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초모룽마 / 2009-04-26)
실패의 길을 가는 남자들
항상 ‘실패’의 길만, 그것도 어렵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실패’를 자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패는 두려워하고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어떤 길이 분명 실패로 가는 고난의 행군길임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에서도 소설 속에서도, 한반도에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성직자는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손 치더라도 ‘성공’을 위해 정치에 뛰어든 것이 확실한 정치인들 중에도, 드물지만, 꼭 그런 사람이 한두 명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위스키 신부
‘위스키 신부’는 항상 술에 찌들려 있는 어느 멕시코 읍내의 카톨릭 사제다. 술값은 고해성사 해주며 받는 돈으로 충당한다. 물론 본인도 그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어쩌랴, 사제도 인간인 것을. 그는 심지어 하룻밤 사랑의 결과, 애까지 갖게 된다!
읍내에 ‘혁명’이 불어 닥친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멕시코 인민들의 ‘정신’을 쥐락펴락했던 성직자들에게 위기다. 길은 세 가지다. 도망가느냐, 환속하느냐(‘마누라’를 얻은 호세 신부가 그랬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볼 때마다 “호세, 자러 가요?”라며 놀린다), 아니면 목숨을 걸고 사제직을 계속하느냐.
제일 편한 길은, 물론 이웃 국경을 넘어 도망가는 것이다. 국경을 넘으면 성당은 건재할 것이요 위스키 살 돈도 벌 수 있다. 즉, 성공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지 않은가. 그러나 신부활동을 계속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롭다. 즉, 실패한다. 호세의 환속은 그 중간쯤 된다. 위스키 신부도 세 갈래 길에서 방황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제이기 전에 그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성공 쪽으로 갈 기회는 적어도 두 번은 있었다.
안전한 베라크루즈로 떠나는 배 - 국경을 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공’하는 길이다 - 를 탈까 말까 망설이는 그에게 엄마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어린 소년이 나타난다. 얘기를 들어보니 별로 위독해 보이지도 않지만, 아무튼 사람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니, 신부는 소년을 따라 못 이긴 척 늪지대를 향해, 실패의 길로 향한다. 첫 번째 실패의 길이다.
‘혁명’을 현장에서 독하게 실천하는 경위가, 위스키 신부를 쫓고 있다(더불어 미국에서 이 늪지대로 피신했다는 살인강도 ‘그링고’도 쫓는다). 신자들 집에서 몰래 숨어 지내며 끈질기게 버텼던 사제는, 결국 다시 한번 편안한 성공의 길을 찾아, 이번에는 험준한 산을 통해 국경을 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불길한 눈이 있었다. 혼혈인이다. 쥐새끼적인 본능에 따라, 그는 노새를 타고 국경으로 향하는 사람이 그 ‘신부’라는 것을 직감한다. 현상금이 무려 70페소나 붙은 사제.
위스키 신부가 국경을 넘기 직전 혼혈인이 나타나 말한다. “그링고가 신부님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지금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어요!” 그링고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위스키 신부는, 왔던 곳으로 발길을 되돌린다.
물론 신부는 그링고가 죽어가고 있다는 오두막에 그를 쫓는 경위와 그 부하들이 총을 겨누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신자가 사제를 찾고 있다는 데에야! 위스키 신부는 두 번째, 이번에는 완전한 실패의 길로 들어선다. 목숨이 걸린 실패.
총에 맞아 죽어가던 그링고는 사제를 보자 외친다. “신부님, 도망가세요. 놈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그 ‘성공’의 길을 거절한다. 그링고는 숨겨둔 칼, 즉 실패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수단을 주려하지만 신부는 이것마저도 고개를 흔든다.
사제 곁에서 그링고는 죽고, 예의 경위가 부하들과 함께 총을 들고 나타난다. 혼혈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체포되면서 신부는, 경위에게 그링고하고 함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신부는 읍내 광장으로 끌려나와 ‘반역죄’로 총살당한다.
