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슬기로운 빈둥이공동체마을 사용설명서
지은이 - 필명 nurimaem
제 18 화
시청각 미디어실은 빈둥이공동체마을에 와서, 오며 가며 지나기도 하고 세미나와 영화도 본 곳이라 친숙한 곳이었다. 그런데 불이 꺼진 것 같아 주저하다 혹시나 해서 문을 여는데 갑자기 폭죽이 터졌다.
나라는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깜았다. 그러자 불이 켜지면서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렸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친구들이 케이크를 들고 웃고 있었다. "뭐야, 놀랬잖아!" 나라가 놀란 가슴을 쓰려 내리며 말했다.
"나라야, 생일 축하해. 와아~" 친구들이 노래를 끝마치고 다 함께 말했다. "무슨 생일, 나 아직 생일이 많이 남았다고." "그래서 미리 한 거야.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니?" 영숙이가 말했다. "어, 영숙이도 왔네. 그리고 정금이도" 나라가 놀래며 말했다.
도현이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사부님,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며 나라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 "아니, 탄신일까지? 도현이의 저 오버는 얘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한결같냐!" 정금이가 말하자 다들 웃었다.
"자 다들, 배 고프겠다. 밥 먹자." 오 원장이 말했다. 중앙의 테이블에는 조촐한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뷔페식으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식당에 따로 부탁을 한 것 같았다.
그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음식이 있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귀찜이었다. "아니, 이거 혹시 '청호 아귀찜' 아니니?" "그래 맞아, 네가 한 번씩 얘기했던 그 아귀찜이야" "아니 어떻게? 아직도 거기에 있어?" 나라가 놀래며 말했다.
"멀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야?" 나라가 미안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사장님도 우리를 기억하시더라고. 네 생일이라고 하니까 아주 듬뿍 주시며 안부 전해달라고 하시더라." 영숙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라는 가슴이 먹먹했다. 너무 뜻 밖에 일이고 다들 바쁘고 퇴근해야 될 시간에 이렇게 모여 축하해주다니. 내 생일을 위해 많은 사람이 축하해 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정리한 후 노래방이 세팅되었다. 첫 주자는 곧 있을 축제 때 청소년의 노래를 지도하고 있는 도현이가 나섰다.
노브레인의 '너에게 반했어'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강렬하고 경쾌한 록 음악의 멜로디였다. 이 시간의 주인공인 나라를 위한 곡이라는 것을 각인이라도 시켜려는 듯, 나라의 앞에서 세련된 안무와 함께 노래를 이어갔다. 그 옆에는 오 원장이 템버린을 열심히 치고 있었다.
"오 원장이 오랜 만에 탬버린을 잡내." 나라의 옆에 앉아 있던 성일이가 나라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오 원장이 탬버린 잡는 것은 나도 정말 오랜만에 본다야!" 나라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도현이가 노래를 끝마치고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앉았다. 다들 도현이의 노래와 안무에 기가 죽은 듯 나서는 이가 없어 잠시 쉬는 타임이 되었다. "도현이 안무가 왠지 세련된 것 같지 않아? 전에는 완전히 '아제' 안무였는데 말이야. 요즘 중등 친구들 가르치면서 한 수 배운 거 아냐?" 정금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거 같네. 도현이의 '아제' 춤은 유명하잖아." 영숙이가 말했다.
"무슨? 나야 원래부터 이렇게 추었잖아. 너희들 벌써 치매가 온 거니? 내 춤 솜씨도 기억 못 하고 말이야." 도현이가 웃으며 큰소리로 말했지만,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 도현이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그렇고 시작부터 벌써 친구들 기를 죽이면 어떻게 해? 목공의 로망을 이뤄준 사부의 생일이라고 너무 아부하는 것 아니야!" 정금이가 말하자 다들 웃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소리가 났다. 영숙이의 핸드폰이었다. "뭐야, 이 시간에. 분위기 다 깨게." 정금이가 웃으며 농담삼아 얘기했다.
"가만 있어봐. 이게 누구야? 보경이야!" "뭐 보경이?" 다들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라가 벌떡 일어났다. "보경이라고? 정말?" 나라가 말하며 영숙이 쪽으로 갔다.
