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49 재에 부치는 글, 노대통령의 유산

pulmaemi 2009. 7. 6. 13:45

 

49재에 부쳐, 노대통령의 유산(遺産)
(서프라이즈 / 요한3장3절 / 2009-07-03)


가신 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나?

 

한 동안 멍하게 지냈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일은 손에서 떨어져 있었다. 공황 상태란 바로 그런 느낌이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고작 한 ‘정치인’의 죽음이었다. 정치 혐오의 시대, 정치 경멸의 시대, 정치 기피의 시대다. 대한민국의 이 시대적 공간에서 정치가란 최악의 사기꾼이거나, 잘 봐줘야 자영업자와 동급인 자들이다. 술자리에서 쌍욕을 섞어가며 씹어 돌려야 하는 대상이며, 결코 존경 받을 수 없을 사악한 존재가 한국의 정치인이라는 족속들이었다. 그런 ‘하찮은’ 정치인 중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데 왜 나는 이토록 당황하고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을까? 마치 내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처럼 말이다.

 

쉼 없이 질문을 했었다.

 

그래서 대체 나는 무엇을 잃었지? 없다. 재산상의 피해도 없었고, 정신적인 피해 역시 없었다. 혹시…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하는 거였나? 왜? 내가 뭘 미안해 해야 하는데? 아니면, 혹시 나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인가? 내 주제에? 웃긴다. 농담하나? 그러면, 애석하고도 아깝다고 생각했나?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매우 설명력이 약하다.

 

이런 최악의 상실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이 슬픔과 분노의 근원이 뭐냐? 나는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가? 억울했다. 그런데 뭐가 억울했을까? 왜 바로 그날에, 그 황금 같은 휴일 날 내 생돈을 써가면서, 피 같은 시간을 들여 촌구석 봉하까지 내려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런데, 더욱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왜 나와 같은 사람이 이토록 많았던 것일까? 이 핍박 받는 초라한 상갓집에서 뭘 바라고 왔지? 여느 초상집처럼 그저 부조하나 하고 슬픈척하며 상주 눈도장 찍으러? 그런데 진짜 눈물이 펑펑 나오더라고… 나이 50이 다 되어가는 놈이…

 

답이 없다? 아니면 사람마다 답이 다르다?

 

이 글은 이 기묘한 현상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답을 찾아가는 탐색이다. 결과는 분명히 존재했으니 그 원인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무수하게 많은 전문가가 이미 답을 내놨다. 거대한 ‘추모’의 물결, 고인에 대한 애통, 고인의 인품과 업적에 대한 우호적 재평가, 그 동안 심하게 모욕했던 것에 대한 반성문, 무심했던 혹은 애써 무시했던, 좀더 솔직하게는 아주 비겁했던,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한 고해성사… 그리고 가신 님에 대한 사모곡쯤이라고 하겠다.

 

이런 저런 사연도 이유도 많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들의 답은 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 동안 미안했다. 사실은 (속으로만) 사랑했다. 이제부터라도 잘하겠다. (그렇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달라. 내 앞날도 생각해야 되지 않겠냐.)’

 

그리하여, 오만한 권력이 휘두르는 미친 칼에 대한 공분, 어쨌든 죽었으니 불쌍한 감정 등등이 종합적으로 얽혀서 집단적인 추모분위기로 이어진 것이라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 애틋한 '감정'들이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을 찾았고, 그 대상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확대재생산 하고 있다는 일의적 결론으로 수렴한다. 지금 이 답들은 정답처럼 모든 사회에 스며들어가고 있다. 이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고인이 남긴 ‘정치적 유산’에 대한 분배문제로 논점과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이야기다. 그렇지? 죽은 사람만 불쌍한 거야.

 

그러나, 필자는 이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서 지독한 불편함을 느낀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그토록 슬펐던 거야? 그… 사람 좋으신 ‘친구 아버지’가 공권력에 억울하게 당했고, 어쩔 수 없이 몸을 던진 상황이 서글퍼서, 그래서 분노했던 거야? 정말 그런 거야? 그건 아니잖아? 이 문제는 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다른 답이 있다고 느낀다. 분명 내 슬픔의 원인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질문이 근본적으로 틀렸던 것 아닐까?