처형 직전 위스키 신부는 호세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부탁했다. 죄진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세는 거절한다. 위스키 신부가 말한다, “가련한 양반이군.” 이런 호세, 현상금에 눈먼 혼혈인, 오늘도 혁명의 ‘실적’을 채운 경위, 그리고 술 취한 신부. 이 남자들 중 누가 실패했고 누가 성공한 것인가? 그레이엄 그린이 대신 답한다.
“신이 임하고 있는 곳에 신의 적도 도사리고 있고...악이란 선 스스로가 완전하기 때문에 짊어지게 된 그림자인 것이며...우리는 선과 악의 국경지대에 살고 있다”
빨치산 이현상과 게릴라 체 게바라
그린이 <권력과 영광>을 쓰고 있을 때, 일제 하 한반도에서 이현상이라는 사람도 확실한 실패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현상은 충남 금산의 뿌리 깊은 양반가의 후예다. 그 시대 양반가 자제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도 집안에서 보내주는 풍족한 돈으로 당시의 내로라하는 명문학교인 중앙고보와 보성전문에 유학할 수 있었다. 흥청망청 타락의 길로만 빠지지 않는다면,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요, 틀림없이 ‘성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20년 후, 지리산 중에서도 오지인 빗점골 계곡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과연 어떤 길을 택했던 것일까.
이현상은 학창 시절 사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섰다. “30대까지도 사회주의에 빠져 있으면 머리가 없는 것”이라곤 하지만, 그는 오직 일관된 열혈 사회주의자였다. 폼 나게 살롱에 드나드는 대신, ‘신념’ 하나로 그는 악명 높은 일제치하의 감옥소를 택했으니 그것은 분명 실패의 길이다. 다른 길을 택했다면, 아마 해방 무렵에는 고관대작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현상은 해방 이후 반은 지상에서, 반은 지하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간부가 되었다. 남로당이 아예 불법화되자 북한으로 간 이현상은, 그의 25년 정통 투쟁경력을 내세워 북한에서도 편안하게 한자리할 수 있었다. 그럴 맘만 있었다면 말이다. 그처럼 탁월하고 강렬하게 이론과 행동, 신념을 겸비한 사회주의자는 달리 없던 상황이었으니.
그러나 이현상은 1948년 남한에서 여순 반란자들이 대거 입산하여 빨치산 투쟁을 조직화할 필요가 생기자 적임자로 꼽힌다. 무엇보다 행동가였던 이현상이 분명 스스로 선택했을 것이 틀림없다. 활동이 불법화되고 준 전시상태의 남한으로의 파견, 이것은 실패할 개연성이 무지하게 높은 길이다. 두 번째 실패의 선택.
한국전쟁 발발 후 빨치산은 한때 ‘통치자’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으나 상황은 엉뚱하게 돌아갔다. 중국의 인민해방군까지 가세하면서 전쟁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더 커졌지만 지리산 자락에 퍼져 있던 빨치산들은 잊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승만으로부터는 고립되어갔다.
이현상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북상을 택한다. 철저하게 산자락만 타야 하는 고난의 길이다. 1950.11월 우여곡절 끝에 빨치산들은 춘천 부근까지 북상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북한정권은 북상을 멈추고 - 북한으로 들어오지 말고! - 지리산으로 되돌아가 ‘투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왜 그랬을까? 후방 교란을 위해? 아니면, 입성은 형편없지만, 산속에서 단련되고 눈빛이 남다른 빨치산들이 실미도처럼 김일성에 해코지 할까봐? 아무튼,)
이현상은 이 고통스런 지시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빨치산 경력까지 덧붙여진, 무시 못할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무장병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지시를 받아들인다. 그는 허울 좋은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격상됐지만, 다시 지리산으로 내려왔을 때 실패는 분명해 보였다. 그것도 결정적 실패였다. 빨치산들은 그 후에도 남북 모두로부터 버려진 채(정전협상에서도 이 남쪽의 ‘공산비적’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고 한다) 죽어갔다. 외롭게 그러나 자존심은 지킨 채.
