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바보 노무현'을 추억하다

pulmaemi 2010. 1. 5. 13:29

(서프라이즈 / 마포사랑 / 2010-1-5 09:20)



'바보 노무현'을 추억하다

(레이디경향 / 이은희 / 2009-12-30)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와의 인연, 그리고 두 부부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2009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을 가장 떠들썩하게 한 뉴스는 단연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대미문의 사건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자될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파격과 도전, 온몸을 던지는 정치적 승부사로 새로운 정치 ‘아이콘’이 되었지만 충격적인 서거로 그의 정치실험은 미완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서거 이후 ‘깨어있는 시민이 역사를 만든다’는 노 전 대통령의 유지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마침, 마포교육문화센터 소장으로 지역운동을 하고있는 이은희 소장을 만났다. 그녀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장으로 노대통령 내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 중 한명이다.  권양숙 여사가 ‘청와대 입성 3주년’을 맞아 여성지 매체와 인터뷰를 할 때, 이은희 소장은 당시 제2부속실장으로 실무를 담당했다. 기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권양숙 여사를 보좌하며 신뢰 깊어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인연이 아닐까 합니다. 이은희 소장과  노무현대통령, 권양숙 여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1988년 제가 연세대 총여학생회장으로 활동할 때  5공 청문회스타였던 노무현 국회의원을 처음 뵈었어요. 그 후로 그 분의 정치역정이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1998년 지방선거 때도 뵈었죠.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초 전대협동우회 초청토론회에서 만나 금강 캠프의 여성특보로 일하면서부터예요. 권양숙 여사는 2001년 겨울에 처음 만났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2002년 국민 경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후
비서실 가족들과 함께 북한산 등반 기념촬영]


금강 캠프에서 이은희 소장은 여성조직을 관리하고 권양숙 여사의 활동을 보좌하는 활동을 주로 했다. 그러나 그 일의 시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당시 이 소장은, 혼자서 여성행사와 당원행사에 참석하여 노무현 후보를 홍보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후보 부인없이 참모가 대변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나서는 걸 싫어하던 권여사가 “정치는 남편이 하는 겁니다. 나는 정치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조용히 내조하겠습니다”며 외부 활동에 난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은희소장은 권여사를 설득하기 위해 아예 혜화동 후보의 집에서 출퇴근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쯤 여사님과 함께 지내며 현재 캠프 사무실 현황이나 다른 후보 부인들의 활동에 대해 알려드렸어요. 그리고 수십명의 참모가 있다 해도 후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후보부인뿐입니다. 최선을 다해 여사님을 보좌하겠습니다.”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 권양숙 여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힘들 것 같았지만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듯 진정성을 갖고 진심으로 뛰어들자 서로 간에 신뢰감이 쌓여갔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였던 미국 LA의
토요한글학교를 방문한 권양숙 여사와 함께]


대통령의 아내 사랑과 권여사의 남편에 대한 믿음

 

이은희 소장이  노무현대통령 부부와 짧은 시간에 깊은 신뢰를 쌓은 배경에는 개인적인 공감대도 한몫했다. 이은희소장은 노대통령이 부산상고 출신으로 어렵사리 사법고시에 합격해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이나 권여사가 가난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한 아픔을 깊이 공감했다. 이 소장 역시 서울여상을 졸업한 후 대학에 가기위해 주경야독하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개인적인 역정이 서로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

 

“제가 보기에 두 분의 성격은 다른 듯하지만 서로를 보완해주었고 닮은 부분도 많으세요.  대통령도, 여사님도 낙관적인 분이세요. 여사님께서는 가정주부로만 있었기 때문에 자칫 소심하고 사회적 감각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본 여사님은 누구보다 사회적 감각이 탁월한 분이세요. 가족들이 말하는 여사님 별명이 ‘뉴스 마니아’예요. 아침 6시부터 라디오 뉴스를 틀어놓고 식사 준비를 하셨어요. 그리고 3-4종류의 신문과 저녁 9시 뉴스를 꼭 챙겨보십니다. 나중에 여쭤보니 남편이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하시더군요.”

 

신문과 책을 읽으며 쌓여진 권양숙 여사의 내공은 위기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휘되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이은희 소장이 지난 2001년부터 청와대 시절까지 옆에서 보좌하며 제일 어려웠던 두 번의 상황에서도 권여사는 담담하게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부산 APEC 정상회의를 마치고 시민과 해운대를 산책하는 대통령 내외와 함께]


 “민주당 국민경선 기간중에 경쟁후보가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어요. 선거캠프에서 지금 당장 사실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전화가 빗발쳤지요. 하지만 몇 시간 이동하는 차안에서 여사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고, 충격을 이겨내고 계신 것 같았어요. ‘아무 대응도 하지 말라’는 한 말씀만 하시더군요. 그 때는 두분 다 힘드셨을 거예요. 대통령께서는 장인의 좌익경력을 공격받자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후보직을 버리겠습니다.’라며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셨죠. 잔인한 정치현실이었지만 두 분의 사랑과 감동으로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셨습니다.”

