터 곧바로 그녀를 만날 때는 취재수첩을 보여줘 가며 현장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이런 나에 대해 '보여준 사람이 바보가 아닌가'라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다. 전적으로 수긍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우선 전여옥은 입으로 말하는 방송기자였고, 나는 철저한 현장취재를 통해 글로 쓰는 르포라이터였기 때문에, 그녀가 내 것을 가져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보여주고 빌려주고 때로는 취재현장 정보가 필요할 때는 팩스로 보내 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가 출판될 때까지 지나가는 말로라도 내게 언급한 적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내가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의 내용 반 이상이 ‘일본은 없다’에 옮겨간 사실을 안 후 난 지독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목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즉 목이 마비된 것이었다.

 

아마 그날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 일찍 그 당시 NHK 라디오 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마츠이 히로코 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래서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 앞에 있는 ‘나카무라야’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듯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재순 씨 억울해서 어떡해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만 유재순 씨는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작가잖아요. 세상에 이럴 수가 없어요. 전여옥 씨는 내가 친하게 지내서 잘 아는데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너무 마시고 놀기만 했어요(飲みすぎだった、遊びすぎだった).”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사실은 그날 아침 나와 만나기 전에 전여옥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전여옥이 자신에게 ‘일본은 없다’를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는데, 양심상 도저히 번역할 수가 없어서 거절하는 편지를 부치고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했다.

 

그날 마츠이 씨는 내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을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도작당한 내 입장에서 먼저 분노를 터트려주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그 진실을 알고 있으니 너무 상심 말라’는 따뜻한 위로까지 해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철저하게 전여옥에게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노스러워 혼자 꺼억꺼억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앉았다 일어서려고 보니 갑자기 목이 부서지도록 아팠다. 갑자기 앉지도 일어서지도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날부터 난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닐 때는 목에 깁스 띠를 두르고 로봇처럼 시선을 한 곳에만 고정시키고 걸어다녀야 했다.

 

그때 나는 인간의 머리가 그렇게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 한 인간의 분노가 그렇게 한순간에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바보로 만든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한 달 가까이 누워지냈고, 그 이후부터는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일 정도로 머리가 무겁고 통증이 심해 몇 분도 채 안 돼 자리에 도로 누워야 했다. 모든 것이 지옥이었다. 전여옥의 전자만 생각해도 목의 통증은 더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불면증까지 겹쳐 이중의 고초를 겪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많은 유학생들이 돌아가며 나를 돌봐주었다는 것이다. 번갈아가며 반찬을 해왔고, 내 속옷은 유학생 부인들이 빨아주었다.

 

그렇게 약 3개월간을 고생했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전여옥 이야기나 ‘일본은 없다’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어가 되었다. 서울 시집에서는 몸조리하라고 두 재의 한약을 지어서 보내 주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 한약 두 재를 먹고 현재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번째 아이를 가지려고 온갖 노력을 했지만 30대 후반에다 너무 바빠서인지 도대체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집에서 보내준 보약 두 재를 먹고 나니 몇 개월 후 덜컥 임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들 녀석과 딸애의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나 된다.

 

아무튼, 임신이 된 사실을 알고서 많이 안정이 되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최면을 걸었기 때문이다.

 

임신 5-6개월이 되었을 즈음, 소문을 듣고 평소 친하게 지냈던 일본출판사 사장인 다카기 씨가 찾아왔다. 도작당한 사실과 ‘일본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 대한 미련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른 책을 한번 내보자는 권유를 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하품의 일본인’이다. 책 제목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제목 역시 다카기 사장이 서점을 돌며 앙케트 조사를 한 끝에 직접 지은 것이었다. 그의 지론은 이 세상에 상품(上品-품격있는)의 인간이 없다는 것.