고은의 시집 <만인보>에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나온다. 최근에는 평전까지 나왔다. 이태의 <남부군>은 스테디셀러다. 조정래의 밀리언셀러 <태백산맥>에도 이 전설적 인물이 등장한다. 적장 차일혁 총경은 이현상을 예우하여 정중히 장례를 치러줬다. 이현상이 실패? 사실판단은 결코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필자가 읽은 사람 중, 이현상과 가장 닮은 사람은 체 게바라다. 양자는 완전 판박이다. 체 게바라도 아르헨티나의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라는 성공의 길을 버리고 절망의 땅 라틴아메리카의 정글 속으로, 실패의 길로 자청하여 들어간다(이때가 1953년으로 그러니까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사살된 해이다). 쿠바혁명 후 국립은행 총재라는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볼리비아에서 다시 산악 게릴라로 되돌아왔을 때, 실패는 분명해졌다. 그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사살됐다. (소설가 김성동은 묻는다. “체 게바라 알지? 근데 이현상은 왜 몰라?”...둘 다 “민중혁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인물들인데 말이다)
그러나 82명의 다른 게릴라들과 함께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를 향했을 때나, 숱한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지금이나, 누가 체 게바라를 실패했다고 함부로 장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현상에게도 마찬가지다.
바보 노무현
노무현도 성공이 번듯하게 보장된 길을 놔두고, 실패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바보’ 소리를 듣는다. 잘 나가는 조세전문 변호사의 길을 놔두고 서슬 퍼런 198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인권’을 들먹인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3당 합당으로 거대한 기득 야합이 탄생했을 때, 홀로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지 않았더라면 노무현은 지금껏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야합은 ‘87년 민주화’를 무효화시키고 가면 뒤에 숨긴 그들의 본색(‘민주라고? 웃기지 마라. 우리끼리만 뭉쳐 해먹을란다!’)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노무현도 이들과 더불어 “옳소!”를 외쳤더라면 굳이 고민하고 괴로워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대놓고 해쳐먹을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누구처럼? 지금 이명박들처럼.
노무현은 당선이 유력시되던 종로(성공)를 놔두고 굳이 실패(부산)를 택했다. 기존의 한국 정치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무모한 ‘짓’이다. 어떤 상식과 합리성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거대한 장벽에 도전한다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을 의미했다. 노무현은, 당연히 낙선했다.
그에게도 ‘성공’할 수단과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존의 익숙한 방식대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적당히 타협하면 되었다. 아니면, 실패를 성공으로 강제적으로 바꿔놓던가. 그는 바로 ‘최고 권력자’, 대통령 아니던가. 맘만 먹으면 권력을 동원하여 ‘적’들에게 보복하고 그들의 사적 영역까지 이 잡듯 뒤져 위협하고 굴복시킬 수단이 있었다. 지금 이명박들이 하듯 말이다.
노무현은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 한번 더 확실한 실패의 길을 걷기로 했다. 감히 어느 정치인도 꿈꾸지 못한 일이다. 그는 떡찰과 찌라시에 ‘검찰’과 ‘언론’이 되어 공평무사한 권력 행사를 요구했다. 익숙했던 권력질에 노무현이 ‘대못’을 쾅쾅 박자, 떡찰과 찌라시들은 광기 어린 보복을 다짐한다. 그때나 특히 지금, 우리가 생생히 목격하고 있듯 말이다.
아니, 다 틀렸다. 노무현이 결정적인 실패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그 ‘승리’의 순간이었다. 오직 ‘성공’만을 추구하는 좌-우의 거대 기득권과 ‘실패’를 마다하지 않는 노무현은 애초부터 공존이 불가능했다. 그 기득권이 거대한 힘을 가졌고, 노무현도 실패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면, 실패는 어찌 보면 승리의 순간에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혁명’의 승리(=노무현의 당선)는 혁명으로서는 패배가 될” 운명이었다. 비록, 노무현의 당선은 “진보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역사적 단계로서는 패배는 아니지만” 말이다.