 

두 번째 어려움은 대통령탄핵 사건이었다. 그날도 예정대로 지방일정을 소화하고 여성모임 오찬장으로 이동하던 중에  ‘탄핵가결’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20분후의 오찬일정을 그대로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권여사는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른 후 오찬일정에 그대로 참석했고 연설원고도 없이 단호하게 당신의 소신을 밝혔다.

 

“여사님께서는 ‘국민의 판단을 겸허히 받겠습니다. 대통령께서 언행에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작은 언행 실수는 있어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생각과 신념, 철학에 큰 잘못은 없습니다. 국민들께서 판단을 믿고 기다리겠습니다.’라고말씀하셨어요. 마음이 많이 힘드셨는데도 그날의 일정을 다 마친 후에야 서울로 올라오셨죠.”

 

2개월 가량의 대통령 탄핵 기간 동안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는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며 관저에서만 지냈다. 그나마 마침 백일이 지난 첫 손녀딸이 있었기에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2004년 11월 청와대 직원들을 위한 김장 담그기 행사에서 주방 아주머니들과 함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공공도서관 사업이 가장 큰 보람

 

권양숙 여사는 정치인의 아내로 활동하는 것보다 가족들과 오순도순 어울려서 조용히 살고 싶어하셨다. 하지만 권여사는 남편의 정치활동을 조용히 내조하면서 정치와 사회뉴스를 관심있게 지켜 보았고 지역주민의 일상적인 생활과 여론을 주의깊게 살폈다. 또한 남편의 신념을 믿고 어려운 정치행보의 선택을 지지해왔다. 평소에도 권여사는 정치인의 아내는 한발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게 내조하고자 했다. 또한 영부인으로서 해외순방과 국빈접견, 문화행사 참석을 통해 우리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국내적으로는 교육, 문화, 복지분야에서 여성과 장애인, 소외계층을 대변하고 국민여론과 현장을 살피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영부인이 관심과 애정을 많이 기울였던 분야가 공공도서관 활성화사업. 당시 이은희 실장은 공공도서관 정책 관련 업무를 하면서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여사님의 어릴 적 꿈이 서점주인이 되는 것이었어요.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으시고 손녀딸에게도 틈틈이 책을 많이 읽어주십니다. 해외방문시에도 각국의 도서관시찰을 많이 하시며우리나라도 도서관이 지식정보문화의 산실이 되기를 기대하셨죠. 지역주민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는 작은 도서관에 특히 관심이 많으셨어요.”  

 

몇해 전 MBC방송의 ‘기적의 도서관’ 도서기증운동, 지금은 많은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작은 도서관 운동’과 언론의 도서캠패인 등 책과 도서관운동은 영부인의 관심과 함께 사회적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특히 세계도서관대회 유치,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행사지원, 대통령직속 도서관위원회 설립 등은 ‘책과 도서관’에 대한 영부인의 관심으로 이루어낸 성과들이다.


[2005년 청와대 직원 가족 초청 행사에서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와 함께]


봉하마을에서 너무나 행복했던 대통령내외

 

이은희 소장은 지난 2006년 6월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퇴직했다. 만 5년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하루도 마음편한 날이 없었던 청와대 생활이었지만 영부인을 모시며 해외순방과 교육 문화 복지분야의 행정경험을 충분히 익혔던 매우 귀한 시간들이었다. 퇴직 후에도 영부인활동 등을 정리하느라 틈틈이 찾아 뵙고 인사드리곤 했다.

 

“참모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봉하마을로 내려가실 뜻이 확고하셨어요. 말씀을 하시는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설레임과 기대감에 가득찬 듯 보이셨죠. 저는 봉하마을이 워낙 시골이라 여사님이 살기에는 불편하실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두 분은 행복해 보이셨어요.”

 

퇴임하는 날, 이은희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의 귀향길에 동행했다. 그날 봉하마을에 도착해 대통령의 귀향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야, 기분좋다. 고향에 오니 정말 좋습니다”라며 기쁨에 가득 차 있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과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고.