 

나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모든 매체, 모든 사람은 ‘거인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충격적 단어에만 주목했다. 그러나 ‘누가’ 죽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당연해서 그랬다고? 이제 질문을 고쳐보자. 누가 죽었는데? 그들은 어떤 노무현을 가장 죽이고 싶었을까?

 

자연인 노무현? 농민 노무현? 대표 노무현?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대표 노무현이다. 누구의 대표? 그를 세워 자신의 결정을 위임했던 국민들이다. 그 국민이 바로 나였다. 결국 그들은 ‘나’를 죽이고 싶었다. 그에게 위임한 나의 가치, 내 소망, 내 염원 말이다.

 

성실한 대표 노무현은 자신을 죽음으로 던짐으로써 내 가치가 처한 위기의 본질과 그 위기의 수준을 알렸다. 아마 그 방법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유서를 다시 읽어보며 분노를 느낀다. ‘국민의 종’에 대해 자행된 파괴적 압제의 흔적, 선한 머슴의 개인적 고뇌, 그리고 머슴다운 소박한 퇴장. 결국 그는 퇴임 후에도 이 몸의 대통령이 아니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내 불편함의 원인은 아직도 그 지점을 맴돌고 있었다.

“자… 가엾은 종이 주인을 위해 죽음을 당했다. 주인은 슬퍼해야 하는가, 분노해야 하는가?” 

“’미워하지 마라, 원망하지 마라.’ 그건 대체 누구에 대한 당부인가? 주인? 그게 철저한 국민의 종이었던 사람이 주인에게 할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주 띨띨한 주인이라서? 주인이 걱정되어서?”

이제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나를 조문객이 아니라, 상주라고 느꼈다. 그게 답이다.

 

무엇에 대해 분노하는가?

 

필자는 잘난 정치평론가가 아니다. 나는 정치공학 같은 불명확하고 음습한 세계의 논리는 잘 모른다. 그저 어쩌다 생각날 때 인터넷 게시판에 글이나 두들겨대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공학을 전공했으며, 회사 봉급에 목숨 걸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흔한 직장인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소시민들의 속내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 소시민이란 한국 정치의 질곡을 경험했고, 독재를 반대해 왔으며, 작금 언론의 폐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정치라는 분야에 아주 무관심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작지 않은 단서는 붙여야겠다.

 

필자를 포함한 이 사람들은 어떤 집단일까? 정치를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신봉하며,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사표현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해왔던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민주시민’이라고 불렀다. 민주시민은 어리석지 않다. 약하지도 않다. 해방 후 2세대가 지나면서 정치적으로 학습된 사람들이고, 경제적으로 글로벌 차원의 거래를 경험해온 사람들이다. 문맹률 제로, 이 처절한 고도의 지식사회에서 법규의 변경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실시간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영악한 사람들이 유독 정치서비스 시장에서만 소외되어 있었다. 왜? 그들만의 지저분하고 같잖은 리그에 참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알고 있었지만, 해결할 수단도 없었다. 변변한 세력도, 쓸만한 정보도 없어서 그저 정치꾼들이 제공하는 불량 서비스를 소극적으로 걸러내거나, 저항을 했어도 언론에 각개격파 당하는 수준이었다고 하면 정확할까?

 

그러나 1998년 국민의 정부의 등장, 그리고 유무선 네트워크의 보급, 그리고 새로운 경선규칙은 이들을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집단 각성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단세포 생물에서 갑자기 다세포 생물로 진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서 자신들의 대표를 선택했다. 그 역사상 최초이자 위대한 선택이 바로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선수였다. 그리고 민주시민은 최초로 참여한 전쟁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뒀다. 상식과 원칙의 반격이었고, 값진 승리였다. 여기까지가 팩트다.    

