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소리 / 최상재 / 2009-04-08)
한국에는 두 개의 보도기준이 있다. '아니면 말고'와 '명예훼손 불가.'
조선일보가 보도에 참여하면 앞의 기준이 적용되고 조선일보가 참여하지 않으면 뒤의 기준이 적용된다. 코미디다. 이 코미디에는 조중동과 KBS, MBC, SBS는 물론이고 한겨레, 경향, 미디어오늘 등 소위 진보 매체들도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다.
지난 6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달곤 행안부 장관에게 물었다.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방 사장을 술자리에 만들어 모셨고 스포츠조선 방 사장이 방문했다는 것이 있다....언론사 사주 조사를 못하고 행안부장관이 책임을 못 느끼나. 국민들이 허탈해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 강효상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장 명의의 보도자료가 국회기자실에 배포되었다.
"...어느 국회의원이 '장자연 문건'에 관한 질문을 하면서 본사의 이름 및 본사 최고 경영자의 성씨를 실명으로 거론했다...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아니면 말고'식으로 물어...면책특권을 악용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그리고 기자들에 대한 협박이 이어졌다. "본건과 관련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보도하거나 실명을 적시, 혹은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중대한 명예훼손죄에 해당되므로, 관련 법규에 따라 보도에 신중을 기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린다."
한편, 이종걸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폭로한 대로 조선일보는 이 의원에게도 경고 서한을 보냈다.
"귀하는...본사의 이름 및 사장의 성(姓)을 실명으로 거론하였습니다....면책특권의 남용이며...명백히 민형사상 위법한 행위입니다....사과함과 동시에 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줄 것을 요구...조치가 신속히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경우...엄중한 법적 대응을 취할 것임을 밝힙니다."
이종걸 이원은 "조선일보의 행위는 국회의원의 권한을 침해하고 국민들을 협박하는 것이며 조선일보사 스스로 침 뱉기를 한 것" 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온라인에서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잠깐 쉬어가자. 작년 10월 21일 조선일보 보도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20일 대검 국정감사에서 전날 예고했던 대로 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주 의원은 CD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직접 밝히지 않은 채, "모 잡지에서 2006년과 200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수억 달러에 대해 내사에 착수했다는 의혹을 보도했었다"며 "검찰은 이 부분을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2008.10.21)
주성영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교묘하게 DJ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고 조선일보는 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표현과 주 의원의 이어진 발언을 연결해 누구라도 알 수 있게 DJ비자금 의혹 사건을 적나라하게 보도했다. 조선일보가 이종걸 의원에게 항의한 ‘아니면 말고’의 전형적인 보도다.
조선일보가 주 의원의 발언을 보도한 것은 국회의원 면책특권에 해당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 의원의 발언은 비자금의 존재 여부는 차치하고 검찰 수사 여부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다. 유가족의 고소가 있었고 경찰이 현재 수사 중인 고 장자연씨 관련 발언보다 훨씬 더 명예훼손의 가능성이 큰 발언이다. (주성영 의원과의 비교로 격을 떨어뜨린 것에 대해 이종걸 의원에게 죄송스럽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무어라 대꾸할까? 전직 대통령이라는 공인의 신분,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는 사안의 비중, 국민의 알 권리, 죄가 없으면 해명하면 된다... 등등의 논리를 들이댈 것이다.
똑같이 적용해보자.
첫째, 조선일보와 방 사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 못지않게 중요한 언론사이고 공인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김 전 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큰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사안의 비중과 국민의 알 권리다. 한 젊은 여성 연예인의 자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는 사안이다. 권력과 돈과 성이 뒤섞여 썩은 내가 진동하는 성상납 의혹 사건이다. 연예계 전반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할 수도 있는 사안이고 뿌리 깊은 부정부패가 드러날 수 있는 사건이다. 국민들이 몰라도 되는 일인가? 사안의 비중이 클 뿐 아니라 국민의 알 권리를 가로 막아야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셋째, 조선일보가 DJ비자금 의혹을 제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말 문제가 없다면 해명하면 된다. 더구나 조선일보는 국내 최대의 신문사고 방 사장은 대대손손 이어지는 그 사주다. 우리 사회를 통털어 '잘못된 보도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볼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집단이고 인사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는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주 의원의 발언은 면책특권 범위 안에 있고 이종걸 의원의 발언은 면책특권 남용이라고 판단하는가? 민중의소리,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의 보도는 정당하다. 오히려 이를 당당하게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들이 비겁할 뿐이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실명이 거론, 보도되었다는 이유로 이종걸 의원과 '민중의소리'에 가하고 있는 협박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자신들의 주장대로 정말 관련이 없다면, 경찰에 방 사장들이 피고소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게 하면 된다. 세간의 의혹처럼 고소된 사실이 맞으면, 성상납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그 내용을 조선일보에 대문짝만하게 쓰면 될 일이고 타 언론에도 이번에 보도한 만큼 써 달라고 요청하면 될 것이다.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
지금까지 사실 하나마나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썼다.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갖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참 언론의 역할을 다한 '민중의소리',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을 격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으로 위안을 찾는다.
덧붙여 그동안 진보언론이라 자부하던 한겨레, 경향, 미디어오늘의 반성을 요구한다. "조선일보처럼 '아니면 말고' 식 보도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이종걸 의원이 00신문 0사장이라고 발언했다.'고 보도하는 것까지는 아쉽지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이종걸 의원의 국회 발언과 관련해 경고 서한을 보낸 사실,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장이 기자들에게 보도 자료를 돌린 사실, 온라인에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까지도 계속 '해당언론사'라고 표기하거나 아예 보도 하지 않는 것은 한 마디로 비겁하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쓰고 있는 이글도 아마 이렇게 보도될 것이다.
'언론노조 위원장은 한겨레 등 진보언론들이 이종걸 의원의 00일보 0사장 발언을 00일보 0 사장이라고 표현한데 실망하고 적어도 후속 사건에는 00일보 0사장이라고 써야 되는 것 아니냐는 항의를 했다. 이에 우리는 00일보 0사장을 언제부터 00일보 0사장이라 표현할지 검토하고 있다......' 코미디다. 글이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으니 후속보도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아마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보니 그렇게 보도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껄끄러운 일은 우선 피하고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변호사의 판단이다. 그 이상의 것이 언론에 요구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법의 울타리 내에서만, 그것도 강자의 법 해석 안에서만 움직이겠다면 '진보'라는 말은 아예 존재할 필요도 없다.
'조선'과 '방' 자를 쓰지 않고도 조선일보와 방 사장을 열심히 비틀고 꼬집고 있으니 스스로 만족하는가? 넘치는 재치, 풍자와 해학의 기교를 부리며 자신의 글 솜씨에 감탄하고 있는가? 마지막 믿음이다. 한겨레, 경향, 미디어오늘의 기자들은 지금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미친개가 동네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자기는 물리지 않으려고 어리고 작은 동생 어깨 떠밀며 그 뒤에 숨어 개 쫓는 소리만 지르는 덩치 큰 형의 모습... 그만두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간디의 말에 힘이 실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인도의 민중들이 저항하며 피 흘린 것을 기억하라. '해당언론사'라고만 써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는 것은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 민중의소리,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 출처 - http://www.vop.co.kr/2009/04/08/A00000248393.html
ⓒ 최상재 /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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