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사회

5.18 기념식, 장면마다 품은 서사들을 본다

pulmaemi 2017. 5. 19. 12:11

[기고] 문재인 정부가 가진 ‘서사의 힘’


내겐 장면인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서사인 순간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다 하나도 우습지 않은 대목에서 웃거나, 생각지 못한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을 쏟아 당황한 경우도 있다. 오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그(녀)가 왜 우는지 알 도리가 없는 나는 가만히 기다리다 눈물이 잠잠해질 때 쯤 장면에 얽힌 사연을 듣곤 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그런 사연 하나쯤 품고 살 듯, 우리 현대사는 국민들의 가슴에 크고 작은 서사들을 남겼다. 광주는 그것들 중 손꼽는 슬픔의 서사다. 뜻하지 않게 치른 5월 장미 대선. 새 정부 들어서고 꼭 열흘 만에 맞은 37주년 5.18기념식.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는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슬픔을 하나 치유했다.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그의 기념사에 눈물을 흘렸던 건, 시대의 아픔이면서 부채감이었던 사건, 죄책감으로 짓눌렸던 서사 하나를 이제 조금은 홀가분하게 놓아줘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 37주년 5.18 기념식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 37주년 5.18 기념식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기념식의 장면마다 그것이 품은 서사들을 본다.

대통령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광주의 서사를 품은 노래이면서 현대사의 아픈 굽이마다 함께 한 노래다. 이념의 덫을 씌워 부르지 못하게 한 반동의 세월 10년의 한을 갚아주었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과 임종석. 부둥켜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두 사람. 진짜 광주의 아들 한열이의 엄마(그 서사는 또 얼마나 크고 아픈가)와 전대협 의장 출신의 대통령 비서실장. 광주의 비디오를 보고 진짜 세상을 알아버린 그 시절 오월의 자식들을 상징하는 그가 품은 시대의 서사들. 그들과 함께 최루탄 속에서 살았던 민가협과 유가협 부모들의 서사도 있다. 
  
아버지의 사망일과 생일이 같은 5월 광주의 유가족. 눈물 흘리는 그녀를 쫓아가 안아주는 대통령. 제발 한 번만 우리를 봐달라고 애원하던 세월호의 유가족에게 물대포로 답했던 전임 대통령.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포옹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세월호의 서사에서 작은 슬픔 하나를 치유한다. 
  
대통령 곁의 피우진 보훈처장. 불과 임명 이틀째인 그녀의 의전은 행사를 주관하는 조직의 수장으로서 과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했다. 여성 최초의 보훈처장이면서 군인이었고 진보정당의 비례대표 후보였던 사람. 군 시절 그녀의 서사는 임명과 동시에 찬사를 자아냈다. 그녀가 대통령의 곁에 당당히 서 있는 것만으로 새로운 서사 하나가 생겨난다. 

▲ 37주념 5.18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5.18 유가족을 안아주고 있다. 사진=청와대

▲ 37주념 5.18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5.18 유가족을 안아주고 있다. 사진=청와대


 기념사에서 5월 열사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대통령. “전태일 열사여!”로 시작해 오직 열사들의 이름을 호명만 했을 뿐인데도 수백만 명을 울렸던 문익환 목사님의 추도사가 겹친다. 

그 땐 재야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불러야 했던 이름들을 이제 국가의 공식 추모제에서 대통령의 호명으로 듣는다. 흔들리고 후퇴하면서, 그래도 여기까지는 왔다.
  
전인권이 부른 상록수. 대통령의 친구였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전임 대통령. 그가 부른 상록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장면이다. 지금 대통령과 그의 친구인 전임 대통령의 서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친구의 무덤 앞에서 쉽사리 울지도 못했던 친구는 결국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당의 전략공천으로 광주 북구에서 배제된 강기정도 보인다. 그는 필리버스터를 시작하면서부터 눈물을 보였다. 지난 국회에서도 이처럼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폭력의원이라 낙인찍히지 않았을 텐데, 회한 속에서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공천 배제 소식을 들은 날에도 필리버스터 준비를 열심히 한 그에게 문재인 당시 전 대표는 안타까움을 표했다. 강기정 또한 5월의 자식이다. 이 자리의 감회가 남달랐겠다.
  
문재인과 호남이라는 서사도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서사, 친노와 반노, 호남과 친노라는 진영 안의 서사, 세월호 유가족과 광주 유가족들이 공유하는 아픔의 서사... 참으로 많은 서사들이 이 날의 기념식에 모여 각각의 모습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 장면. 누구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누구는 손을 잡고, 누구는 가만히 서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함께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투사가 되지는 못했고 때론 비겁하게 살았을지라도, 내 삶을 지키는 데 급급해 눈 감은 적은 있을지라도, 그렇게 살다 문득, 그래도 함께 겪은 시대의 고통을 영 외면하지는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서사.

그런 이들이 촛불을 들었고 그 힘으로 5월의 정신을 계승한 정부를 만들었다.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동료시민들이기에 가질 수 있는 뿌듯함. 오늘 함께 운 사람들의 가슴에는 기쁨의 서사 하나가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정치는 고도의 합리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영역이지만 궁극에는 해원의 문제가 된다. 상처받은 이의 고통을 알아주는, 슬픈 가슴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그 합리성으로 이루어야 할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가진 특별한 자산은 서사다. 비정상의 시대를 스스로 돌파한 드라마를 만들어낸 시민들. 정치권과 시민 모두 탄생 서사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특별한 정부. 그 서사의 힘으로 한 시대의 해원을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 서사는 힘이 세다. 


미디어오늘 이선옥 르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