 

그래서, 나는 이 민주시민의 등장과 이들의 눈높이에서 보는 관점이야말로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이들이 각성한 이상, 이들이 직접 정치적 견해를 결집하고, 조율하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했던 그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정치 동력을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이어질 ‘후기 노무현 시대’는 결코 제대로 해석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구태 정치 언저리에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언론은 더욱 믿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아는 상식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상식이 짓밟히고 원칙이 훼절되는 것에도 분노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불량품 정치를 다시 끌고 와서 이게 현실이라고 강변한다. 노무현의 죽음을 그저 고귀한 ‘희생’이라고 떠든다.

 

내가 동의할 것 같은가? 이 사람아! 당신들이 지금 밟고 있는 건 내가 서명한 고귀한 ‘계약서’라고! 왜 네가 함부로 내 계약을 무시하는데? 왜 당사자보고 빠지라고 하는데? 화 안 나게 생겼어?

 

그런데,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긴 걸까? 노무현시대와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대는 무엇이 다른가? 민주시민은 어떤 차이를 보았는가? 불과 1년 사이에 이 나라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왜 그 합리와 원칙의 화신, 노무현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까? 마지막까지도 국민의 종이었던 그의 마지막 선택은 과연 합리적이었을까?

 

민주시민이 경험했던 노무현시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영을 하는 내게 있어 노무현시대는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최소한 국민대접은 제대로 받았다고 느꼈다. 쫓겨났던 ‘민주’가 돌아왔고, 시끌시끌한 논쟁이 벌어졌다. 내 이해가 옳다면, 민주주의는 집단의 이해와 철학이 충돌하며 최적의 해를 찾아가는 동적인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의 기본은 토론이다. 시끄러워야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토론 공화국. 정말 제대로 시끄러웠다. 모든 사연들이 수면위로 드러났고, 누가 아파하는지, 누가 반칙을 하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권력이 국민에게 분양되었고, 모두가 자신에게 되돌려진 권력을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마음껏 떠들고, 마음껏 주인의 권력을 행사했다. 대통령도 떠들었고, 국회도 떠들었고, 언론도 떠들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내가 보기엔 없었다. 국가경영은 만족할 만큼 잘 했다. 이런 것은 감이 아니라 오로지 숫자와 데이터로 이야기하는 것이 올바른 상식이다. 내 주장을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통계자료는 차고도 넘친다. 5년 동안 나라 전체로는 엄청난 흑자경영에 국민소득은 두 배로 뛰었고, 저축은 국제사회에서 알부자 소리 들을 만큼 쌓았다.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 평가절상을 고민해야 할 정도의 쌓여가는 경상수지 흑자. 국가와 기업의 브랜드 가치도 선진국의 꼭대기를 바라볼 만큼 뛰어올랐고, 국민은 갑자기 두툼해진 지갑과 함께 민주국가의 떳떳한 가치를 자랑하며 가슴 펴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외교는 6.25이후 가장 안정되어 있었고,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제대로 통제되고 있었다. 그게 노무현시대 5년의 실제 데이터다. 내실과 외치, 내가 아는 한 OECD국가 중 동 기간에 한국만한 성과를 낸 국가는 없었다. 즉 실력으로 일구어낸 성과라는 이야기다. 큰 틀은 그렇게 해석해줘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들이 큰 그림을 가렸다. 꼬투리가 몸통을 잡았다. 치졸한 정치자영업자들, 사악한 언론들, 협잡으로 먹고 살아온 기득권 졸부와 재벌들, 그리고 대통령이 돌려준 권력을 남용하고 싶었던 기관들이 ‘의도된 잡음’을 생산해 냈다. 긍정적 사실은 가려졌고, 부정적 가설은 난무했다. 안타깝게도 노무현시대는 그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대통령과 참모들은 순수했으며, 내가 보기엔 순진했다. 그들은 시스템을 믿었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기나긴 학습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 중에서 조중동을 필두로 한 언론의 역습이 집요하게 감행되었다. 진보성향을 표방하는 신문도 자기 몫을 주장했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 그 무적의 방패 속에서 언론은 의도된 의제(Agenda)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정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언론 권력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정말 사실을 그대로만 보도했어도 나는 씁쓸하나마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다.