"그래 맞아." "여보세요? 나 보경이야. 영숙이 맞니?" 저 멀리서 보경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그래 맞고 말고. 잘지내지?" 영숙이가 말했다. "응, 그래 잘지내. 지금 통화되니?" "그럼, 되고 말고. 지금 어디야?" "좀 멀리 있어. 주의에 다른 말소리들이 들리네?"
"그렇지. 오늘 안초동 친구들 다들 모여 있어." 영숙이가 말하며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보경아, 반갑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했다.
그 때 나라가 영숙이 쪽으로 바싹 다가섰다. "보영이야? 나, 나라야. 신나라!" "뭐? 나라라고. 정말 나라야?" "그래. 잘지내지. 지금 어디야?" "좀 멀리 있어. 안그래도 네 얼굴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목소리라도 들으니 너무 좋네. 어떻게 다들 모인거야?"
"내 생일이라고 친구들이 다들 모였내!" 나라가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네 생일 아직 멀었잖아?" 보영이가 말했다. "아니, 아직도 내 생일을 기억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영숙이랑 우리 삼총사가 같이 한 세월이 얼마인데!" 나라는 보경이가 자기의 생일을 잊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적잖아 놀랬다.
"근데 지금 어디야?" 보경이가 물었다. "어, 빈둥이공동체마을이야. 좀 쉴 겸해서 내려왔는데 떠나기 전에 미리 생일 파티를 해준다고 다들 모였어." "아니 빈둥이마을이야? 나도 금요일에는 빈둥이마을에 갈건데 잘됐네."
"정말 빈둥이마을에 온다고?" 나라고 놀라며 말했다. "그럼. 그 때 꼭 보자. 한아름에 달려갈테니. 영숙이 얼굴도 보고. 그 때 꼭 같이 보자. 다른 친구들 모두 안녕~~." 영숙이의 폰 너머에서 보경이 주위에도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보경이를 안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 후로 한 번씩 보경이의 소식을 들었는데 개인사인 경우에, 특히 가정사는 다들 쉽게 말을 옮기지 않았다. 하물며 그렇게 친한 삼총사였음에도 나라 역시 보경이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만나자고 하기도 어색한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경이가 힘들 때, 살기 바빠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한 번씩 다른 친구들한테 스치듯 안부를 물었지만 아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영숙이 조차도 그런 상황을 답답해했지만 그건 보경이의 선택을 존중해주며 기다려보자는 말뿐이었다. 그런 보경이가 금요일에 온다고 하니 무척 만나고 싶어 졌다.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무척 궁금한데, 그때처럼 지금도 다른 친구들한테 함부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라 자신도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니, 보경이의 처지가 이해가 되었고, 그가 더욱 보고 싶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보경이를 만나기가 더 어려울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친구들과 헤어져 성일이와 도현이와 함께 다시 목공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작업을 좀 더 할 요량이었지만, 가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작업에 집중을 못할 것 같고, 다들 피곤할 건데 목공 작업을 시키기도 부담스러워, 오늘 작업은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성일이 집으로 가자." 나라가 말했다. "아니 왜? 작업해야지?" 앞서가던 도현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지금 시간도 너무 늦었고 너희들도 피곤할 테니 집에 가서 쉬도록 하자. 지금 작업을 해도 집중이 안될 것 같네. 생각을 좀 해야겠다." 나라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괜찮은데, 정말 괜찮겠어?" 성일이가 걱정되는 투로 말했다. 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앞서서 성일이의 집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성일이의 집에 도착했다. "다들 주스 한 잔 할래?" 현관문을 들어서며 성일이가 말했다. "아닌 밤 중에 주스야?" 도현이가 나라의 눈치를 보며 우스게로 말했다.
"응, 몸에 좋으면서도 맛있는 주스가 있지." 성일이가 말했다. 그러자 나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로 갔다. 성일이가 주스를 준비하는 동안 나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현이가 주방에서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나라에게 주스 한 잔을 먼저 가져왔다. 성일이와 도현이도 한 손에 잔을 들고 아일랜드 탁자에 둘러 앉았다. "아니 이것은 무엇인고? 향기가 너무 새콤달콤한데" 도현이가 말을 하며 찻잔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고 있었다.
나라도 향기를 맡으며 한 모금을 마셨다. "음, 맛이 좋은데? 이게 뭐지?" 나라가 표정이 밝아지면서 궁금한 눈빛으로 찐한 보라색을 띤 잔 속의 주스를 바라보았다. "아니 여태까지 여기에 있으면서 이 맛있는 것을 나라한테만 주려고 감춰 놓은 거야?" 도현이가 농담처럼 말했다.
