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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0위권에 프랑스·독일 대학 없다는 것 모르나

pulmaemi 2011. 2. 10. 07:58

[상식의 해부 ③]‘서울대법인화가 세계 수준 담보? …공공성에 대한 성찰 우선돼야
이명재·출판인 | editor@mediatoday.co.kr  

 

서울대 교문에 서 있는 특이한 조형물은 ‘국립서울대학교’의 이니셜인 ‘ㄱ’ ‘ㅅ’ ‘ㄷ’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 이를 두고 ‘공산당’ ‘술’ ‘담배’를 뜻하는 것이라는 우스개가 나돌던 시절이 있었다. 비아냥 같기도 하고 조롱처럼 들리기도 한 이 비유는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대학의 현실을 자조적, 냉소적이되 정확하게 옮긴 것이었으며 게다가 다소의 명예도 느끼게 해주는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엔 70, 80년대 숨막혔던 시절 젊은 대학생들의 고뇌와 저항의 초상이 담겨 있었다. 어두운 죽음의 시대, 대학이라면, 또 대학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을 도리에 충실하려 애썼다는 것의 한 증언이었다.

 

그 때 대학의 많은 젊은이들은 도저히 강의실도서관에 들어가 앉아 학점만 챙길 수가 없었다. 대신 그들은 거리와 술집에서, 싸구려 담배와 눈물젖은 막걸리를 마시며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건 불의한 세상에 내지르는 울부짖음이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희구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를 따라 ‘착실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땅의 더 많은 아버지 어머니 형제의 고통에 눈감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번민이요 자책이며 통한이었다. 진정 사랑하기 위해 분노와 노여움을 배우는 젊음이었고,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이 되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러기에 힘겨웠지만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생각건대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을 배우는 ‘대학(大學)’이었다.

 

지금의 서울대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중위권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에 시달린다. 이른바 ‘명문대’로 가는 길에 대한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발전방안들이 제기되고 있는 지금, 그 같은 논의 과정에 대학이 무엇이고 그곳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빼놓을 수 없다면 저 지난 시절의 풍경은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만이 아닌 대학과 대학인이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 견지해야 할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서울대학교 정문.

바로 이것이 작년에 국회에서 여당에 의해 날치기 통과된 서울대 법인화 법안이 과연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하는 이유다. 이 법안은 그 법안의 중대성, 중요성을 생각하면 참으로 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절차(그것도 절차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거쳐 입법화됐다. 이제 하나의 법으로 성립돼 법 절차대로 하자면 착착 진행될 이 법은 이른바 명문대로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는 비효율과 장애물을 제거하는 ‘선진화’ 방안이라고 얘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법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국립’, ‘공공’에서 거의 기계적으로 연상되는 ‘비효율’이 개선될 기회라고 생각할 듯하다.

 

그러나 이 법안은 입법 절차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에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서 이 법안의 문제를 조목조목 따질 생각은 없다. 이는 별도의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날치기된 법안을 무효화하고 충분한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몇 가지가 있다. 그건 흔히 명문대의 조건에 대해 유포되고 있는 상식에 대한 것이다. 법인화 추진론자들은 서울대가 국내 1위이지만, 세계 대학순위에서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것을 강조한다.

 

서울대가 명문대라고 굳이 강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언론 등에서 매겨지는 대학의 순위가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학의 경쟁력은 해외 학술지 출판 논문 편수, 노벨상 개수, 대학의 연구비 수주 액수 등과 같은 정량적 지표로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인화 반대측에서는 그러한 정량적 수치보다도 어떤 대학에서, 혹은 어떤 국가의 대학 사회에서 건전한 ‘지식공동체’와 ‘지식생태계’가 살아 있는지, 그 지식공동체가 얼마나 역동적인지와 같은 요소가 대학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데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독일이나 프랑스가 100위권 대학이 거의 없으면서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법인화에 반대하는 이들도 현재 서울대의 지식공동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를 법인화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법인화가 추진되면 서울대의 교수, 학생, 교직원들을 정치적 로비의 경쟁으로 내몰아, 지식공동체의 말살을 더욱 가속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이들의 지적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법인화는 세계적 추세이며 실적 위주의 평가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초일류 대학으로 발전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충분한 논리적 인과관계와 실증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시장논리와 경쟁에 대한 신화적 믿음에 근거한 허구적 주장이라는 반론을 사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학, 특히 국립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공공성에 대한 고민이 특히 필요한 것은 서울대가 대한민국 대표 국립대학으로서 우리 사회의 많은 자원이 집중 투입되는 대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대학의 현실, 즉 이기주의와 무지하고 협소한 전문가주의의 만연, 철학 없는 기능인을 양성하는 직업학교로 변질되고 있는 현실에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며 대학다운 대학을 회복하는 데 보루가 됨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게 ‘국립’ 서울대의 소명일 것이다.

 

홍익대 미화 노동자 사태에서 보듯 괴물 같은 젊은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미친 현실에서, 모든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1등 경쟁의 선두에서 더 앞서가려고 뒤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질주하겠다는 이기심과 몰염치가 아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인간이 되는 법을 먼저 배우는 곳이 돼야 할 것이다. 그것이 대학교라는 명칭의 한 기원이 된 <대학(大學)>에서 밝힌 대로 대학의 본분인 명명덕(明明德)의 출발이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서울대 법인화 문제는 결코 서울대 구성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울대는 국립대로서 공공재이다. 서울대 동문과 교직원들에게 ‘소유권’이나 ‘지배권’이 있는 독과점적 사유 자산이 결코 아니다. 자신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 대해 납세자로서의 권리로서, 또 서울대를 다니건 아니건, 앞으로 서울대를 가든 안가든, 나와 우리 아이 모두의 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의 학교’라는 점에서 서울대 법인화 문제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발언권이 있다.

 

다만 다른 누구보다 서울대인들 자신이 솔선해서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서야 한다. 스스로 그런 양식을 갖기 바라며 누리는 것만큼의 합당한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나설 것이다. 그들이 서울대인들에게 대학다운 대학이 되는 법에 대해, 명문대의 조건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