 

▲ 하품의 일본인, 일본은 없다 ©JP News/김현근

'하품의 일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8년간 일본생활을 하면서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일본인이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점만을 꼬집어 정리를 한 것이다. 때문에 ‘일본인 당신은 누구인가’와 ‘일본은 없다’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하품의 일본인’의 서문에 내가 도작당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을 뿐이다. 이 같은 서문 내용이 인터넷 상에서 ‘펌’ 형태로 널리 퍼져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솔직히 난 몰랐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나중에 비로소 알았다. 왜냐하면, 2004년까지 내가 컴퓨터 사용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 조회 수가 그렇게 많은지도 재판이 시작된 후에야 겨우 알았다.

 

오죽하면 스포츠조선에 ‘일본은 지금’이라는 타이틀로 월, 화, 수요일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메일이 아닌 워드로 친 원고를 매번 팩스로 보내자, 담당기자가 제발 컴퓨터 좀 배우라고 매일같이 닦달했을까. 그래서 내 별명이 ‘천연기념물’이었다.

 

아무튼, 95년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다시 ‘하품의 일본인’을 출판한 뒤, 출판사 부부와 책 홍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이상한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정하고 장소도 프레스센터로 정한 뒤였다. 내게 기자들에게 줄 봉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일간지는 50만 원, 주간지는 30만 원, 월간지는 20만 원씩 넣은 봉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래야만 되는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상대편은 훨씬 더 많은 봉투를 기자들에게 뿌렸다는 것이었다. 3천만 원이란 구체적인 액수까지 댔다.

 

즉시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액수단위가 낮아졌다. 30-20-10만 원으로. 이 역시 거부했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면서까지 왜 기자회견을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중에는 그럼 점심값만 이라도 준비할 수 없겠느냐고 사정하는 투로 설득해 왔다. 그렇게 새벽까지 실랑이를 했다.

 

결국, 그날 새벽 장문의 편지를 써서 팩스로 출판사에 보냈다. 내용은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면서까지 홍보를 해서 책을 팔고 싶지 않다는 내 의중을 적었다.

 

팩스를 받은 출판사는 이튿날 우리 집으로 사장동생인 전무를 보냈다. 책이 재판에 들어갔으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하게 ‘하품의 일본인’의 판매중지를 요청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책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꽤 여러 권의 책을 내서 매번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지만, 비정상적인 홍보를 해서 책을 판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줘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열심히 현장에서 취재해 기사를 쓰다 보니 특별한 선전 없이도 책이 잘 나갔다.

 

훗날 전여옥이 책을 팔기 위해서 표절문제를 의도적으로 일으켰다고 비난했는데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때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가 처녀출판이었고, 반면 나는 그동안 르포집, 장편소설 ‘난지도 사람들’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기본 부수만 몇만 부 하는 식의, 출판계에서 일컫는 이른바 기본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 군에 속했다. 때문에 누구의 힘을 빌려, 혹은 화제를 만들어 책을 팔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없이 ‘하품의 일본인’의 판매중지를 결정할 수가 있었다. 물론 일본에서의 반응이 좋아 3개월마다 한 번씩 목돈의 인세가 들어오는 등, 정신적인 여유로운 배경도 판매중지를 결정하는데 한몫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출판사로 보낸 편지는 나중에 전여옥이 '소송을 당할까봐 자진 수거를 했다' 고 또다시 누명을 씌워 증거물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한, 위의 항소이유서 내용 중, ‘…원고는 소송을 하려던 마음을 거둬들이고 나만 열심히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더욱 글쓰기에 힘을 쏟았으며 그런 와중에 원고는 그 후의 유재순 소식을 들었는바 일본에서 지인들이 다 교류를 끊었다는 사실(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과 일본의 아사히신문의 사람들과도 관계가 완전히 절연되었고 남편과도 이혼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같은 이야기는 바로 전여옥 자신의 이야기를 거꾸로 나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99년 일한문화교류기금을 받아 호세이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왔을 때, 오자마자 2년 동안 칼럼을 게재한 것이 바로 아사히신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도 한 달에 한 번씩 아사히신문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주재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중에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해 만나고 떠난 기자도 있다. 그리고 2,3년 전까지만 해도 매년 송년회는 한국에 나가 아사히신문,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출신 기자들과 함께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사히신문 기자들과 완전히 절연이 되었다니?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혹시 전여옥 본인의 이야기?