"무슨 그런, 윤 팀장이 어디선가 구했다고 하더라. 전에 서울에서 인턴십 과정을 할 때 나라 집에 머물렀잖아. 그 때 아마도 나라가 잠을 푹 못자는 것을 알아나봐. 그래서 혹시 이번에도 그럴까봐 사무실로 와서 주고 가더라.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래? 윤 팀장은 멀리서 한번씩 지켜보았지만 요즘 젊은이 같지가 않아!" 도현이가 말했다. 나라는 다시 한 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래서 이 맛있는 주스가 뭐냐고?" 도현이가 다그치 듯 말했다. "타트체리 주스야." "타트체리? 처음 들어보는데. 이것은 어디에 좋은 거야" 도현이가 반복해서 물었다.
"타트체리 주스는 수면에 도움이 되는 멜라토닌 성분이 많고, 강력한 항산화물질인 안토시아닌과 퀘르세틴 성분이 풍부해서 근육통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 또한 뇌심혈관질환을 예방하는데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성일이가 말했다. "와우, 이렇게 좋은 것을 나라 덕분에 맛보는 거야?" 도현이가 나라의 심각한 분위기 전환하기 위해 농담조로 얘기했다. 나라도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라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 서울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되는데, 빈둥이마을에서도 할 일도 많고, 거기다가 보경이까지 금요일에 빈둥이마을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어떡하면 좋겠니?"
"정 그렇다면, 내일 갔다가 금요일에라도 다시 내려와야 되는거 아니야?" 도현이가 말했다. "방법이 있긴 한데,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쉬울 수도 있고 적응이 안되면 어려울 수도 있어." 성일이가 말했다.
"뭐 방법이 있다고? 그게 뭐야?" 평소에 빈 말을 하지 않는 성일이의 말이라 나라는 몹시 궁금했다. 가능하다면 무엇이라도 할 요량으로 성일이에게 다그쳤다. "
혹시 '비대면 화상회의'라고 들어봤어?" "비대면 화상회의? 그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뭐였더라?" "거 있잖아! 서로 멀리 있어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회의하는 것 말이야. 특히 예전에 코로나19 사태 때 서로 모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에서, 비대면 화상회의가 보편화되었지" 도현이가 아는 체하며 말했다.
"아, 그거, 나도 들어봤어. 근데 그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나라는 과거에 서울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서울 목공방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권세일 팀장이 한 날은 비대면 화상회의를 제안했었다. 멀리 출장을 갈 때도 있었고 중요한 결정을 위해 회의를 열어야 되는데 비대면 화상회의를 하면 더 효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다들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막연한 낯설음과 두려움으로 권 팀장의 의견을 무시했고 나라조차도 그런 상황이 부담스러워 더 물어보지도 않고 유야무야 되었다.
"그거 어려운 것 아니니? 내가 할 수 있겠어?" 나라가 걱정되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처음에 시작할 때, 세팅할 때는 어려울 수 있지. 하지만 세팅되어 있는 곳에서 옆에서 잠깐만 도와주면 금방 익숙해져. 다행히 나라가 기거하고 있는 나의 공부방에는 이미 화상회의 시스템이 세팅되어 있어. 서울 쪽에도 젊은 분이 있으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성일이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서울 목공방에도 권세일 팀장이 있어. 지금에 와서 후회되지만 전에 권 팀장이 하자고 하는 것을 내가 부담스러워 추진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배워놓을 걸 후회가 많이 되네."
"아니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모든 것은 필요하면 하게 되어 있어. 그때는 아직 때가 일렀던 걸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도와줄게. 다 잘 될 거야." 나라의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정 안되면 내일 서울 가서 일을 본 후 금요일이라도 다시 내려올 작정이었다.
나라는 그렇게 해서라도 보경이가 무척 보고 싶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보경이를 영 못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성일이가 해결 방법이 있다고 하니 사뭇 걱정이 되면서도 성일이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전에는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먼저 들었는데, 빈둥이공동체마을에 와서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고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자자, 나라 사부님, 내일 걱정은 내일 하시고 오늘은 무척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주무십시오." 도현이가 박수를 치며 나라를 안심시켰다. 나라는 자리에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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