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청년에게 꿈을

수능을 망친 그대에게 전하는 지리학자의 마법

pulmaemi 2014. 12. 6. 18:06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으로 표기) 결과가 발표되었다. 평생 따라다닐 학벌을 좌우하는 전국단위시험이 갖는 긴장감에 시험당일 수험생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마음을 졸인다. 시험을 잘 치룬 수험생은 해방감이 크겠지만, 예상보다 시험을 못 본 수험생은 후회와 자책감으로 고통스럽다. 기대보다 낮은 점수를 받아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이나 학과를 지원하게 되면 '합격을 해도 실패자'인 것 같은 찜찜한 마음에 대학 생활을 제대로 즐기기도 어렵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국가수준의 각종 평가업무를 담당하는 연구원으로 일하며 경직된 선다형 문항 평가의 한계를 절감했다. 매년 되풀이 되는 수능문제 오류를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는 교과서보다 더 넓고 역동적이며, 세상 속 문제는 수능 문항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실제로 창조적 인재들 중에는 학교교육을 벗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은 국졸이었고 문화대통령 서태지 역시 공고 중퇴생이었다. 창조경제의 중심지로 주목받는 영국도 예외가 아닌데, 존 레논을 비롯한 비틀즈 멤버들,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 버진그룹 창업자 리차드 브랜슨, 세계적인 동물학자 제인 구달 등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모두 너무나 대단한 인물들이라 자신과 동떨어진 사례로 느껴진다면, 해리 포터로 유명한 J. K. 롤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가난한 미혼모의 성공 신화만 과장되게 알려져 있지만 원래 롤링은 영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웨일즈와 가까운 잉글랜드의 전원 마을에서 성장했다. 고교 재학시절 여학생 대표를 할 정도로 학업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었던 롤링은 집에서 가까운 명문대학 옥스퍼드에 지원한다. 하지만 영국판 수능에 해당하는 A레벨 시험을 망쳐 옥스퍼드 대학에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점수에 맞춰 엑스터 대학에, 학과마저도 어머니의 취향을 반영하여 불어를 전공한다.

대학 시절 전공과는 관련 없는 책을 읽고 괴짜 친구들과 어울리며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던 롤링은 이후 취업도 연애도 잘 안 되는 암울한 청춘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펑키한 그래피티와 예술가들이 많은 런던 동부에 입지한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서 일하며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우고 바쁜 직장 생활 틈틈이 시간을 쪼개 계속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런던에서는 도저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그녀는 우울한 대도시를 떠나 영국인이 선호하는 남유럽의 관광지로 이주한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포르투갈에서 영어 교사를 하면, 글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하지만 포르투갈에서의 생활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고, 특히 성급한 결혼으로 그녀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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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J.K. 롤링이 근무했던 런던 동부의 국제사면위원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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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영국인이 휴양지로 선호하는 남유럽의 포르투갈 풍경

하지만 롤링이 수능을 망쳐 옥스퍼드 대학에 떨어지고 방황한 것이 결국은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롤링이 해리 포터의 등장인물을 닮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상상력을 기르고 책을 쓰기 위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었기에 컴퓨터 게임에 빠진 전 세계 어린이들이 다시 책을 읽는 놀라운 마법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만일 그녀가 성공을 향해 돌진하는 명문대 엘리트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학점과 스펙을 쌓는데 열중하고 보수적인 어머니의 바램대로 법률회사 비서로 취직했다면 영국의 창조경제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 '해리 포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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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런던 킹스 크로스 기차역의 해리포터 관광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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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런던의 해리포터 기념품점에서 행복한 소녀

원래 영화 해리포터는 거대한 할리우드 자본의 투자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미국에서 촬영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J.K.롤링은 돈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영국출신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와 손을 잡았고 주연배우 캐스팅에서 영화 로케이션 장소 선정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제작 및 촬영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영국에서, 영국인에 의해, 영국을 위해 제작된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들은 전 세계에 자연스럽게 홍보되었다. 탄광도시로 쇠퇴의 길을 걷던 덜함 등 그 동안 개발에서 소외되었던 잉글랜드 북부 도시들이 해리포터 영화 덕분에 관광객이 급증했고, J.K. 롤링이 해리 포터를 완성했던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북부 하일랜드의 오지 산간 마을까지 덩달아 유명해졌다. J.K. 롤링의 지리적 상상력 덕분에 해리 포터의 마법은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동안 외국 유학생 모집이 힘들었던 영국의 기숙형 사립학교의 지원율까지 높이는 효과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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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해리포터 영화의 배경지로 유명해진 덜함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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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옥스퍼드 대학의 해리 포터 영화관련 장소

흥미롭게도 옥스퍼드 대학을 정식으로 다닌 일이 없는 JK롤링은 옥스퍼드 대학에도 크게 기여한다. 해리포터 영화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식당으로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건물이 등장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부유했던 이 칼리지는 단숨에 지역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된 것이다. 이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졸업식에서 명연설까지 했으니...그녀는 이제 명문대학에 대한 한은 다 풀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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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해리포터 기차가 달리는 스코틀랜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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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해리포터 기차에서 지도를 보며 지리적 상상력을 기르는 꼬마

부끄럽지만 마지막으로 고백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20여 년 전 고3 수험생이었던 나는 평소보다 시험을 잘 보지 못했고, 원래 가고자 했던 과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2지망으로 지리교육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 내내 '내 원래 실력보다 낮은 학과에 다니고 있다'는 열등감에 시달렸고 지리학 공부에 열중하기 보다는 밖으로만 나돌았다. 하지만 실수로 가게 된 학과가 나에게 딱 맞는 전공임을 뒤늦게 깨달았고, 지금은 문화지리학자, 동남아 지역전문가로서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수능을 망친 그대의 앞길에 펼쳐지는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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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행복한 문화지리학자의 삶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던 글을 중심으로 사진과 함께 다시 작성했습니다.

 문화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허핑턴포스트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