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개곰 / 2010-12-27) ▲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고 보고를 듣고 있다. 2005년 7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은 그달 말로 잡힌 제4차 6자회담과 하반기 남북관계 추진방안을 놓고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틀 앞서 10일에는 외교부, 국방부, 국가정보원 등 정부 각 부처에서 파견된 국가안전보장회의 산하 사무처 요원을 중심으로 실무대책회의가 열렸다. 다음 날인 11일에는 고위전략회의가 열려 쟁점 사항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12일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렇게 실무를 정확히 꿰고 있던 전문가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분석한 내용을 보고받고 대응전략을 확정 짓는 자리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는 국정원장, 국가안보보좌관, 통일부장관, 국방부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석했지만 이들 각 부처 수장들이 고도의 분석력과 종합력이 요구되는 국가 정책을 당일 모여서 백지상태에서 논의하고 결론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산하 사무처 소속 전문가들이 정책 결정권자를 위해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고 작성한 치밀한 보고서와 정책 대안이 없었더라면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부처 간 갈등만 낳고 원칙론과 일반론 수준의 미봉책을 내놓는데 그치는 엉성한 회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외교부, 국방부, 국가정보원 수장들의 대북 강경론과 한미 혈맹론에 대통령 혼자서 외롭게 맞서야 하는 자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핵은 1년에 한두 번 열리던 회의가 아니라 1년 365일 24시간 동안 국가안보를 놓고 고민을 하던 사무처 소속의 전문가들이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제1차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갖고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참여정부 시절 미국을 상전으로 섬기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국의 기형 보수세력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과거의 독재정권과는 달리 노무현 정부는 미국이 자국 국익을 관철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들이민 요구를 호락호락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미국의 이라크 전투병 파병 요구도 병력을 비전투지대로 파견하는 선에서 막아냈고, 북한의 급변사태를 가정한 위험한 침공훈련 작전계획 5029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요구도 전시작전권이 없는 상황에서 위험한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거부했다. 미국은 얄미울 정도로 한국의 국익을 챙기는 국가안전보장회의, 특히 사무처라는 상설 조직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언제나 미국의 이익을 알아서 먼저 챙겨주는 이명박 정부는 아니나 다를까 집권하자마자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를 없앴다. 그리고 2급 행정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위기정보상황팀만 달랑 남겨두었다. 그러다가 2008년 금강산 관광객이 총에 맞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늑장 보고를 받고 허둥지둥하다가 위기정보상황팀을 외교안보수석 산하의 국가위기상황센터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올해 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해군 준장을 센터장으로 하는 국가위기관리센터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더니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자 또다시 국가위기관리실로 이름을 바꾸고 별도의 수석을 두기로 했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가위기를 종합적으로 관리해야 할 조직의 이름을 이랬다저랬다 바꾸면서 우왕좌왕했다. 그리고 결국 이름만 다르지 참여정부 때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나 다를 바 없는 조직을 되살렸다. 3년 동안 ‘노무현 때려 부수기’에만 열중하더니 결국 나라 안팎으로 온갖 망신을 당하고 나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김태효 청와대 전략비서관은 국가위기관리실 신설 방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 기자가 참여정부 당시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조직으로 돌아온 셈 아니냐고 묻자 헌법에 국가안전보장회의 규정이 있지만 사무처를 둬야 한다는 법령은 없다면서 마치 참여정부가 사무처를 불법으로 운영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헌법 91조 3항을 보면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조직, 직무범위 기타 필요한 사항을 법률로 정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니까 참여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내실 있게 운영하는데 필요한 상설 조직으로 ‘사무처’를 만들어 헌법의 규정을 구체화한 것이고 이명박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이것을 없앴다가 상설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뒤늦게 다시 만든 것이다. 사무처도, 국가위기관리실도 이름만 다를 뿐이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상설조직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원래 미국에서 2차대전이 끝난 뒤 국가정책을 효율적으로 조율하고 비대해진 군부를 문민통제 아래 두기 위해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헌법으로 보장된 국가 조직이지만 국민의 정부 때 비로소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실질적으로 가동되었다. 