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개곰 (raccoon) / 2010-1-14 05:05)
메리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가난한 집을 떠나 두 동생과 함께 호주의 페어브리지 농장학교에 온 것은 1959년 열세 살 때였다. 홀어머니와 헤어지는 아픔은 슬펐지만 넓은 땅에서 농업 기술을 배워 어엿한 농부가 되려던 메리의 꿈은 도착 다음날로 깨졌다. 메리는 농장 감시인의 집에서 살면서 식모처럼 일해야 했다. 청소도 요리도 손님 접대도 메리의 몫이었다. 가족들은 메리를 하녀처럼 부렸고 주인 남자는 메리를 툭하면 건드렸다. 주인 남자한테 농락당한 다음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상을 차려야 했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메리였지만 자기모멸감과 중노동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고 성적은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메리는 운이 좋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였던 어머니가 2년 뒤 호주로 이민을 와서 페어브리지농장학교를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산촌에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다가 1938년 누이동생과 함께 이 학교에 온 론은 불운했다. 론은 주방에서 일했는데 주방장이 론을 화장실에 가두고 강간했다. 론은 농장 직원들에게 호소했지만 거짓말한다고 더 얻어맞았다. 무식한 교장은 하키 스틱으로 론의 등을 후려쳐서 론의 등뼈를 부러뜨렸다. 의사들에게 호소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페어브리지재단을 만든 킹슬리 페어브리지는 로디지아(짐바브웨의 옛이름) 백인 농장주의 아들이었다. 4전5기 끝에 옥스퍼드대학에 합격한 페어브리지는 로디지아의 농장에서는 백인 보기가 힘든데 영국에는 빈민촌마다 가난한 백인 아이가 수두룩한 것을 보고 아이들을 로디지아, 호주, 캐나다 등 드넓은 영토로 보내 제국 농업의 역군으로 양성하는 어린이 이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1912년부터 1974년까지 페어브리지재단을 통해서 모두 10만명의 영국 아이가 호주, 캐나다, 로디지아로 보내졌다. 메리와 론의 모교인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의 몰롱 페어브리지농장학교에서는 4세에서 15세에 이르는 여학생의 3분의 2가 직원들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했다. 영국에 부모가 있는 아이도 여간해서는 부모를 볼 수가 없었다. 학교는 아이들이 집으로 보내는 편지도 내용을 검열하고 중간에서 가로챘다. 우울증에 걸린 아이가 적지 않았고 자살하는 아이도 나왔다. 페어브리지농장학교에서 폭력이 자행된다는 제보가 영국 정부에까지 들어갔지만 페어브리지재단의 압력으로 철저한 조사는 안 이루어지고 흐지부지되었다. 노동당 정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노동당 정부는 정치 자금을 대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노조의 눈치는 보았지만 부모조차도 잘 거두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챙기지 않았다. 영국은 이차대전 때 아이들을 공습이 안 미치는 시골로 대피시킨 것을 자랑하지만 그런 혜택이 가난한 집 아이들,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까지 돌아갔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영국에서도 없는 집 아이는 서러웠다. 다당제를 운영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장점은 정치인과 지도자가 유권자의 눈치를 보고 유권자에게 이익이 되는쪽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선거에서 살아남고 정권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유권자의 눈치를 본다고 꼭 선진 민주주의는 아니다. 영국은 정치인들이 투표권을 가진 어른 유권자의 눈치는 보았지만 투표권 없는 아이의 눈치는 보지 않았다. 투표권 가진 유권자한테 제보가 들어오면 바로 진상조사에 착수해도 투표권 없는 아이의 호소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정치인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는 것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나만이 아니라 남과 모두의 형편까지 헤아릴 줄 아는 유권자의 존재다. 당장 나를 편하게 해주는 정치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길게 보는 정치 집단을 선호하는 유권자가 많아야 참민주주의 나라다. 지난해 노르웨이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진보당'은 북해 원유 생산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조성된 4500억달러 규모의 국가기금을 예산 운용에 써서 노인 복지와 의료비에 충당하고 감세를 하자며 노르웨이 국민을 홀렸지만 노르웨이 국민은 결국 원유는 언젠가는 고갈되기 마련이므로 고갈될 자원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가지고 예산을 집행할 수는 없다면서 지금 쓰지 말고 나중 세대를 위한 연금기금으로 계속 더 적립해가야 한다는 입장에 선 노동당에게 더 많은 표를 주어 정권을 다시 맡겼다. 노르웨이는 신중하고 건실한 재정 운영으로 세계 금융위기의 타격을 거의 입지 않은 유일한 자본주의 국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진보는 적자를 감수하고라도 복지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는 거기에 반대하는 편인데 노르웨이는 거꾸로다. 그래서 극우에 가까운 야당이 '진보당'이라는 당명을 내걸었는지도 모른다. 현 유권자의 근시안적 욕망에 영합하지 않고 공동체의 장기적 번영을 위한 정책을 수립한 것은 노르웨이의 노동당이지만 노동당이 그런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게 해준 것은 지속불가능한 당장의 개인적 안일보다는 지속가능한 모두의 번영을 택한 노르웨이 유권자들이었다. 노르웨이의 어른 유권자는 지금 아이들이 안심하고 노인이 될 수 있는 길까지도 고려했고 그런 길을 제시하는 정당에 더 많은 표를 주었다. 노무현이 만들어나가려던 한국은 그런 지속가능한 번영을 구추하는 나라였다. 좁은 국토에서 수도권에서만 과밀 인구가 복작거리는 비효율을 바로잡으려고 행정복합도시 세종시와 지방 혁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정부 기관을 지방으로 옮기고 기업의 지방 투자를 유도하면 살인적인 서울의 집값은 안정되고 젊은이들도 서울에서든 지방에서든 큰 걱정 없이 내 집을 마련하고 직장을 구할 수 있다.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노무현은 또 결식 아동들을 위한 예산을 대폭 늘렸다. 2002년 겨우 1만4천명의 아이가 혜택을 받았지만 지금은 45만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명박은 대기업에만 땅을 헐값에 불하하는 특혜를 베풀면서 세종시 건설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식 아동 급식 예산 432억원은 전액 삭감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4대강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대운하 사업에 모든 돈을 쏟아붓기 위해서다. 그 돈은 이명박 같은 땅부자와 건설토호족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표를 가진 기득권자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주주의는 참민주주의가 아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까지도 살피는 것이 참민주주의고 참진보다. 힘없는 사람들은 죽어라 경쟁시키고 자기들끼리는 같이 뒹굴면서 영원히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가려는 무국적 한국 보수, 경쟁의 경 자만 꺼내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침만 흘려대면서 경쟁 없는 자기 관념의 유토피아에서 무럭무럭 머리만 키우는 가분수 한국 진보는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해 한편으로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복지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애쓰고 한편으로는 그런 복지의 지속가능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개방을 추구한 노무현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수는 조중동, 진보는 한겨레, 오마이, 경향과 한통속이 되어 노무현을 물어뜯고 갉아먹었다. 기득권에 매달리는 어른 유권자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까지 생각하면서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번영을 노무현처럼 추구하는 진정한 진보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 노무현을 죽인 이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의 홍위병들은 다시 합심하여 노무현의 계승자들을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을 것이다. 노무현의 계승자는 많아도 이런 하이에나에 맞설 수 있는 언론은 아직 없다. 노무현의 계승자들을 지켜주는 언론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의 수호자를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
그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01-14)
(cL)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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