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평미레 / 2009-04-04)
진보와 보수, 보편적 개념 아니다.
요즘 서프라이즈에 ‘진보’ 얘기가 자주 나온다. 진보가 잘 안 될 때, 아니, 진보가 잘 안 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진보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개 ‘실패한 진보’ 이야기거나 ‘진보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제안이 대부분이다.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 개념 얘기해 온 평미레는 불만이다. 지금 ‘진보’ 얘기할 때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 한국에 맞지 않는 개념이다. 좌익-우익이나 진보-보수는 한국 사회 설명에 적합한 개념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좌우익 개념은 유럽에서 태어난 유럽 정치 설명 도구이고 보수-진보, 더 정확히는 보수-자유주의는 매카시즘으로 좌익이 뿌리 뽑힌 이후 미국에 정착된 미국 정치 서술 개념이다.
물론 좌우와 보진 개념의 국적과 용례가 그렇게 두부 잘리듯 나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한국에서 쓰이는 좌우 보진 개념들의 용례가 그렇다. 그 폐단을 지적하려고 평미레는 2년쯤 전에 <오마이뉴스>의 한 기사를 비판하면서 “진보와 보수 얘기, 이참에 끝장내자(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
table=seoprise9&uid=302293)”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직도 유효한 것 같으니 한 번쯤 다시 읽어봐 주시면 좋겠다.
그런 외래 개념으로 한국 정치 노선을 설명하려고 하니 아구가 들어맞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누가 좌파고 누가 우파며,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인지 헷갈린다. 노선이 헷갈리니 정책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언론과 출판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 보장은 유럽 우익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라는 사람들은 촛불을 탄압하고 미네르바를 구속하고 언론에 재갈 물리고 헌법 소원 군인들을 파면한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노조와 빈부 격차와 각종 차별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라는 사람들은 비정규직과 외국인 문제 등 차별 문제에 립서비스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북한과 통일 문제에 이르면 어떤 게 진보의 정책이고 어떤 게 우파의 정책인지 헷갈린다. 한국의 좌파라는 사람들은 민족을 앞세운다. 민족 이야기는 원래 유럽 우익의 간판 주제였다. 한국의 보수라는 사람들은 북한 인권 문제에 거품을 물면서도 국내 인권위는 축소한다. 인권 이야기는 미국 자유주의자들의 슬로건이다.
일반 백성만 그런 게 아니고 전문가라는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한국에는 진정한 보수나 진정한 진보가 있네 없네 타령들이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진정한 좌파는 유럽에 살고 있다. 진정한 보수는 미국에 득실득실하다. 그런 사람들을 왜 한국에서 찾느냐는 말이다. 역사와 경험이 다르면 이름과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 한국의 정치노선과 이념 성향은 어떤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을까?
수구와 재야, 수구와 개혁
한홍구 교수(성공회대, 사회학)는 ‘수구’와 ‘재야’로 나눈다. 그는 <한겨레21> 371호 (2001년8월16일)에 실린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1/08/021075000200108080371035.html)”라는 글에서 그는 이건창과 황현을 한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로 소개했다. 그들의 보수는 오늘날의 수구와는 된장과 똥이 다르듯이 다르다. 전통적 보수의 명맥은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이영희 등의 재야로 이어졌다. 한편, 참된 보수의 씨가 말라버린 공백을 친일 부역자들이 차지하면서 보수의 이름를 찬탈했고, 친일파-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수구 기득권은 좌파와 진보 세력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정치 노선과 이념 성향은 친일파의 후예인 수구 기득권 세력과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후예인 재야의 저항세력으로 나뉘어 투쟁해 왔다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또 2004년 3월26일 <한겨레>에 실린 “수구에게 빼앗긴 자리 찾기 숙제(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4/03/003000000200403261908132.html)”라는 칼럼에서도 “한국 정치에서 서구 정치학의 개념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재야와 수구”라면서, 재야는 “수구에 눌려 진보뿐 아니라 진짜 보수적 가치마저 사라진 터에 양심과 보수적 가치를 지키다 보니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친일잔재 청산, 시민적 권리의 실현, 민간인 학살이나 의문사의 진상 규명,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소파)의 개정 등 진보나 개혁진영의 전유물처럼 된 의제들은 실상 지극히 보수적인 주제들”이라고 했다.
