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슬기로운 빈둥이공동체마을 사용설명서
지은이 - 필명 nurimaem
제 4 화
그들은 연구동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연구동 1층 로비 게시판에는 본관 여러 곳에서 열리는 세미나 일정표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게시판에는 여러 가지 강좌가 개설되어 있는데, 건강과 관련하여서는 노화 예방 프로젝트, 대사증후군 그리고 생활습관병 예방을 위한 식이요법 강좌도 있었다.
그 옆에는 근골격계 질환 예방과 관리 지도자 중급과정 세미나 일정표도 있었다.
또한 정신건강을 위한 인문학 책 읽기 모임과 강좌도 안내되고 있었는데, <금강경 강해 - 도올>,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대니얼 서스킨드> 독서모임있었다.
그리고 경제와 관련해서도 <주린이(편집자주 : 주식과 어린이의 합성어,주식 왕초보를 뜻함)가 할 수 있는 주식투자법> 등의 강좌와 <앞으로 10년 세상을 바꿀 거대한 변화 7가지> 강독 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한 것 같았다.
토요일 저녁에 미디어실에서 열리는 토요시네마도 참석인원이 많았다. 미술과 음악 관련 개인교습도 안내되고 있었다.
나라는 2주 전에 '항암지도자(Anticancer Assistant & Coach) 입문과정'의 워크숍에 사전 등록했었다.
총 4시간이고 등록비는 6만 소금이었다. 나라는 오랫동안 목공 작업을 하다 보니 어깨와 허리가 안 좋아서, 근골격게 질환 관련 강의도 들으려고 했으나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대신 다음 주에 오 원장이 여유가 있을 때 진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세미나실에 들어가니 20명 정도의 수강생이 앉아 있었다. 암에 관심이 있는 나이가 인생 후반부라 대략 50대 이후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30 ~ 40대 연령대도 여럿 보였다.
첫 번째 강의는 오 원장의 특강인데, '준비한 만큼 삶은 아름다워집니다'란 제목이었다. 오 원장은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말을 한 후 강의를 시작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준비할 것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노력하고 준비할 것이 참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준비해아 한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현재의 삶보다 사후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때는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거부하는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를 준비해야 한다는 열풍이 불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각자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우선순위가 다르겠지요. 그래서 저도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위에 수많은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 원인이 다양합니다만 대부분은 질병으로 인해 유명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노력도 하여 그 시기를 늦추기도 하고, 다행히 병에서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각한 질병으로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그 진단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충격이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됩니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남자의 경우에는 10명 중 4명이, 여자의 경우에는 10명 중 3.3명이 암이란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지난해에도 한국인 사망 원인 1위는 '암'이었습니다. 1983년 통계 작성 이래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으며, 지난해에는 암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역대에 가장 많았습니다."
"통계청의 공식적인 자료에 의하면 암의 사망률은 사망률 2위인 심장질환, 3위인 폐렴, 4위인 뇌혈관 질환을 모두 합해도 암의 사망률을 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나의 가족이, 나의 친구가 나의 지인이 암으로 진단받고 고통받으며,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암이라고 진단을 받게 되면, 당황스럽고 이 현실을 거부하고 싶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됩니다."
신나라도 그랬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남편의 말기 전이성 간암 진단. 그때도 오 원장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고 신중하게 치료방법을 선택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아니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현대의학에 모든 것을 맡겼다. 현대의학으로도 안되면 만간요법으로도 치료해 볼 작정이었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그것도 효과가 없자 아직 임상시험 중인 면역 항암치료까지 해 보았다. 그런 가운데 면역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오히려 암이 빠르게 악화되는 급성 진행 현상이 나타났다.
삶을 정리할 시간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남편은 그렇게 떠나갔다.
오 원장의 강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암이 진행되어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 단지 치료 가능성과 관계없이, 현대의학의 최신 의료기술에 몸을 맡기거나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간요법을 찾기도 합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물론 가족 전체가 몸과 마음, 그리고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어, 이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암은 중한 병이고 오랜 기간을 관리를 해야 하는 병입니다. 집중해서 치료하여 끝내는 가벼운 병이 아니라, 암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는 병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암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현대의학의 주류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으며 최신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스스로 생각해서 후회가 없는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암에 쫓겨서 그 속에 내가 갇혀 있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암을 다루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공부한 만큼 삶은 아름다워집니다." 오원장이 말했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 나라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의 삶이 이렇게 무너져도 되는 것인가? 살면서 한 치 앞도 못 보고,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왜 나는 아무런 준비도 못했을까?' 나라는 되짚어보았다.
