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죽으려고 하죠?
글쎄요, 내가 죽으려는 건 이런 삶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가치없다고 말하면 다른 사지마비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난 누구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내가 뭔데 살려는 사람들을 비판하겠습니까? 그러니 나와 나의 죽음을 도와주는 사람도 비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누군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거야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한테 달렸지요. 두려움만 물리친다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죽음은 늘상 우리 곁에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결국엔 우리 모두 죽습니다. 우리 모두. 죽음은 우리의 일부입니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하니까 다들 왜 그렇게 놀랍니까? 마치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국 법정에 가면, 왜 다른 길을 찾지 않냐고 물어볼 텐데요. 왜 휠체어를 거부하죠?
휠체어를 받아들이는 건 한때 누렸던 자유의 빵부스러기를 받아들이는 거와 같습니다. 봐요, 당신은 거기 앉아 있습니다, 1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1미터가 뭔가요? 보통 사람에겐 무의미한 이동에 불과하죠. 하지만 내겐, 당신에게 다가가 만지는데 필요한 그 1미터가, 불가능한 여정입니다. 망상, 꿈입니다. 그래서 난 죽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게 자주 웃나요, 라몬?
도망갈 수 없고 남들에게 계속 의지할 수도 없을 때 웃음으로 울게 되지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법으로 선포한 국가에서, 고문이나 불명예스런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가에서, 라몬 삼페드로의 경우처럼 자신의 처지가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사실, 자살을 기도하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 나중에 처벌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존엄하게 죽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국가는 국민의 자유에 간섭하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영위하는 생명은 당신들 것이 아니며 당신들은 생명에 대한 어떤 결정권도 없다.’
판사님들, 정치, 종교 당국자 여러분, 당신들에게 존엄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신들의 양심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간에 제 삶은 가치가 없습니다. 전 적어도 존엄하게 죽고 싶었습니다. 오늘, 제도상의 나태함에 지친 저는 부득이 죄인처럼 숨어서 죽으려 합니다.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들이 범죄요건을 구성하지 않는 작은 행동들로 주의 깊게 나눠졌다는 것과, 몇몇 우정 어린 손길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국가가 나의 조력자들을 처벌하려 한다면 그들의 손을 자르라고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여한 것은 손뿐이니까요. 머리, 즉 양심은 제가 제공했다는 뜻입니다.
보시다시피, 제 옆에 물 한 컵이 있습니다. 안에 청산칼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걸 마시는 순간 전 존재함을 멈추고 제 가장 소중한 재산인 제 몸을 포기하게 됩니다. 삶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 삶은 28년 4개월하고 몇 일 동안이나, 마지못해 이런 슬픈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만한 시간이 흘러서야 제 삶은 다시 균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의 대부분동안 제 의지에 반하여 지나간 시간만이 지금부터 제 유일한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시간과 의식의 변화만이 언젠가, 제 요구가 정당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말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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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선 청산칼리를 녹인 물을 마시는 방법을 택하지만, 실제 라몬은 수면제로 자살하였다.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 환자가 느끼는 고통이 더 중요해.
하루하루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고 있어. 거울을 볼 때면 거울 속의 자신을 못 알아볼지 모르는 거야. 그게 바로 환자가 느끼는 공포야. 매일같이 그런 공포를 느끼고 있어. 그 공포는 바로...모든 것을 잃어간다는 것.
박사님, 솔직히 답해주시죠. 사람들이 박사님을 엽기적이라 하는 걸 아시나요?
지나친 감정주의예요. 심장이식이 처음 시도됐을 때에도 그같은 감정이 팽배해 있었죠. 의사들마저도 그릇된 일로 여겼어요. 신의 뜻에 위배된다는 거죠. 자연섭리에도 위배되고요.
엽기적인 일 아닌가요? 사람의 가슴을 열어서 심장을 꺼내거나 혈관우회 수술을 하다니? 에테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에테르가 수백년째 쓰이고 있지만 과거엔 쓰이지 않았어요. 1846년까지는요. 에테르는 1843년에 발견됐는데 그 전까지는 누구나 깨어있는 상태로 수술을 받아야만 했죠! 외과의가 깨어있는 사람의 살을 째고 열었다니까요.
에테르가 왜 금지였는지 아십니까? 종교 교리 때문이었죠. 어리석은 관념 때문인 겁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뜻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관념.
이런 말하는 사람들에겐 뭐라고 하실 겁니까? "케보키언, 당신은 신처럼 행동하는군"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의사가 약을 줄 때면 그는 신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자연섭리에 개입하는 거니까요. 의사들은 모두들 자신을 신이라 여깁니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렇게들 하고 있죠. 하지만 저는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봅니다. 주식투자에 더 관심이 있는 의사들보다야 자기 환자에 관심있는 의사들이 더 낫죠.
오직 신만이 창조와 파괴를 하십니다. 종교가 없나요? 신을 믿지 않나요?
아, 있지, 아가씨야. 나도 종교가 있어. 그 분 성함이 바하...요한 세바스챤 바하시지. 적어도 내가 믿는 신은 만들어진 신은 아니지.
의식이 없는 환자라면 병원측에서 영양공급을 중단하고 죽게 놔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이 있고 이성적이라면 그래서 죽음을 허락해 달라며 간절히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거절해 버립니다. 자, 어찌하여 정신이 온전한 성인이 의사를 만나서 이런 말을 할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까?
"참을만큼 참았습니다", "더 이상 통증을 못 참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참을만큼 참았습니다"
이러한 결정들을 정부에서 내려주길 정말로 원하십니까?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건 재판이 아닙니다.
재판장님! 제가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무슨 법을 어겼죠? 구닥다리 관습법이죠. 관습법이 뭡니까? 관습법에 따르자면, 재판장님, 기독교인의 이슬람 개종도 범죄인 거 아십니까? 그런게 관습법인 거 아십니까?
성경을 믿지 않는 것도 범죄입니다. 그런게 관습법입니다.
이건 재판이 아닙니다. 재판장님, 이건 재판이 아니라 린치죠. 따라서 저 자신을 린치하는 데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아, 죽음의 끈질김이여
얼마나 대단한가
죽음을 계속 놔두어라
안 그러면 병원도 돈을 못 벌고
제약회사도 마찬가지일테니
만일 부자라서 돈이 있으면
돈을 써서 죽겠지만
가난해서 여력이 없으면
끝까지 앓아야 하지
자기 처지껏 사는 게
미덕이라나?
안락사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저는 다르게 부르지만요. 저는 의료행위라고 부릅니다. 고통 속에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위한 의료행위, 저는 그렇게 부릅니다. 아시겠습니까?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정확한 법 조항을 따지면서 헌신적인 의사를 가로막고 있는 마당에...
저는 헌신적인 의사입니다. 제가 환자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저의 정체성은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죽는 것보다 훨씬 나쁘니까요. 저를 사형시켜도 좋습니다. 더 나을 게 없으니까요.
그건 의료행위였어요. 의료행위였단 말입니다. 살해나 살인과는 전혀 다른 거죠. 의료행위였어요. 의료행위였단 말입니다. 더 없이 확실합니다. 더 없이 확실한 겁니다.
+ + +
미국내, 의사 조력 자살(적극적 안락사)을 합법화한 주는 오레곤, 몬타나, 워싱턴 주 등이며,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나라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삶은 매 순간순간의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은 삶의 주체의 몫이다. 그렇다면 삶의 일부인 죽음, 그 죽음의 방법 또한 삶의 주체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연명'은 '주체'를 위한 '삶'이 아니기에.
위 두 영화, 강렬·강력하게 추천한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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