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09-03-13)
변호사 노무현은 몸에 통증을 느낀다. 원인을 알 수 없다. 고시에 패스하여 ‘화려한 요트’까지 마련했지만, 통증은 웬일인지 가시질 않는다.
부림사건을 변호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길로, 그리고 6월 항쟁 때는 직접 거리로 나섰지만, 전두환에게 명패 던지고 삼당 야합에 맞서 혼자서 “이의 있습니다!”를 외쳐보지만, 통증은 조금밖에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가 이 땅의 모든 정치꾼들이 ‘자살’ 행위라며 두려워하는 두 가지 - “우리가 남이가” 땅에서 호남 이미지 당 간판으로 출마하고, 조선일보를 글자 그대로 찌라시라고 부른 것 - 를 결행하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을 즈음에는 그 고통은 말끔히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는 영호남이든, 좌우든 뭐든 관계없이 누구나 토론, 참여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마련하고자 했으나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이 낯선 실험에 대해 모두 불편해하고 두려워했다. 진보들마저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동안 익숙한 권력질에 방해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끄러웠다.’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수준이 노무현을 따라가지 못해서였거나, 아니면 그가 너무 욕심을 부렸거나. 실험은 실패한 듯 보였고, 그는 ‘묻지 마’들에게 희생됐다. 그래서 그가 치유해내고자 했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노무현 시대는 누구나 말할 수 있었고 쓸 수 있었다. 의사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터부가 사라졌고 엄숙한 권위로 포장된 말들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이명박이 덜컥 등장한 후 뒤늦게 깨닫고 있는 그 ‘좋았던 시절’로부터 사람들이 물려받은 것은, 자기 판단과 책임으로, 저들의 거짓말을 밝혀내고, 미친 속도전을 막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성지순례쯤은 아무렇지 않게 다녀올 수 있으며, 아류 이명박 정도는 도시 무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참여 내지 저항 ‘정신’이다.
뭐라 부르든, 아무튼 그때 배운 그 정신은 오늘날 촛불로 현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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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메드 파샤 소콜로비치는 고향 세르비아(기독교)에서 이스탄불로 끌려왔지만 이후 오스만트루크 제국(이슬람)의 실력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왜 보스니아의 촌 동네 비쉐그라드에 <드리나강의 다리>를 놓게 되었는가? 그 역시 고통 때문이다.
고향과 부모를 등지고 어린 인질이 되어 나룻배로 그 강을 건널 때, 파샤는 몸 한 곳에 ‘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그것은 그가 커서 성공한 후에도 계속된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그 통증을, 발칸 땅을 갈가리 갈라놨던 갈등과 불행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파샤는 이것을 없애기 위해 거기에 튼튼하고 운치 있는, 아름다운 아치 다리를 놓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리를 짓는 데 숱한 난관과 진통이 따르고, 비쉐그라드 사람들은 인종과 종파를 가리지 않고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들은 파샤가 어찌하여 이 새로운 실험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
그런데 1516년 다리가 놓이자마자 비쉐그라드를 오랫동안 짓눌러왔던 질곡이 마침내 떨어져 나가고, 사람들은 다리를 엄청 좋아하고 애용하게 됐다는 것.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들, 이슬람교도들, 기독교도들, 유대인들, 즉 대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다리가 뚫리던 날, 함께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다리 중간에 만들어진 광장(카피아, sofa)에서 서로 섞인다. 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 메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보스니아 비쉐그라드). 중간에 카피아가 보인다. |
다리에 눈과 귀와 입이 모인다. 모여 소통함으로써 어떤 현상에 대해 바람직한 해석들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다리가 있다는 것 자체, 광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체로 비쉐그라드의 운명과 성격이 바뀔 참이다! 역병이 돌고 전쟁 시에만 통행이 제한될 뿐 이 다리에 대한 접근은 항상 자유롭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사람들은 이 다리를, 당연하게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 양 익숙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잊게 된다. 다리가 얼마나 위대하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 애써 무시된다. 파샤도 이스탄불에서 반대파가 보낸 자객의 칼에 쓰러진다. 그러나 비쉐그라드에 고난이 닥칠 때마다, 새삼 다리는 그 소중함을 한껏 드러내고 파샤의 정신은 다시 인구에 회자된다!
어느 해 대홍수로, 그동안 다리 덕택에 쌓아온 모든 것이 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좋았던’ 시절이 끝나고 절망이 덮쳤다. 이 순간, 흙탕물과 충격에 잠긴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상처하나 없이 멀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리와 카피아 뿐이었다.
이것과 함께 비쉐그라드 사람들 사이에서는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쑥 솟아올랐다. 그제사, 사람들은 그들이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이 어떤 정신을 체득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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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떠난 자리에도 민주주의를 외상을 빌린 천박한 이명박들이 삽으로 무장하고 홍수처럼 몰려왔다. ‘좋은 시절’을 경험해봤던 사람들에게 진짜로 오랜만에 - 한 십 년 되나?? - 겪는 절망이었다.