 

그리고 괄호 안의 ‘원고와 같이 잘해주고 나쁜 말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음’이란 말이 있는데, 이도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에게 잘해 준 것이라고는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도무지 하나도 없을뿐더러, 나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도 아직껏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본 여행 도와준 것이 피해라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거짓 4. 'TV 아사히'의 날조

 

2심 재판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한 가지 느낀 사실이 있다. 전여옥이 블랙코미디 전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원고가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원고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피고들은 원고를 비방할 목적으로 원고가 유재순의 저작물을 표절한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오선화 문제이고 거의 모든 주일 특파원들이 다뤘던 문제였습니다…

항소이유서 18쪽

‘원고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그 느낌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피고들은 원고를 비방할 목적으로….’

 

이것은 ‘일본은 없다’ 121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어쩌랴. 전여옥의 이 주장 자체가 100% 거짓말이니.

그럼 121페이지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일본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점에서 어떤 한국인이 쓴 것 같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름은 ‘스카트노 가제(スカートの風)', 우리나라 말로 ‘치맛바람’이란 뜻이었다…

중간생략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사히 텔레비전에 나온 그 책을 쓴 오선화라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카사카와 신주쿠의 한국인 호스티스의 이야기를 하며 몹시 거칠고 서툰 일본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온 호스티스들의 꿈은 일본남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녀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너무나 살기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생략

일본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그토록 욕을 하고 미워하는데도 너그러움으로 그것을 감싸며 한국인들에게 잘해 주고 있습니다.”

오선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한국사회는 지독하게 부패했습니다. 모두가 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중간생략

나도 사실은 육사생도나 군인과 결혼하는 것이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여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나 육사생도와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 영문학을 공부하러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오선화는 흥분한 듯 말했다.

“일본사람들은 정말로 너그럽습니다. 나는 사실 한국인과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전여옥의 주장대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쓴 글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선화가 텔레비전에서 말했다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내가 쓴 초고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 '일본은 없다' 중에서 오선화 부분 ©JP News/김현근

나는 오선화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1년 넘게 그녀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스카트노 가제’로 인해 지도교수와 갈등을 겪고 있다는 도쿄대학 대학원 유학생도 만났다.

 

나중에는 그 유학생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오선화에 대한 취재를 다니기도 했다. 이 유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은 없다’ 126페이지에 나온다.

…앞부분 생략…

흥분한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이러한 책이 나오지 못하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깎아내리는 이 형편없는 책을 교재로 쓰겠다는 일본인 교수가 있었는가 하면 수업시간에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을 가장 객관적으로 본 책’이 나왔다며 세미나 주제로 삼아 한국인 학생들에게 억지토론을 시킨 일본인 선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교수들은…

중간생략

…그래서 교수와 설전을 벌이다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학생도 많고 어쨌든 학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치사하고 억울해도 분을 삭이며 두고 보자 하면서 듣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틀리게 기술한 부분까지도 전여옥은 그대로 자신의 책에다 인용했다.

 

‘그래서 교수와 설전을 벌이다가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학생도 많고’

사실은 오선화의 책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간 유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취재과정에서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전여옥은 이렇게 잘못 취재한 내용마저 마치 자신이 진짜 취재한 것처럼 버젓이 ‘일본은 없다’에 기술했다.

 

또 하나 도작문장의 실례를 들어보자.

'한국인들이 한국을 가장 객관적으로 본 책’이라는 표현은 도쿄대 유학생이 나와 인터뷰를 할 때 지도교수가 한 말이라면서 내게 들려준 말이다. 나는 이 말을 그대로 원고에 썼다.

 

그런데 이 적확한 표현이 그대로 전여옥의 책에 인용됐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떻게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녀의 책에 나올 수 있나. 더구나 그 유학생은 전여옥을 만나기는커녕 전화통화조차 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수가 된 그 유학생은, 2심 재판 때 법정에 나와 126페이지에 나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했다.