한국에 보수와 진보가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니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보수와 진보의 씨가 말랐고, 그 자리를 수구와 재야가 메우면서 오늘날의 한국 정치 지형을 이룬 것이다. 국민의 정부 이후 재야 세력이 제도 정치권에 유입되면서 재야의 이름이 민주 세력, 개혁 세력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민주개혁 세력은 본래 보수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기득권을 차지했던 수구 세력에 대항하느라고 진보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홍구 교수는 개혁이 진행되고 수구가 몰락하면 한국의 참된 보수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오늘날 개혁 세력의 목표는 기껏 상식과 원칙이다. 수구 세력 주도하의 한국 사회가 워낙 몰상식과 무원칙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식과 원칙이야말로 전형적인 유럽식 우파와 미국식 보수파의 가치이지 않은가? 한홍구 교수는 한국에서 보수가 되살아날 때에야 비로소 보수의 대립쌍인 진보도 제대로 기를 펼 수 있고, 한국 정치는 비로소 좌우의 날개로 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형이다. 지금은 좌우나 보진이 아니라 수구와 개혁 세력의 싸움이다.
보수-진보가 아니라 개혁이다
이명박 정부는 10년 개혁에 대한 반동을 시도 중이다. 수구 세력의 총반격이다. 어쩔 수 없다. 정권을 내줬으니 반동을 각오해야 한다. 개혁은 수구의 적이다. 개혁이 가져올 자기 운명을 감지한 수구 세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치권력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이나 박정희의 유신 개헌 같은 무리수가 그런 전례다. 요즘 진행되는 언론의 재벌화와 인터넷 길들이기 등은 검열과 보도지침을 대신한 “수구여 영원하라”의 정지 작업이다.
수구는 보수나 진보 같은 이념과 가치를 가다듬거나 지킬 만큼 고상한 집단이 아니다. 수구 세력의 행태는 딱 한 가지로 설명된다. 기득권이다. 기득권 유지에 도움만 되면 친일파도 되고 빨갱이도 되고 반공 투사도 된다. 북한도 이용하고 인권도 이용하고 지역 갈등도 이용하고 미·일에 빌붙다가 느닷없이 민족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일관된 가치와 이념이 없다.
그러니 지금 개혁 세력은 진보네 아니네, 좌파네 아니네, 그런 논쟁 벌일 때가 아니다. 참된 보수나 제대로 된 좌파는 개혁이 끝난 다음에 해도 된다. 한 세기 유지된 수구 세력을 10년 개혁으로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수구 세력의 물적 인적 제도적 자원이 워낙 탄탄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개혁 세력의 주제 파악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시대적 과제는 개혁인데 진보나 좌파로 착각하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되는 것이다. 주제 파악이 불분명하면 상황 파악이 안 된다. 그러니까 ‘상생’이니 ‘통합’이니 하는 이상한 소리들이나 하고 있었던 게지.
그래서 지금은 지금 좌우나 보진 따질 때가 아니다. 따진다고 결론이 날 것이라면 벌써 났을 것이다.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견강부회들을 시도할수록 수구의 개혁은 지연된다. 지금은 보수적으로 보이든 진보적으로 보이든 수구의 묻지마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상식과 원칙을 회복하는 개혁을 이뤄내야 하는 시기다.
ⓒ 평미레/seoprise.com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8591
'청량한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토론방에 이런 글이 대문으로 걸려 있다니(펌글) (0) | 2009.04.16 |
---|---|
'아니면 말고'와 '명예훼손 불가' (0) | 2009.04.13 |
보라!이 파렴치한 조작일보에 행태를!꼭 우리세대에서 끝냅시다! (0) | 2009.04.04 |
어제는 한국축구의 치욕의 날이었읍니다 (0) | 2009.04.03 |
국경없는기자회가 목격한 한국의 참담한 언론상황 (0) | 2009.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