 

그러나 언론권력은 최소한의 양심마저 버렸다. 거짓과 왜곡, 침소봉대, 의도된 편집, 가증스런 이미지 조작이 거의 매일마다 데스크에서 자행되었다. 그래, 거기까지도 나는 참으라면 참겠다. 만약 그 보도가 대다수 국민의 권익을 위해 사악한 독재정권과 싸우자는 수단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언론은 그들만의 사익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면 이게 뭔가? 독자를 기만했고, 국가를 오염시켰으며, 국민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명백한 범죄집단 아닌가? 그래서 이 언론들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사기까지 보장해주지 않아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어쨌든 전투의 결과는 민주시민 전체를 좌절시켰다. 대부분의 국민은 그들이 매일 접하는 정보가 얼마나 사악한 뇌와 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수만 가지 사건 사고 중에 하필이면 왜 그 기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 이면의 사악한 의도까지 들여다보지 못했다. 큰 이슈도 없었던 시절, 언론이 떠들면 큰 이슈가 되던 시절, 그 이슈에 반대하는 것조차 이슈를 키워주었던 시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인터넷만이 유일하게 언론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인터넷은 1차 정보를 생산하는 능력이 없었다. 기자가 쓰지 않은 것을 인터넷이 볼 재주는 없었다. 볼 수 있어도 커다란 이슈로 몰고 갈 뒷심이 약했다. 이슈는 선점 당했고, 논점은 언제나 정권의 선한 의도를 좌절시켰다.

 

그렇게 노무현시대는 손쉽게 포위되었고, 고립되었다. 불신은 차츰차츰 쌓였고, 불과 3년 만에 그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최악의 정권으로 굴러 떨어졌다. 거짓을 떠드는 자들의 입에 ‘책임’이라는 재갈을 물리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노무현시대를 만든 민주시민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이윽고 다시 선택의 시기가 왔다. 지독한 무력감이 엄습했다. 선수는 없고, 시민을 위한 무대는 치워졌다. 그 자리엔 다시 정치자영업자들이 ‘정치공학’을 외치고 있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투표를 하며 이를 갈았었다. 싸가지 없는 머슴 새끼들… 그렇게 민주시민의 첫 번째 좌절이 있었다.

 

그러면… 이명박씨가 대통령직에 있는 이 시절은?

 

여기서 이명박씨에 대한 호칭에 대해 불편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나름 해명을 해야 될 것 같다. 아마 이 어정쩡한 표현에 대해 두 군데에서 동시에 욕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은 일국의 대통령에게 그 무슨 결례를 하느냐 할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라고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이명박씨라는 표현을 매우 좋아한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되 대통령이 무엇을 대표하는 자리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 같고,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으니 대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다. 잡범 수준의 화려한 전과기록은 말하기 조차 창피하니 그냥 지나가자. 그러나, 이미 대통령의 책무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마저 무시하며 제 주인을 두들겨 패고 있으니 업무상 배임의 혐의가 매우 크다. 그것도 헌법을 유린하는 현행범 아닌가? 주권국가의 외교적 자존심도 스스로 무너뜨렸고,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 확연한데, 어찌 주인 된 국민 입장으로서 그를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참… 감당이 안 되는 머슴이다. 학습능력도 더럽게 떨어지고…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행동거지가 천박하기로는 그를 뽑은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니.

 

그래서 내게 있어 그는 이력서 사기 쳐서 입사한 견습 사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이다. 내가 견습 사원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 아무개씨다. 별 상관없는 사람을 부를 때도 아무개씨라고 쉽게 쓴다. 굳이 싫다고 쌍욕을 집어넣어 넣어 내 글을 더럽힐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또한, 대통령께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불쾌할 이유가 없다. 그대들은 그 시절 노무현대통령을 부를 때 뭐라고 했었나? 오히려 필자에게 고마워하라. 당신이 그렇게 존경한다는 안창호’씨’와 동급의 대접 아닌가? 안창호 선생님께는 개인적으로 미안하다고 할 밖에.

