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을 것이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르바이트 하기도 힘든 아픈 몸과 풀리지 않는 시나리오,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한 영화에 대한 꿈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현실에서 자존심을 굽히고 ‘밥과 김치’를 이웃 주민들에게 구걸하게 된 고은이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뒤늦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눈물겹다.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살고자 했다. 그렇게라도 버텨서 꿈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동료들이나 가족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들이 (시나리오 작가 일을) 반대한다면? 아파서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면? 갚지 못할게 뻔한 돈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에게 신세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면?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왜 꿈과 생존을 비교당해야만 하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너무 좋지만, (먹고 살) 자신이 없어서 섣불리 선택하지 못하며 영화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누군가 영화를 전공하겠다거나 공부하겠다고 하면 신중하게 판단할 것을 얘기한다.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어떤 분야에 있어서나 신중해야하는 문제다. 그것은 선택한 사람의 몫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존’은 굳이 헌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순제작비 기준 25억원(영진위, 2010년)이다. 정부는 컨텐츠에 대폭 투자를 공언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장인력들의 처우 개선으로 이어질까?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열망을 착취하는 현실이 사라질까?
생존이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하나
고은이의 죽음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은 물론, 그녀를 가르쳐서 세상에 내보낸 학교, 주변 사람들도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그 죄책감의 범위는 더욱 넓어져야 한다. 그들은 소중한 가족을 잃은 것으로, 동료를 잃은 것으로, 친구를 잃은 것으로 충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꼭 영화 뿐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꿈과 생존이라는 부조리한 선택에 직면한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왜 이 나라에선 죽음을 담보로 꿈을 꾸어야 하는가. 영화를 하더라도, 청소를 하더라도, ‘생산성’이 제로에 가까운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적어도 몸이 아파서, 굶어서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주변을 직접적으로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 뿐 아니라 왜 이런 사회적 시스템을 방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죄책감 또한 아울러 느껴야 한다.
필자 황정현과 고 최고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선후배 사이다. 2006년 ‘잔혹한 출근’으로 데뷔한 김태윤 감독의 한예종 졸업작품 ‘그녀는 좀비’에서 황정현은 조명을, 고 최고은은 조연출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