 

 “식목일 전후로 봉하마을에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하니, ‘할일이 많으니 내려올 때는 작업복에 운동화신고 오세요.’ 하시더군요. 왠지 마을에 활력이 넘쳤어요. 여사님은 새신부처럼 얼굴에 분홍빛이 가득하고 대통령은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 그대로 시골공부였습니다. 오찬 때는 봉하마을에서 생산한 산딸기주 자랑을 많이 하셨어요. 제법 드셨는데 봉하마을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인사할 시간이 다 되었죠. 얼굴이 붉어져서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대통령께서 나가시더니 ‘아, 오늘 서울에서 미인들이 한꺼번에 오는 바람에, 제가 부끄러워 얼굴이 발갛게 됐습니다. 이해해주세요.’ 하시더군요.“ 

 

이은희 소장은 봉하마을에서 너무나 행복한 대통령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부엉이바위의 유래, 화포천을 되살려 생태습지를 복원할 계획, 우리몸에 좋은 장군차 재배법, 우렁이농법과 오리농법으로 친환경 쌀을 재배하는 과정 등 곳곳의 나무와 환경, 습지 등을 설명하면서 흥미로운 시골농부의 이야기와 생활을 이야기하던 대통령.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귀향해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2008년 2월 노 대통령의 퇴임 직전 봉은사를 찾아 새벽 예불을 마치고
명진스님과 차담을 하는 권여사와 함께]


노 대통령의 충격적 서거와 봉하마을 지키고 계신 권양숙여사

 

하지만 한사람의 시민으로 돌아가 행복했던 노무현대통령의 생활은 길지 않았다. 2008년 연말부터 노대통령의 주변사람들과 노대통령을 행해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끝내 4월 30일. 노대통령이 검찰조사를 받았다. 이은희소장은 이때, 노대통령을 찾아뵙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 가슴에 통한으로 남는다고 했다. “차마 그런일은 상상조차 못했어요. 너무나 죄송해서 가슴에 사무칩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지요. 우리는 충격속에서도 대통령 장례식을 준비해야 햇습니다.”

 

 권양숙 여사는 쓰러져 있고 건호씨와 정연씨 내외는 탈진상태였다. 권여사는 며칠동안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한 채, 걷지도 못하셨다. 3일후 입관식에 휠체어에 의지해 내려오신 여사님을 본 조문객들은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건호씨와 정연씨는 입관식을 마친 후부터 국민장을 마칠때까지 의연하게 상주역할을 다 했다.

 

“당시 봉하마을의 장례위원회는 마치 예전의 청와대를 옮겨놓은 듯 했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일들을 일사분란하게 처리했죠. 대통령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모두가 최선을 다했어요. 마을분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 모두 한마음이었습니다.”


 

권여사는 지난 7월 10일, 노무현대통령의 49재를 마치고, 참모진들과 함께 대통령묘역 관리와 생가복원 사업, 노대통령이 하던 일들을 다시 추스르며 봉하마을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 한동안은 건호씨가 여사님과 함께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어요. 하지만, 젊은 건호씨의 장래나 얼굴이 너무 알려진 손녀딸을 걱정하는 여사님의 간곡한 뜻으로 지금은 회사에 복귀해서 미국에 나가있습니다. 건호씨는 요즘도 매일 여사님께 안부전화를 드립니다.”

요즘은 권양숙 여사도 바쁜 나날을 보낸다고 한다. 노대통령이 생전에 하던 많은 일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화포천습지 관리나 친환경 봉하쌀 재배와 농작물 관리까지. 최근에는 12월 16일 서강대에서 열린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의 유고저작인 ‘진보의 미래’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했다.



[2008년 (주)중소기업유통센터 상임감사 재직 시 중국 중소기업박람회에서]


더 많은 ‘시민 노무현’과 함께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들겠다.

 

이은희 소장은 최근 인터넷 블로그(future2002/tistory/com)를 오픈했다. 이는 월드컵 4강 신화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이끌어낸 2002년의 국민 에너지를 더욱 키우겠다는 뜻으로 만든 공간이다. 이 소장은 이곳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그 분의 유지를 이어받아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키워 나가겠다고 한다. 

 

“출판기념회에서  대통령의 육성과 동영상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의 장래를 고민하는 대통령을 다시 만났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힘없는 보통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자신과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던 대통령의 모습과 목소리가 되살아나 펑펑 울었어요. 하지만 이제 다시는 울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노대통령이 남긴 ‘시민주권의 시대를 열자, 깨어있는 시민이 되자“는 뜻을 자기 삶의 현장인 마포에서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태도와 삶의 자세로, 대통령비서실의 행정경험을 살려 마포의 지방행정을 새롭게 실현하고자 한다. 더 많은 ’시민 노무현‘과 함께 참여하고 소통, 연대하는 새로운 지방자치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출처 '바보 노무현'을 추억하다 - [레이디경향 2010년 신년호]

 

글 : 경영오 기자, 사진: 민영주·이은희 제공 / 레이디경향

 

이 글은 작성자 이은희 님의 사전동의를 구하여 서프라이즈에 게시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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