 

대신 고(故) 노무현 전(前)대통령은 ‘노무현’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미 그 이름은 보통명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너무 길어 생략된 호칭은 ‘영원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이상할 것은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권교체란 당연한 정치현상이다. 이유야 어쨌든 노무현시대가 마음에 안 드는 주인이 많았으니 정권은 교체되었겠지. 토론하고 합의보고 내내 시끄러웠으니 이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힘있게 밀고 나가는 반듯한 권력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아하니 돈도 좀 만지게 해줄 것 같았겠지. 거기까지는 좋았다. 일단 지켜 보자고…

 

그러나, 나는 이 정권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너무 구렸다. 단 몇 달이 지났는데도 온 나라에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인수위부터 시작된 부패와 부정의 행렬, 도무지 깨끗한 사람 하나를 찾아내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내각 인선, 여기에 영어교육, 대운하 등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외계인 정책들. 그리고 준비하고 고민한 흔적이 없는 발언들과 오해, 오해, 또 오해의 행렬들. 거짓을 밥 먹듯이 하는 철면피들. 자기 말을 뒤집는 무책임함.

 

그러나 정치공학자들의 실패는 견제수단마저 의심스런 상대에게 헌납해버렸다. 대통령, 국회, 지자체 단체장, 지방의회가 속속 장악되었다. 언론, 재벌, 졸부, 종교… 소위 가진 자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거대정당이 입법을 장악했고, 사법, 행정이 완전히 저들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구축해온 민주시민의 시스템 해체작업이 시작되었다. 잃어버린 10년. 그렇게 부정과 반칙, 특권과 권위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정권 초기부터 저항이 시작되었다. 소극적 저항. 성숙한 시민의식. 촛불. 상식과 원칙. 시민들은 항상 그래왔듯 그렇게 거리로 나갔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새로운 머슴들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고, 얼마나 다루기 쉬운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는 박정희 18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18년 총 36년간 모든 형태의 저항을 다뤄왔던 바로 그 세력이었다. 폭력, 압류, 고문, 치사, 유린… 그들이 과거에 겪었던 그 격렬한 저항에 비하면 얼마나 양반인가? 게다가 그 무서운 대학생과 청년들이 빠져버린 ‘소프트’한 시위는 자장가만큼이나 행복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직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모든 진영은 예쁘게 분열되어 있었으며, 구심점도 없었고, 나이 들어 먹고 살기에도 바쁘고, 이기적이고 말만 많은 친구들이니 각개격파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상대도 없었을 것이다.

 

깨어있는 민주시민은 이번 정권이 과거 10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강력하다는 리더십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국정에 대한 철학이 없는 정권, 국민에 대한 애정이 없는 리더십, 부정과 부패에 무감각한 리더, 그것들의 조합이 얼마나 커다란 국가적 재앙인지를 현실에서 배우고 있었다. 소고기 사태, 북한위기, 그리고 경제정책, 조세정책, 언론정책 등등의 일련의 광폭한 리더십에서 국민들은 자신의 권리가 어떻게 합법적으로 강탈될 수 있는지, 어떻게 유린될 수 있는지, 시스템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도 보았다. 정치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활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 것이었는지를. 투표를 포기하거나, 한번 잘 못 뽑은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 지도 배우고 있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아가면서…

 

그리고,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나섰다. 중학생도 말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시사하고 있을까? 그 아이들 눈에 무엇이 보였을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공학이 아니라, 이 경악할 만큼 비상식적이고 무식한 정권을 다루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수준의 민주주의 기본이념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 그러나 빼앗겼을 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체험하는 뒤늦은 학습과정인지도 모른다. 바로 원칙과 상식이다.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그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였는지도 깨달아가고 있었다. 후회와 탄식.

