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우리 반에 느린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성격이 착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지만 공부는 너무나 어려워했다. 놀이 규칙을 잘 이해하지 못해 보이는 일도 있었지만 열심히 같이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몇몇 반 친구들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 굼떠 보이는 이 아이를 놀리며 따돌리기 시작했다. 느린 친구를 위한 수업시간은 없었다. 선생님은 무심해 보였다. 느린 친구는 점점 느려졌다.
최근 서울시가 주관한 글로벌사회적경제포럼(GSEF)의 사회성과연계채권(SIB) 세션에 참석했다가 문득 그 친구를 떠올렸다. 한온교 서울아동공동생활가정 지원센터장의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한 센터장은 '경계선아동'들을 돕기 위해 사회성과연계채권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은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없는 5~7명의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가정형 시설이다. 대규모 시설보다 훨씬 가정에 가까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만들고 운영하는 곳이다.
한 센터장은 그 아이들을 오래 지켜보면서 상당수가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지적장애아동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성장 가운데 특정 시기에 보호자들이 적절하게 개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학문적으로는 '경계선아동'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지능이 약간 낮은 상황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학습부진이 이어지면서 정서불안과 겹쳐지면서 상황이 악화하기 쉽다.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군대에 가면 관심병사가 되기도 한다. 성장과정에서 지적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룹홈 운영자가 왜 '사회성과연계채권'이라는 복잡한 사회적금융제도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이 제도는 정부가 외부에 사업을 위탁하며 그 성과에 따라 위탁대금을 지급하게 만든다. 그룹홈 운영 결과 경계선아동의 지능을 몇 년 간 잘 관리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면 더 많은 위탁대금을 지급하고, 결과적으로 일정 수준 아래로 지능이 떨어진 아동이 많다면 적은 대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성과보상을 하니 민간투자자를 모을 수 있다. 투자자는 미리 그룹홈이 운영될 수 있는 재원을 제공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사회적 성과, 즉 이 경우 아동의 지능이 높아진다면 높은 투자수익을 거두게 된다. 반대의 경우라면 손실을 볼 수도 있다.
잘만 운영되면 사회단체는 재원확보를 할 수 있고, 정부는 성과중심 행정을 할 수 있고, 투자자는 사회문제 해결에 투자할 기회를 얻는 제도다.
사회성과연계채권은 크게 보면 사회적 성과를 측정하고 보상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은 신간에서 '사회진보크레디트' 도입을 주장했다. 이 역시 사회적 성과를 측정하고 보상하는 사회적 투자의 맥락에 있다.
문제의식은 이렇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 성과를 내느라 경제적 성과 면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시장에서 처음부터 뒤쪽 출발선에 서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사회적 성과는 사회 전체의 편익으로 남는다. 하지만 경제적 성과의 압박이 압도하기 마련이라 사회적 성과는 점점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게 보통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기업이 내는 사회적 성과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자는 주장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성과의 정확한 측정이 필요하다.
더 크게 보면 경제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삶의 질 전반을 측정하고 그에 맞게 정책을 운용하자는 유엔의 인간개발지수나 행복GDP 등도 맥을 같이 한다.
평가하기 어려운 영역을 지나치게 측정하고 평가하면 오히려 그 영역이 위축된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에서 떠들썩하게 준비 중이던 사회성과연계채권은 의회에서 발목을 잡혔다. 몇몇 의원들의 문제제기 탓이다. 비영리사업에 대한 '측정'과 '평가'를 한다는 일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갑래 한국자본시장연구원 실장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사회성과연계채권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다만 평가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사회적 성과를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영역에서라면 측정과 평가는 분명 성과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정부에게는 현명한 예산 지출을 가능하게 해준다. 비영리기관에게는 성과를 향상시키는 동시에 기부자 설득 도구를 제공한다. 민간 기부자들에게는 자신의 기부가 세상을 더 크게 바꾸는 데 사용되도록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느리지만 착했던 옛 친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겪지 않을 수도 있었던 불행을 그에게 겪게 만든 것은 아닐까. 다른 아이들의 따돌림을 힘으로 막을 용기까지는 내지 못했던 나는 뒤늦게 미안하다.
혼자 용기를 내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함께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만약 학교든 시민단체든 누군가가 그 친구의 지능을 측정하고 향상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투자를 받으며 처음부터 지켜보고 격려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적 투자는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 중 하나일 수 있다.
* 이원재의 블로그 www.leewonjae.com에 더 많은 관련 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