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개곰 / 2009-05-12)
1918년 겨우 28세의 나이로 마흐에 대한 과학철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로베르트 무질이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학자의 길을 버리고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과학과 수학에서 갈고 닦은 칼 같은 분석력을 삶의 영역에도 적용하여 인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전망을 여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였다.
무질은 오스트리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공대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원한다면 좋은 대학의 교수직을 얼마든지 마련해줄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무질은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강단과 결별했다.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로서 자신이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은 자기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자기가 예술가로서 쓰려는 내용은 자기 아니고는 아무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질은 "구제 불능의 유럽"이라는 글에서 "우리는 영혼은 너무 적고 지성은 너무 과잉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를 너무 적은 지성으로 건드리는 것이 문제"라고 갈파했다.
무질은 논리학과 수학, 실험심리학에서 습득한 엄밀한 분석력과 관찰력을 인간 사회에 적용시키려 했기에 생각할 거리와 쓸 거리가 너무 많았지만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려면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질은 꼭 자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비록 돈이 된다는 것은 알면서도 기꺼이 포기하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작을 위해, 가치를 위해 몸을 던지기로 했다. 그것이 결국 미완으로 끝난 대작 <<개성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형극의 길이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잡지 편집자나 도서관 사서로 잠깐씩 일한 것 말고는 일정한 직장 없이 꼬박 10년을 소설 집필에 쏟아부어 1930년에 겨우 1부와 2부가 나왔고 1932년에 3부 일부가 나왔다. 어려운 여건에서 그나마 무질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질의 진가를 알아본 주변 사람들이 베를린에서 무질협회를 만들어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무질은 베를린을 등지고 빈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무질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전체나 집단이 아니라 강력한 개인들의 각성이 사회와 문명을 근본적으로 바꾼다고 생각한 사람이었기에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나치와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사랑하던 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무질은 다시 스위스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무질은 경제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3부까지 나오다 중단된 <<개성 없는 사람>>의 원고 뭉치를 들고 스위스의 출판사들과 출판 교섭을 벌였지만 독일권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 출간을 엄금한다는 나치의 지침을 어기고 무질의 책을 낼 만큼 강단 있는 출판사는 스위스에 없었다. 스위스에서도 무질의 재능을 알아본 지인들을 중심으로 무질협회가 만들어져 무질이 작품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전시 상황에서 일정한 수입원 없이 예술가가 작품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질은 자신은 20년이 되도록 작품 하나를 완성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데 이른바 잘 나가는 작가들은 2, 3년이 멀다 하고 작품을 내놓고 내놓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일기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은 자기는 1년에 몇 편이라도 쓸 수 있다고 꼬집었지만, 생활이 어렵다 보니 나중에는 자기가 평소에 경멸하던 작가들한테까지도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작가의 하나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노벨상을 탄 토마스 만이었다.
망명지에서 일정한 직업이 없는 비베스트셀러 작가의 삶은 거지 같은 “구걸”의 연속이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로베르트 무질에게 그것은 엄청난 심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무질은 1942년 취리히의 자택에서 목욕을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로 30년 가까이 매달린 <<개성 없는 사람>>은 “결론 없는 소설”로 남았다.
그러나 무질은 1999년 세기말을 맞아 독일 문학회관이 99명의 작가, 평론가, 학자에게 지난 100년 동안 독일 문학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작가를 뽑는 조사에서 1위에 뽑혔다. 돈을 위해 작품을 쓰는 대부분의 작가와는 달리 뻔히 돈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작품을 쓴, 가치를 위해 예술가의 길을 걸은 로베르트 무질에게 뒤늦게 돌아간 영광이었다. 예술의 가치를 너무 얕잡아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질이 작품을 쓰고 안 쓰고에 따라서 오스트리아라는 한 나라의 역사가 적어도 20세기 전반기에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무질이 추구한 예술은 좀 더 멀고 길게 현실에 작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예술보다도 훨씬 직접적이면서도 강도 높게, 멀리는 물론이거니와 가깝게도 사회의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의 5년과 이명박의 1년이 좀 넘는 세월이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무질이라는 예술가는 별로 이름이 안 알려졌을 당시에도 비록 쪼들리기는 했을지언정 주변 사람들의 경제적 지원으로 포기하기 않고 작품에 매달릴 수 있었다. 노무현도 예술보다 훨씬 파급효과가 큰 정치에서 무질처럼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고 오직 가치를 위해서 한 몸을 썩은 한국의 정치판에 던졌다. 그리고 대통령까지 지낸 그에게 남은 것은 빚더미뿐이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식들도 일정한 직업이 없어도 평생을 돈 걱정 하지 않으면서 살아간다. 박근혜가 대표적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도대체 어디서 돈이 나서 수십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방방곡곡, 이 나라 저 나라를 휘젓고 다닐까. 그런데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은 단 한 곳도 없다. 박근혜 옆에 얼쩡거리다가 잘 보이면 나중에 국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그의 뜻을 따르는 정치인들은 적어도 한국의 입장만 놓고 보자면 로베르트 무질이라는 작가보다 훨씬 중요한 영향을 사회에 미친다. 당연히 이들이 경제적 근심 없이 한국의 더 근본적이고 중대한 문제를 성찰하고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는 사업을 구상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그런데 야비한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서 연금까지 박탈하려고 한다.
나는 이념이 아니라 사실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진정한 언론을 만들 수 있는 세력은 노무현을 믿는 사람들밖에 없고 그 중심에는 노무현이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사업을 떠나서라도 안정된 변호사로서의 삶을 버리고 나라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가족과 친구와 개인적 행복을 바친 노무현이라는 자연인을 야비한 이명박 정권의 더러운 경제적 탄압에서 지켜주는 것이 노무현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노무현 덕분에 적어도 5년 동안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시민이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아고라 카르키시아노프님의 “노무현연금” 제안
ⓒ 개곰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4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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