나라는 그런 일들을 그저 남의 일이라 여기고 무시했기 때문에, 거센 파도가 닥쳐왔을 때 쓸려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오 원장이 그때 말한 얘기들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고 그 의미를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운이 좋아 자기 한 몸만 간수하면 되었다. 나라가 좋아서 취미로 시작하여 꾸준히 해온 목공예였는데,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다행스럽게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암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준비하여, 더 이상 자신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영숙이가 점심때 식사를 하면서, 다들 강의가 끝나면, 다 같이 얼음골 주위에 드라이버를 가자고 했다.
성일이는 사무국 일로, 도현이는 공연 준비로 시간이 안된다고 하여, 나머지 4명만 잠시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주차장에 모여 영숙이의 차에 타고 하양리 마을을 빠져나왔다. 밀양 얼음골로 가는 국도를 타고 가다 얼음골로 가지 않고 가지산을 넘는 옛길로 향했다.
영숙이의 얘기로는 가지산터널이 뚫린 후로는 거의 가볼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부산에서 밀양 얼음골로 갈 때는 주로 이 길을 이용했다고 했다.
지금도 웅장하고 화려한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서는, 가지산만 한 데가 없어서 이 맘 때는 차량이 많이 몰린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구비구비 산을 넘어가는데, 맑고 파란 가을 하늘과 산 중턱을 비추는 햇살과 함께 어우러진 단풍이, 천지 사방에 그 화려한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가지산을 내려와서는 석남사에 도착했다. 그 입구쪽 주차장에 내려 석남사로 올라가는데, 절을 향하는 길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석남사의 일주문을 지나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가을 햇살에 짙게 물들어 있는 단풍들이 이내 그 처연한 빛깔을 땅에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드라이브를 끝마치고 저녁시간이 되어 빈둥이 마을 주차장에 다시 도착했다.
다른 친구들을 배웅하고 나라는 혼자 저녁식사를 하러 본관 식당으로 갔다. 성일이와 도현이가 나라의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평소와는 다른 음식에 대해 "건강한 식단을 추구하는 빈둥이공동체마을의 식사 메뉴는 고혈압, 당뇨병과 비만 등의 생활습관병을 예방하기 위해 당분이 적게 들어간 음식 메뉴를 개발하고 있어" 성일이가 메뉴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옛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는 유난히 장수한 왕과 신하가 많았다고 해. 고구려의 척박한 땅에서, 농사보다는 수렵과 채취를 통해 음식을 구한 무병장수의 나라였지."
인문의학연구소에서 '대사증후군'과 '항노화' 관련 지도자 '박사과정'을 수료한 조기철 셰프가, 빈둥이공동체마을의 식당을 책임지고 있는데, 고구려의 전통음식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기존의 건강한 음식들과 콜라보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메뉴들이 반응이 좋아 외부에 알려지면서, 멀리서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사무국에서 주말 레스토랑으로 '무용총(부제 : 고구려 황제의 식탁)' 론칭을 제안했지만 조 셰프는 아직 연구를 더해야한다며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식사를 끝마친 후 나라 일행은 미디어실이 있는 탐작동(편집자주 : 꿈을 탐색하고 작당하는 동네)으로 향했다.
미디어실 입구에는 오늘 상영할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소개글이 붙어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키즈 감독.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의 2005년도 작품. 이때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야기라 유야는 올드보이의 최민식을 제치고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탔는데, 이 영화가 그의 첫 작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디어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제 야외에 장작불을 피워준 최규식 연구원과 마주쳤다. 성일이가 예약을 못했는데 안에 자리가 있느냐고 물으니 "거의 다 오셨는데 몇 분이 예약을 취소하셔서 들어가 빈자리에 앉으시면 되고, 혹시 자리가 없으면 뒤에 서서 보셔도 됩니다"라고 말하고 바쁘게 지나갔다.
성일이 애기로는 최규식 연구원은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빈둥이공동체마을 영화 시네마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전 연령층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고 했다.
이 작품은 결손 가족의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였다. 엄마와 4명의 아이들이 한 집으로 이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돌아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엄마는 사라진다. 그 이후 4명의 이복남매들이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영화였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가족에 대해 '국가는, 사회는, 공동체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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