 

봉하는 이미 성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러운 게임을 시작했다.

정권은 긴장했을 것이다. 정권초기 지지율 10%대. 정당지지율 20% 대, 보선패배. 민심의 선명한 이반. 이런 현상들은 정치자영업자들에게는 재앙이다. 뒤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정치적 역습을 의미한다. 지역주의에 기대기에는 민심의 간극이 너무 컸다. 수도권 전멸의 위기. 총선은 몰라도 대선에서의 패배를 예감하는 징후다. 게다가 정권의 후반부는 상황이 더욱 나쁘다. 믿었던 경제는 이 정권 기간 동안 회복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필자의 아둔한 안목으로도 그들의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어 보였다. 하나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그들 세력이 즐겨 사용했던 완벽한 독재. 다른 하나는 정적 씨 말리기.

 

두 가지 방책은 동시에 진행될 수 있었다. 가능성은 내가 보기에도 높아 보였다. 독재는 합법을 가장해서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수단은 확보되어 있다. 내가 보기엔 완벽하다. 소심하고도 독단적인 대통령, 입법에 필요한 절대 다수당, 이미 80%이상 장악한 언론, 무한정 동원할 수 있는 실탄, 검찰과 경찰권력, 그리고 북한의 불안한 정권. 환경도 썩 괜찮아 보인다. 스스로 지역정당으로 쪼그라든 고만고만한 야당, 자기들끼리도 분열된 시민사회, 아직도 오리무중인 차세대 리더, 행여 노무현급의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밟아줄 싹수 노란 정치공학자들. 게다가 대학은 무력하고, 생업에 바쁜 시민들은 무기력해 보인다. 가히 천혜의 환경이다. 이건 꽃놀이 패 아닌가?

 

그러나 방심은 금물일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도 이런 환경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만든 세력, 민주시민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자들. 그들을 재워야 한다. 아니면 ‘왕따’를 시키거나. 그들만의 정치판에 다시금 ‘노무현’같은 별종이 등장하는 것은 재앙이다. 아예 서식할 수 있는 환경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터넷이다. 열린 광장. 통제가 불가능한 곳. 매체도 아닌 것이, 언론도 아닌 것이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분명한 정치적 실체. 기존의 정치공학으로 해석되지 않는 희한한 정치역학이 창조되는 유일한 곳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결코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적이 없었다. 상식과 소통의 힘이다. 그곳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오염을 시켜 자기들끼리 놀게 하던가. 껄끄러운 MBC는 임기 끝나는 8월 이사회를 갈아 엎으면 된다. 그리하여 소위 MB 미디어 악법이 등장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성공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 이미 특정 사이트를 제외하고 정치 이슈는 사라져가고 있다. 끝도 없는 정치토론에 질려 보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주제로 넘어가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반증한다. 포탈? 그 아이들이 무슨 힘이 있나? 노무현에게 가했던 그 1/100의 힘만 써도 알아서 찌그러질 회사들이다. 사돈의 팔촌까지 싸잡아 돌리면 두 손들지 않을 오너경영자는 없다. 아예 정치기사를 대문에서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사이버 논객들? 이미 글 쓸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다들 아는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참여정부 시절에는 생산적 논의가 정책에라도 반영되는 맛이라도 있었다. 이렇게 쓸만한 컨텐트는 말라가고, 이슈는 진부해지고, 대안은 없고 무기력만 남는다. 이로써 분할해서 격파하기가 완성된다. 정치 이슈는 결코 멀리 전파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이 노무현이라는 존재다. 봉하는 일찌감치 아이콘(Icon)이 되어가고 있었다. 3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될지 누구도 모른다. 그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 밟아간 그 길을 가게 만들면 될 것이다. 누구도 존경하지 않고, 누구도 찾지 않는 추레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더러운 게임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게임

 

죄수의 딜레마. 수학자 폰 노이만이 제시한 게임이다. 동지의 선택을 의심하느냐 믿느냐에 따라 자신의 형량이 좌우된다. 개인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전체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게임에서 죄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형량만이 중요하다. 특징은 어떤 것을 선택해도 아프다는 것. 치졸하고도 비인간적인 덫.