 

다시 TV 아사히(일본에서는 아사히 텔레비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TV 아사히라고 부른다)의 중계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문장 내용으로 봐서는 분명 전여옥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쓴 글인데, 내용은 내 초고 원고내용이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항소이유서에도 당당하게 기술할 만큼, 본인은 TV 아사히를 보면서 썼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먼저 TV 아사히를 찾아갔다. 그리고 오선화가 출연했는지의 여부부터 확인해 봤다.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오선화가 '아사히'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한 자체가 없었다. '한국은 성형 천국'이라는 한낮에 방송하는 와이드쇼에 나와 잠깐 몇 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번에는 다른 채널의 출연분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없었다. NHK에 출연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 역시 ‘일본은 없다’ 121-122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 원고 내용을 그대로 도용한 것.

그것을 자신의 것(내용)으로 전개, 혹은 위장하기 위하여 TV 아사히를 살짝 도입 부분에 삽입시킨 것뿐이었다.

 

이 같은 방법은 '일본은 없다' 내용 곳곳에 나온다. 그 방법의 도구로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주간지, 월간지 등을 골고루 인용해 접목시켰다.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나는, 오선화가 출연했다는 방송을 모두 수집하여 녹취록을 뜬 다음 한국어로 번역하여 비디오테이프와 함께 증거물로써 재판부에 제출했다.

▲ 일본은 없다 중 도작 부분을 포스트잇으로 체크했다. ©JP News/ 김현근


거짓말 5. 좌파정권과 좌파언론이 사주했다?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르포라이터로서 현장취재를 해왔지만, 정치색깔을 나타내는 기사를 쓰거나 그 어떤 정당에 적을 둔 적도 없다.

 

언론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내가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것은, 현장의 ‘있는 그대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좋은 것은 좋은 것 그대로, 나쁜 것은 나쁜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르포라이터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판단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가서 1년 8개월 동안 쓰레기를 주우며, 쓰레기를 주워 먹고사는 사람들의 실생활을 그렸고, 구로공단 공장에 가서는 한 달 동안 위장취업을 해 여성근로자들의 하루 일과를 엿보았다.

 

또한, 고학력, 있는 집 자녀들이 이태원에 가서 아무 의식 없이 미군들과 기타 외국인들을 상대로 쾌락을 위해 함부로 몸을 내던지는 소위 ‘이태원 걸’ 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3년에 걸쳐 그 실상을 파헤쳤다.

 

덕분에 나는 당시 블랙마켓을 하며 한국여대생들을 농락하는 독일 남자를 용산경찰서에 고발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잭나이프로 내 허리를 찌르기 직전 내 룸메이트였던 메리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스포츠동아>에 약 2년에 걸쳐 연재하는 동안, 집시족 같은 미국인을 가리켜 ‘노랑머리새끼’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미국대사관에서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압력이 들어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와 데스크와 끝까지 단 한 개의 용어도 고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연재물이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강연차 어떤 모임에 갔을 때, 관중의 몇 사람이 대한의 딸들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나!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었노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처럼 이태원의 실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 이 목숨을 건 르포를 두고 전여옥은, ‘대학졸업 여부도 확실치 않고 (아마 신정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나를 비하하려는 의도를 갖고 표현한 듯) 르포작가로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책을 낸 것– 제목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태원의 여왕벌’ 하는 식의 제목으로 기억됨- ’이라고 항소이유서(6쪽)에 적고 있다.

 

하긴 표절의혹을 제기하는 일본주간지의 전화인터뷰에서도 전여옥은, ‘자신은 일류대학 출신의 공영방송기자이고, 유재순은 3류대학의 프리랜서’라고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비하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표절의혹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아 비웃음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런 전여옥이니 목숨을 건 르포 따위야 아무런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서 그 인터뷰를 한 일본주간지 기자가 오히려 내게 되물었었다.

"그 사람 일본특파원 지낸 것 맞습니까?"

 

이유는 일본에서 대형사건을 취재하여 파헤친 기자는 대부분 프리랜서들이기 때문이다. <주간문춘>에 록히드 사건을 파헤쳐 다나카 가쿠에이 현직 수상을 구속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프리랜서 '다치바나 다카시'였고,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재일동포 차별에 의한 인질사건의 범인 김희로 씨의 일대기와 재일동포 역사를 추적한 ‘김의 전쟁’ 저자도 바로 르포라이터 '혼다 야스하루' 씨였다.

