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연속극 끝났는데… 노 전 대통령이 ‘사람사는세상’에 올린 글 전문.

pulmaemi 2009. 3. 6. 14:07



연속극 끝났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가 말을 건다.

“당신 조금 전에 뉴스에 나왔어요. ‘정치하지 마라.’ 이런 글 올린 모양이지요? 정치 재개하나? 이런 말도 나오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도 나오던데요?”

“현실정치 이야기 한마디도 안 했는데? 정치는 무슨 정치요? 공연히 시비들이야.”

그랬더니 아내가 다시 받는다.

“연속극 하나 끝나고 새 연속극하고 있는데, 자꾸 지난 연속극 주인공이 나오니 사람들이 짜증 내는 거 아니겠어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생각해 보니 나는 연속극에 나간 일이 없다.

“아니, 연속극에 나가기는 누가 나가요? 언론이 자꾸 나왔다고 쓰니까 사람들이 헷갈리는 거지.”

사실 그동안에도 글을 여러 개 올렸으나 현실 정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하지 말란 법도 없지만 정치한다는 소리가 욕처럼 들려서 그랬다. 그런데도 내용에 불구하고 글만 올리면 정치 재개란다. 앞으로 문밖에 나가면 그것도 정치재개라 할 건가?

글을 안 쓰면 될 일이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닫지 않는 한 회원들에게 인사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참 힘들다. 감옥이 따로 없다. 푸념이 아니다. 우리 기자들 참 큰일이다.

2009년 3월 5일
노무현


관용은 용서와 다릅니다.

‘민주주의와 관용과 상대주의’라는 저의 글을 읽고 많은 분들이 촌평을 올려 주셨습니다. 그중에는 관용을 용서, 포용 등의 뜻으로 이해하고 반성과 사죄가 없는데 용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글이 있었는데, 저도 그 글을 읽고 감성적으로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서는 제가 말한 관용의 의미를 다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관용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합니다.

우선 관용이라는 말의 의미가 용서나 사면이라는 말과는 다르다는 점과, 관용의 역설, 관용의 한계 등에 관한 말씀을 덧붙이겠습니다.

우리말 사전에는 관용이라는 말이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정의는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온 말.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이렇게 되어 있고,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권위적인 명령에 의한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 ‘어떤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용납하는 것’ ‘국가의 정책으로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양의 관용이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관용’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 말에 대한 사전적 해석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아마 관용이라는 사상을 접하고 다룬 역사와 문화가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해석을 따라야 할까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관용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 뜻을 서양 사전에 나온 해석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용은 용서나 자비와 같은 일방적 호의와는 다르고, 지배자의 통치 기술로서 사용되는 은사나 포용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한 관용이라는 말은 누구를 용서하고 안 하고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나온 김에 관용의 역설과 한계에 관하여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관용을 극대화하면 관용의 사상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을 방관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절대주의 사상을 용납하여 민주주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치스에 무너진 것이 바로 그런 역사의 사례입니다.

그래서 전후의 독일 헌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에 대하여는 관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에도 비슷한 조항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의 한계, 내지 상대주의의 한계인 것이지요.

그러나 만일 이것이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면 이들 자유를 심각하게 위태롭게 하여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상을 제한하는 경우에도 생각이나 말만으로는 처벌할 수가 없고, 행동의 경우에 한하여, 그것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험’이 있을 때 한하여,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한계에 다시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국가 보안법은 바로 이 한계를 벗어나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악법인 것입니다.

다시 김수환 추기경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일전에 제가 올린 글은 그분이 민주주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 한 보수적 견해를 말씀하셨다 하여 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보수적 견해도 그에 대한 비판도 ‘다름’으로 존중이 되어야 하는 것이 관용의 원리이나, 비판은 논리로 해야지 인격에 대한 공격이어서는 관용의 자세라 할 수 없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국가보안법까지 옹호한 발언을 하셨다는 내용을 보고, 그분마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참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저는 김용환이라는 분이 쓴 ‘관용과 열린 사회’라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책을 보면 유네스코는 1995년을 ‘세계 관용의 해’로 선포하고 그해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 28차 총회에서 ‘관용에 관한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관용이라는 것이 제가 위에서 소개한 뜻풀이 수준보다 훨씬 깊고 넓은 가치와 역할을 가진 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용에 관한 교육에 관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유학생 수학도가 올린 ‘노공이산님 글을 읽고’ 내용 중에 있는 추천 글 ‘왜 시민민주주의인가?’라는 글 중에 있는 다음의 대목은 눈여겨 볼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결국, 프랑스와 독일이 공통적으로 도달하게 된 시민교육의 원칙들을 다시 보자.

현재 정치 상황을 분석할 때 학생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독일) vs 스스로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시민 의식을 체득한다 (프랑스)

시민교육에서 교화와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다 (독일) vs 시민 의식은 다른 과목과는 달리 지식의 전수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2009년 3월 5일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