 

또한 이 게임이 대한민국의 검찰이 사용한 방법이다. 또한 언론이 추임새를 넣어 치졸한 정치쇼로 발전시켰다. 거대한 권력이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동원되었다. 거대 언론이 한편을 먹었다. 상황파악 못하는 띨띨한 언론이 가세했다. 냄새를 풍겼다. 썩은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노무현은? 혼자였다. 스스로 무장해제한 상태로 봉하 들판에 홀로 서 있었다.

 

검찰은, 정권은 ‘죄수’ 노무현에게 한정된 선택을 내밀었다. 평생의 가치관과 업적을 스스로 부정하고 편하게 여생을 연명하는 것. 아니면 본인으로 인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추레하고 냄새 나는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움직이면 주변 사람이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것. 어떤 선택이라도 인간 노무현에게는 치명적인 것들이다. 만약에… 만약에 죄가 있다면…

 

그가 죄를 지었을까? 검찰이 냄새를 풍겼고, 언론은 그렇다고 착하게 받아 적었다. 그리고 증폭을 시켰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섹시한 타이틀이 모든 신문과 모든 방송의 첫머리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거의 중계방송 수준이었다. 메시지는 ‘원칙의 훼절’. 기대반응은 ‘너도 똑 같은 놈이다?’, ‘정치는 더러워…’ 그 의도는 손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은 유죄부터 시작한 것이니.

 

언론의 패악질이 시작되었다. 그게 그토록 중요한 뉴스거리였었나? 그 가치를 그렇게 무너뜨리는 것이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그토록 절박한 것이었고, 보탬이 되는 것이었나? 조중동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으니 의례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한겨레, 경향. 진보성향의 신문들도 주구장창 떠들어 대기에 나도 그 혐의라는 것을 들여다 보았었다. 그냥 웃어버렸다. 혐의를 이야기 하는데 상식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본 상식의 부재. 실종된 피의자의 인권. 공개적 모욕과 협박. 그리고 3류 정치소설. 협잡.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이것들이 미친 소를 단체로 처먹은 것일까? 머리에 구멍 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그 기나긴 기간 동안, 가장 유능하다는 수사관이, 국가의 모든 정보 자원을 동원해서,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서, 심지어 20만원 차리 기부금까지 훑어서 자랑스럽게 내민 것이… 겨우 퇴임을 앞둔 시기에 빌린 돈이다? 투자계약서까지 있는 ‘자본금’이다? 그렇다면 투자 시기는? 퇴임 직전? 그것도 적대적인 정권으로 교체가 확정된 말년 대통령의 가족에게? 그렇다면 그 투자자는 무슨 근사한 대가를 바랬을까? 농민 노무현이 한나라당 정치권에 힘이라도 써줄까 봐? 현직에서 못다한 부정을 퇴임 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바보다. 평생 동안 견지했던 원칙을 깨고 말년에 푼돈이라도 부랴부랴 챙긴 바보 노무현이거나, 아니면 대가리에 뇌 대신 똥만 가득 차있는 기자들이거나. 어느 쪽 판단이 상식적인가? 혹시, 정말 노무현이 바보라고 생각했던 거냐? 언론은 양심을 버렸다. 내 양심은 언론을 버렸다.