이전 정권은 군인정권 아니면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붙들면 국가안보가 해결된다고 믿는 문민정권이었으므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고졸 출신의 두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한국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자주적 국가안보 추진의 구심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한국을 이끌어온 대졸 엘리트 집단이 얼마나 외세 의존적인지를 드러낸다.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국가 위기관리의 구심점으로 삼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와서 비로소 한국은 독립국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의 흔적을 지우려고 없앴던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설 조직만 되살린 것이 아니다. 국정홍보처를 폐지하고 청와대 홍보수석을 없앴다고 기염을 토하더니 촛불 시위를 겪고는 홍보기획관으로 부활시켰다. 총리가 국정을 책임지고 끌어나가던 참여정부와는 달리 총리 산하의 국무조정실과 총리비서실을 통폐합하고 사정 기구도 없애면서 총리를 격하시키고 국정을 대통령으로 집중시키더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혼자서만 욕을 먹으니까 슬그머니 총리 주재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주례화 하고 총리실 아래 두었던 정부합동점검반도 공직윤리지원관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막상 해보니까 꼭 필요한 기능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MB 정부 ‘이랬다저랬다’… 폐지했던 NSC 사무처 슬그머니 부활
MB 집권 후 폐지와 부활의 부침을 겪은 NSC… 왜?
▲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헌법이 보장한 조직 ‘NSC 사무처’
원시인(遠視人), 원시인(原始人)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은 끝까지 생각한 지도자였다. 끝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일의 논리적 귀결을 치밀하게 생각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경우의 수와 그 대응책까지도 꼼꼼히 마련해둔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이 벌였던 일에 MB 정부가 가래침을 뱉었다가 자기가 뱉은 가래침을 제 입으로 도로 핥아먹어야 하는 처지로 자꾸만 몰리는 것은 그래서다.
노 대통령은 끝까지 생각할 줄 알았기에 연평도 교전이라는 불상사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공동어로구역과 개성공단을 만들어 분쟁구도를 항구적 평화구도로 바꾸려고 애썼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미국의 위험한 작전계획에 동참하지 않고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으려고 애썼고, 그러면서도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자본주의의 안정된 발전을 위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다. 설령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무국경 자본주의 구도 아래에서는 자유무역협정은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안다.
노무현 대통령이 ‘끝까지 생각한’ 이유는 자기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임을 예감하면서도 이라크 파병에 동의한 것도 북핵 위기 상황에서 미국과의 마찰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들이 떳떳하지 못한 전쟁에서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끝까지 비전투원 파병이라는 원칙을 지켜냈다. 자유무역협정도 좋지만 협상대표단에게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고기 수입을 미국이 무리하게 요구할 경우 협상 중단을 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린 것도 국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아니라 국민과 겨레의 안위를 위해서 끝까지 생각하고 멀리 내다본 원시인(遠視人)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사익을 위해서만 끝까지 생각했고 자신은 철통 같은 지하벙커에 몸을 숨기고 연평도 주민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반도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또다시 연평도에서 대포를 쏘아댄 지금 대통령과는 정반대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시인(原始人)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우면서 바늘구멍 같은 사법시험의 관문을 통과하여 변호사로서 겨우 자리를 잡고 가족과 오순도순 살아가던 ‘노무현’이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권력에 고문을 당한 젊은이의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한 ‘변호사 노무현’은 멀쩡한 젊은이가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는 생지옥에서 다시 혼자 탈출할 수 없었다.
노무현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정치라는 생지옥의 길로 뛰어들었고 생지옥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거기서 탈출하지 않았다. 노무현은 원시인이었다. 끝까지 내다보고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던 이중의 원시인이었다.
개곰
※ 편집자 주 - 이 글은 노무현재단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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