주구를 자처한 권력기관들은 엄숙한 담화문을 다시 쏟아내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돌격대들에 망루 속으로 몰리면서 천민 내지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다. 검역주권 돌려달라며 거리에 나선 국민들을 그저 폭도라 불렀다. 회유와 공갈, 협박이 범람했다.
저항의 수단이 필요했다. 마침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노무현 때 보고 듣고 배웠던 것은, 거창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공개적으로 크게 외치는 것, 짝퉁을 구별해 낼 수 있는 비판적 눈을 가지고 대문짝만 하게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때 배워놓지 않았다면, 조중동-이명박들의 말들이 지금쯤 ‘정론’으로 대접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때, 광장에서 소통하고 직접 참여하는 즐거움을 익혀놨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명박들의 미친 질주에 촛불을 들 생각이나 과연 했었을 것인가. ‘이명박, 조중동 타도’를 크게 외칠 수 있었을 것인가. 겉으로 보면 번지르르한 이 절차적 ‘민주’ 정권에서?
이명박들은 지금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준법’이니 ‘법질서’니, ‘법치주의’라는 말이 입에 밸 리 없다. 자기들의 실체가 여지없이 폭로된다는 것, 자기들의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었고 앞으로도 나올 거라는 것, 저들에게 큰 충격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쩌랴, 국민들은 되지도 않는 질서에는 순응보다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이 상황에서 이명박-조중동들이 다른 무엇보다 미디어에 목메는 것은, ‘갱제위기’를 핑계로 최근 미디어법의 최종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다수결’을 들이대면서 악법을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도, 놀라운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니 여론이니 뭐니 하며 눈치를 보면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저들에게 미디어의 장악은, 우아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미디어를 손아귀에 쥐고 친일파, 빨갱이, 폭도, 테러리스트 등등에 대해서 자기들만이 규정하려는 것이다. 저들의 권력은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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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상생, 타협 등등 다 좋은 말들이지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엄연히 따로 있다.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 입과 귀를 막고 눈을 막는 것은, 진짜 민주주의에서는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세금을 착실히 내는 공화국 시민들이 왜 할 말, 못할 말 할을 가려야 하며, 보라는 것만 보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서 눈치 봐야 하는가.
쓰나미가 밀려와서 다른 것 다 쓸려가더라도, 어떤 경우라도, 소통의 다리와 참여의 광장, 미디어가 막혀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제대로 된 소통의 도구는 가져야 되지 않겠나. 100일 후에도 이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조중동들의 MBC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보라. ‘묻지 마’ 애독자들은 벌써부터 “MBC는 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고 뉴라이트는 ‘광고금지’ 운동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나. 지금부터 이럴진대, 미디어법이 표결 통과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지 않은가. 민주당, 당신들에게 하는 말이다.
1914년, 드리나 강의 다리는 파괴된다. 시간이 지나자 인간들은 참을 수 없는 천박함을 기어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4백 년 동안 꿋꿋이 보스니아 땅을 아물게 했던 다리에, 만족을 모르는 거대한 식탐과 파괴의 그림자가 닥쳤다. 다리는 전쟁으로 폭파됐다. 그리하여 한때 함께 축제를 즐겼고 말을 섞었던 사람들은 인종과 종교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진보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인간들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그렇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발칸반도에 참극이 불어 닥칠 것은 불을 보듯 했다. 실제로, 보스니아 땅에서는 유례없는 ‘인종청소’의 비극이 터졌다. 그때가 1992년이다. 문명은 고스란히 후퇴했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통증을 치유할 유일한 처방, 소통이 폭파됐기 때문이다.
(소설 <드리니강의 다리>의 주인공인 이 다리는 1516년 메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 다리의 실제 이름이기도 하다 - 의 지시로 세워졌으나 1914년 제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파괴됐다. 여기까지는 소설 속에도 나오는 것인데, 그 후의 역사가 궁금해 찾아오니, 놀랍고도 안타깝게도, 그 후에 복구된 비쉐그라드의 이 다리에서, 바로 다리의 광장 카피아에서 1992년 그 악명 높았던 보스니아인들과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 세르비아인들의 - 대량 인종청소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1914년에 <드리나강의 다리>는 영원히 붕괴되었던 것이다.)
▲ 다리의 중심 카피아(소파). 1992년은 참극의 장소였다. |
우리가 가진 유일한 저항수단 내지 처방, 그것을 넋 놓고 빼앗긴다면 지금도 삽질로 고통 받는 이 땅에 뭐가 남아나겠는가. 다 무너지고 쓰러지더라도 다리와 광장만은 건재해야 한다.
“다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위대한 젊음을 지닌 채, 인간이 만들어놓은 위대하고 선량한 것으로, 늙는다는 것과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채…. 이 세상의 온갖…. 운명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그대로 서 있었다….”(이보 안드리치, <드리나강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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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3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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