 

이 죄수의 딜레마에서 노무현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선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치욕의 기간 동안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검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준비를 시켰는지 아는 바가 없다. 혼자 고립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누구도 믿어주지 못할 상황으로 사태가 진전되고 있을 때, 자신이 대통령이었던 이 대한민국 땅에서 평생에 걸쳐 이루어 놓은 것이 무너져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냥 눈 딱 감고 손만 내밀면 게임은 손쉽게 끝난다는 규칙은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원래 정치판이란 그런 거 아니었나? 협상도 하고, 욕 좀 먹고 사는 거지… 주변사람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국민들만 빼고…

 

그러나, 우리는 게임의 결과를 알고 있다. 그는 죄수의 딜레마에서 설정된 엔딩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게임의 붕괴. 그리고 게임의 역전.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선택이 내려졌다. 내가 보기에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는 그의 미래보다 국민의 과거를 선택했다. 국민들이 그에게 위임했던 ‘원칙과 상식의 정치’로의 회귀. 그리고 평생을 견지해왔던 깨끗한 가치의 보존. 또한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참여민주주의의 부활. 마지막으로 게임의 종료. 이 더러운 게임은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것을 그의 주인들, 모든 국민에게 알리려고 했다고 믿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목청껏 알려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러운 게임은 그렇게 진행되도록 되어 있으니.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영면한 이후 이 사회에는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를 선택했던 사람들이나,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이나 같은 해석이 나왔다. 죽음이라고 하는 선택은 다른 대안이 없는 ‘절대 선택’이다. 그만큼 그 죽음의 의미는 무겁다. 죽음 대신 지키고자 한 것. 죽음과 교환한 것. 그것이 노무현대통령이 남긴 것 아니었을까? 유산(遺産) 말이다.

 

검찰은 당황했다. 정권은 숨을 죽였다. 그를 버렸던 자들은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언론은 논조를 바꿨다. 묘하게도 죄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상중이라서 그랬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비아냥은 사라지고 애통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게 참 궁금했다. 왜 저들이 슬퍼하고 있지? 원하는 대로 보낸 것 아니었나? 소위 ‘오버질’이라고 느낀 것은 나뿐 일까? 묘하게도 내 눈에는 마치 표적을 잃어버리고 카운터를 허용한 자들의 공포감이 읽혔다. 그들은 미친 듯이 유서를 읽어댔다. ‘미워하지 마라, 원망하지 마라’ 오직 그 글자만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토록 공포스러웠을까? 그들은 이 더러운 게임의 룰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덫에 걸린 것이 아닐까? 동일한 잣대, 동일한 기준으로 그들 자신을 심판할 때 과연 살아남을 자가 있을까? 심판은 국민이 한다. 퇴로는 없을 것이다. 피해야 한다. 물을 타고 먹물을 뿌려서 흐려야 한다. 그 가증스러움에 살의마저 느낀 것은 나뿐 일까?

 

그들은 모든 광장에서 가장 거대한 슬픔을 보았을 것이다. 그 속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분노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폭발직전의 분노를 씹어 삼키는 치열한 절제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조문객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문객이 스스로 분향소를 차리던가? 조문객이 사비 털어 장례물품을 준비하는가? 그것은 상주의 모습이다. 제(祭)가 끝날 때까지 삼가고 또 삼가는 상주 말이다. 그 다음에는 역사적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나는 장례식을 보면서 노무현의 유산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 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죽지 않는 대통령. 결코 죽일 수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평생 동안 추구했던 것. 그가 정말 이룩하고 싶었던 것. 우리가 그에게 열광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인의 매력도 모두 유산으로 온전하게 남겨 놓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려는 자, 또한 대통령이 된 자가 따라야 할 전범(典範)을 남긴 셈이다. 그가 흠모했던 링컨처럼.

 

똑 같은 장면에서 나는 아주 멍청한 사람을 보았다. 이명박씨. 머리도 나쁘지만 그릇이 너무 작았다. 소시민의 기준에서도 그는 치졸하면서도 비겁했다. 봉하에서 계란세례를 받을 각오를 했었다면 아마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확실한 편가르기가 되었을 테니까. 시민광장을 봉쇄한 것은 아주 잘했다. 덕분에 의외의 우군도 많이 생겼고 전의(戰意)를 꽤 굳혔다. 그 어리석음에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다시, 노무현 대통령.
돌려주신 것 잘 받았습니다.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는 이제 고민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가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장난스런 미소가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조만간 봉하에서 다시 한잔 뫼시겠습니다.


(cL) 요한3장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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