‘혁명을 낳은 조건들은 그것이 만들어낸 새 패러다임 안에서 (반드시) 옛 사회의 조건들을 재생하려 한다’는 프롬의 말은 이로써 증명됐다. 프랑스 대혁명 후의 반동(왕정복고), 레닌 사후 스탈린의 등장,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의 히틀러, ‘1987년’을 전면 무효화시킨 3당 야합, 노무현 등장 이후 1년 만의 ‘탄핵’과 이명박의 등장 등등...
실패? 성공¿
노무현을 시대적 현상으로 만들어낸 여러 조건 들 중 많은 것(사람)들이 ‘옛 사회의 조건들’을 그리워하면서 지지를 철회했다. 진정으로 그렇게 믿었든 아니면 그렇게 믿으라는 찌라시들의 선동에 넘어갔던, 그 사람들은 노무현의 낯선 실험, 즉 불확실한 것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모든 새로운 발걸음은 실패의 위험을 의미했다. 오래된 것, 이미 검증된 것만이 안전하다. 혹은 안전하게 보인다.
그 사람들은 노무현 현상에 필경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권력(통상 ‘엄숙한 담화문’으로 표현된다)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화하고 또 그것에 순응해야만 - 권력에 대한 불복종은 숫제 종교적 불경죄 차원이다(“촛불은 사탄이다” 등) -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를 본 받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전연 별개다. 기독교도들은 (자기를 희생하는) 예수처럼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믿슙니다”를 외친다. 왜?
“예수는 우리를 대신하여 온갖 사랑을 해주신다. 우리는 예수의 행동과 반대되는 짓을 해도 된다. (사랑을 베푸는 예수를 믿고 있으니) 예수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를 본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신앙은, 이렇게 인간의 탐욕 - 예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 을 위장하는 데 아주 그럴듯한 구실이 된다.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더 크게 외칠수록, 예수와 반대되는 짓을 행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편리한가!
마찬가지로, 지난 5년간 보아왔고 지금도 볼 수 있듯이, 저들이 그렇게도 노무현 죽이기에 나서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노무현이 지향했고 실험했던 가치를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노무현이 없어져야, 노무현이 미처 실험도 하기 전에 성급하게도 지지를 거둔 것에 대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굳이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봐라. 노무현이 저런 사람이다. 이제부터 노무현이 외친 가치들을 고민해가면서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뭐 이런 거.
다시 말하면, 노무현을 깎아내리는 데 성공하면, 이명박에 몰표를 몰아줌으로써 노무현이 지향했던 (그러나 실행하기에는 까다로운 자기책임이 따르는) 진짜 민주주의를 하루아침에 쫓아내 버린 것에 대해 미안함도 서운함도 아쉬움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거 참, 참여민주주의...그거 어렵더구만. 자기만의 오롯한 판단과 책임 하의 행동이라. 말은 좋은데, 귀찮고 낯설고 불안하고...그냥 쉽게 쉽게 예전 하던 대로 합시다.’...
이렇게 사람들은 노무현으로부터 도피했다. 노무현을 욕함으로써, 노무현의 가치와 정신을 따라야 될 것 같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민주주의고 뭐고 상식과 원칙이고 나발이고, 남들은 어찌 되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 뉴타운에 들어가고 대박을 터뜨리면 되는, 그런 꼴리는 대로 하자는 정신이 바로 이명박의 ‘성공(=당선)’을 불러온 것이다.
노무현의 ‘실패’와 이명박의 ‘성공’(사람들은 이명박처럼 하면 되면 자기들도 성공한다고 보고 그를 찍은 게 분명하다)으로부터 우리는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단어의 사전적 또는 진실한 의미가 완전히 뒤바뀌어 개판된 것이다.
이쯤해서 당연히 드는 의문 하나, 과연 노무현은, 지난 두어 달간 도하 찌라시들이 작심하고 작문한 대로...진짜로 실패한 것일까.
ⓒ 초모룽마/seoprise.com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3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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