 

위의 두 사람 모두 유명출판사에서 전집 발행이 된, 일본에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논픽션의 대가이자 거장 프리랜서다. 그럼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창피한 줄 모르고 일본 언론매체에 대고, 자신은 일류대학 출신의 명품을 휘두른 공영방송기자, 나는 3류대학의 남루한 옷을 걸친 프리랜서라고 떠들고 있다. 그러니 일본기자들로부터 '진짜 기자출신 맞아?'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제아무리 명품 옷을 걸치고 일류대학을 나왔다 한들, 인품이 명품이 아닌 하품(下品)이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전여옥 자신만 모르고 있다.

▲ '일본은 없다'에서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미조라 히바리'라고 기술했다. 이는 유재순 발행인이 초기에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JP News/ 김현근

아무튼, 내 직업은 현장중심의 르포라이터다. 성격이 이런 만큼 전여옥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무현 좌파정권이나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의 꼬임에 넘어가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고 할 만큼 좌지우지될 그런 성격이 결코 아니다.

 

1심 승소 후, 전여옥이 패소의 변으로 '노무현좌파 정권과 좌파매체인 오마이뉴스가 유재순을 앞세워 전여옥 죽이기에 나섰다'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일체 오마이뉴스와 접촉을 하지 않았다.

 

2심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이 한국을 오가면서도, 오마이뉴스 기자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피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여옥에게 핑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1심 초반 무렵 재판과정이 오마이뉴스에 보도되어, 이 또한 보도되지 않게 변호사를 통해 정식으로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재판과정에 대한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재순은 선, 전여옥은 악'이라는 이분법의 여론재판이 아니었다. 팩트는 하나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현실적인 권력을 쥐고, 세속적인 잣대로 나를 비하하고 모멸감을 주며 질겅질겅 밟는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사회정의가 살아 있다면 정녕코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나와 전여옥이 공통적으로 관계가 있는 지인들에게 온갖 추잡한 협박을 가해도, 그들은 조용히 내게로 다가와 손을 잡아준 것이 나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큰 버팀목이 됐다.
 
2심 재판정에서 현재 한국주재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출신 영사부인이 이런 증언을 했다.
 
"전여옥 씨의 특파원 시절, 우리 부부가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씨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우리에게 자기가 책을 쓰고 있는데 유재순 씨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특파원이 취재한 내용도 들어 있다고 본인한테서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의 증언을 한 일본인 외교관 부인은 그날 저녁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다시 한번 주둥이를 잘못 놀리면 네 혀를 잘라 놓겠다. 그리고 네 남편을 한국에서 추방시켜 버리겠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외교관의 집 전화번호를, 그것도 부임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일본영사의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것이다. 특별한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일반인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집 전화번호는 아니다. 결국, 재판과 관련된 사람이 협박전화를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지금까지는 그저 힘있는 그녀를 방어하기에만 바빴다. 그것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온갖 거짓말과 술수를 워낙 잘 쓰는 그녀의 본질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다. 내가 당한 만큼, 내 소중한 가족과 지인들이 많은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은 그 몇 배만큼, 온전히 되돌려받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이제부터 조용히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내 책 내용으로 전여옥 입맛에 맞게 그 내용을 왜곡해서 일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 그 행태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현재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증오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일본모습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일본을 바로 아는 것이기에, '도작사실'부터 분명하게 정리를 한 다음 행동에 나설 것이다.


■ JPNews 편집자 주
 
이 글은 이번 2차 '일본은 없다' 관련 항소심 판결에 대한 유재순 제이피뉴스 발행인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입니다. '보도자료'를 대신해서 작성한 것이므로 인용 및 전재, 재배포가 가능합니다.

 

(cL) 유재순 / 제이피뉴스 발행인


출처 : http://www.jpnews.kr/sub_read.html?uid=3293§ion=sc2§ion2=유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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