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일까. 가족과 따뜻한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는 직업을 찾기가 힘들다. 행복을 위해 달리지만, 행복은 오히려 멀어져 있는 듯하다. 쉼 없이 달려온 몸과 마음은 엉망이 돼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자신을 돌보고 싶지만, 회사와 이 사회는 우리를 그리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뒤처지기 싫어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본다. 그런데 우리들 중 누군가는 욕심을 버리고 멈춰 선다.
지난 6일 신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동범 작가는 “세상의 속도에 꼭 우리를 맞출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페이지짜리 만화 ‘카툰’을 통해 세상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카투니스트’다.
최근 그는 책을 한권 냈다. 여행에서 그린 그림들과 수필을 실은 책 ‘조금 늦어도 괜찮아’이다. 김 작가는 “평소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며 “여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간이 생긴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과 우리들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여행으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
고단한 노인의 머리 위로 활짝 핀 야생화
김 작가를 만난 것은 광화문 역사에 걸려있는 그림 한 점 덕분이다.
회사 일이 끝나고 퇴근하던 지난달 31일, 지친 하루를 달래고 싶다고 느끼며 광화문 지하철로 들어가던 차였다. 역사 안 갤러리 광화랑에 걸려있는 한 점의 그림이 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 쓰고 쭈그려 앉은 남성의 머리 위로 야생화가 활짝 펴 있는 그림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눈가 주변에 깊게 페인 주름은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얘기해주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자라난 야생화는 그의 힘든 하루를 위로하는 듯 했다.
그림의 주인은 김동범 카투니스트였다. 그는 “5~6년 전 태국 방콕 도심 길가에서 만난 할아버지를 그린 그림”이라며 “힘든 하루를 마감하고 기도 하듯이 쉬고 있는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작가는 10년 전 우연한 계기로 여행을 시작해 여행 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림을 선물해 왔다. 태국과 라오스, 네팔 등 동남아시아는 이미 그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방콕 도심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쉬고 있는 할아버지, 허름한 건물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이, 시장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 라오스의 한 도심 골목길을 지나며 탁발하는 스님, 공양하는 주민, 함께 여행하는 여행객까지. 전시장 한편에는 그가 여행 속에서 만난 수많은 외국인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이들은 김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귀엽게 그려준 그림을 들고 하얗게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높새 여행학교 선생님 김동범 작가
아이들과 함께 멈춰서기, 그리고 들여다보기
지속적인 여행 때문인지 봄에도 그의 피부는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매해 2번 이상 1~2개월씩 여행을 떠난다는 그는, 또다시 떠날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 작가는 매해 방학이면 ‘높새 여행학교’ 학생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는 몇 해 전 태국 여행 중 만난 ‘높새 여행학교’ 선생님 덕분에 방학 때마다 아이들에게 여행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함께 태국과 라오스, 네팔 등지를 여행하며 아이들에게 여행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법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여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꿈을 설계하고 점차 독립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김 작가가 여행학교에서 맡은 임무는 아이들과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다. 또한 그림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여행을 가면, 처음엔 누구나 관광객이 되요. 처음 보는 문화와 맛보고 싶은 음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2주에서 3주 정도 지나면, 별다를 게 없다는 감정이 생기면서 여기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죠.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이에요. 이때부터 내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와요. 나를 만나는 시간이에요.”
그는 “느려지는 시간을 통해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며 “꿈이 있다면, 더 가깝게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을 함께 찾아본다”고 말했다. 이 뿐만 아니다. 아이들은 여행 속에서 만난 문제점과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자신감을 찾아간다.
김동범 작가는 “아이들은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낯선 환경과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며 “눈물도 흘리고 고통도 호소하지만 여행이 끝나면 신기하게도 성취감과 자신감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동남아시아의 바다, 겨울 희말라야를 오르는 해외여행은 아이들을 부쩍 크게 성장시킨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을 그리는 작가
“그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부모”
김 작가의 카툰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선물’이다. 지친 직장인에게 잠시 휴식을 선사해 주는 선물이자, 그가 여행 중 만난 현지인들에겐 먼 이국땅에서 찾아온 친구의 정성이 담긴 선물이다.
여행 중 김 작가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그가 선물한 그림을 받고 활짝 웃음 짓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을 그려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외국인도, 냉소적인 숙소 주인도, 구두쇠 같은 산장 주인도 그림을 받으면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해 졌다.
“한 번은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태국 카오산 로드 인근에서 빙글빙글 의자를 놀이기구 삼아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적이 있어요. 신나게 놀던 아이에게 완성된 그림을 건넸죠. 그림을 받은 아이는 도망가듯 사라지더니, 경비복을 입은 아저씨에게 안겨 다시 나타났어요. 아이의 할아버지였어요.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제게 차라도 대접하겠다며 한사코 붙잡았어요. 저의 잔재주가 새삼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작 그림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은 본인보단 그 주변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듣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여행 속 ‘발견’이다.
“그림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할아버지였어요. 언제나 그림의 주인공보다 그 주인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고마워하고 기뻐합니다.”
멈춰 서서 찬찬히 아이를 그릴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면, 그 또한 이같은 발견을 할 수 있었을까?
속도전쟁, 점차 사라지는 종이매체들
카투니스트가 설 자리도 추억 속으로...
20년 가까이 그가 활동해 오고 있는 카툰계는 최근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많은 종이매체들이 폐간하면서 카투니스트들 또한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럼에도 김 작가는 카툰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 작가의 카툰은 곳곳에서 독자들과 만남을 지속해 왔다. 그는 월간 좋은생각, 스포츠서울, 데일리 줌, 월간 VOLO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것도 잠시, 월간 좋은생각은 김 작가의 연재를 마지막으로 카툰을 싣던 뒷표지를 광고면으로 바꿨다. 다른 일간지와 차별화를 위해 신문 내용의 절반을 만화로 채웠던 ‘데일리 줌’은 경영 악화로 폐간됐다. 수많은 매체들이 온라인 시대를 맞이하며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김동범 작가는 “예전에는 신문이나 잡지, 사보 등에 연재를 할 수 있었지만, 갈수록 그런 매체들이 사라졌다”며 “카툰이란 장르 또한 점차 사라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카툰은 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 그림이에요. 속도가 생명인 지금 시대에 어쩌면 맞지 않는 그림이죠. 매체들이 사라지면서 카투니스트들이 설 자리가 점차 사라졌어요. 작업만 해서는 먹고살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저처럼 강의를 하거나 일러스트 외주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요.”
카툰계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한 페이지짜리 만화를 그리고 있다. 속도와 자극적인 내용, 쉽고 간편함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에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잃지 않도록 계속해서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민중의 소리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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