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재단 / 2011-01-31)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체계적인 국가위기 대응 시스템 구축을 강조하고, 전문가들을 발탁했다. 청와대에 국가안보종합상황실을 설치하고, 종합적인 위기관리 매뉴얼을 마련했다. 기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확대 개편하면서 그 산하기관의 주요 상황정보를 종합하고 판단하는 상황실을 설치한 것이다.
2003년 봄 청와대 벙커에 국가안전보장회의 상황실을 만드는 공사를 마쳤다. 첨단 상황실에는 국내 23개 주요 정부기관으로부터 실시간 전송되는 위기-재난 현장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자상황판(KNTDS 시스템)이 설치됐다.
육.해.공군 사령부와 경찰청, 산림청, 소방본부, 한전 원자력상황실 등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청와대 상황실로 연결됐다. 공중 상황을 클릭하면 한반도 주변 360km 반경에서 운항 중인 모든 항공기와 함정 정보가 청와대 상황실에 떴다.
원전 가동현황과 경찰 CCTV를 통해 전국 주요 사건, 산불 발생상황도 실시간 잡혔다. 위성 정보도 받았다. 현장 부처의 단계별 보고를 거치면서 왜곡되거나 시간이 지난 정보 대신 실시간 현장상황을 보고받음으로써 위기 신속대응력을 높인 것이다. 한 매체는 이를 두고 ‘영화적 상상력의 현실화’라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은 2004년 7월 NSC사무처에 “기본지침과 표준매뉴얼을 지속 보완?발전시키고 여러 정보와 지식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세부 매뉴얼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NSC사무처는 전쟁?테러와 같은 전통적인 안보분야 외에 국민생활과 밀접한 분야에 대한 위기관리매뉴얼을 만들기 시작했다.
각 기관들과 함께 각종 위기상황 발생시 조치사항과 행동절차, 위기경보 발령체계, 대국민 홍보사항 등을 규정한 실무매뉴얼 작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5년 11월 33개 유형의 표준 매뉴얼과 278개 실무매뉴얼이 완료됐다.
‘잃어버린 10년 청산’에 무너진 국가위기관리시스템
참여정부에서 정착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은 이명박정부 출범 후 한때 사라질 위기를 맞는다. ‘잃어버린 10년 청산’을 기치로 내건 이명박정부 인수위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비상설 기구로 바꾸고 사무처를 폐지해버렸다. 종합상황실마저 덩달아 해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대문 화재 사건이 터지면서 위기관리의 문제가 주요 현안이 되자 급히 상황실을 되살렸다. 결국 위기관리 상황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규모는 축소됐다. 상황실장은 비서관에서 행정관으로 격하됐고, 인원도 24명에서 15명으로 줄었다. 그러다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총격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실장 직급은 다시 비서관급으로 올렸지만 기존 통합관리 체계는 없어져 버렸다. 외교안보와 재난관리를 분리해 외교안보분야 위기는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 담당하고, 재난관리분야는 행정안전부로 하여금 가져가게 한 것이다.
이는 과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위도 페리호 침몰과 같은 각종 재난 때 어김없이 경험했던 초동 대응단계에서의 우왕좌왕, 정부 기관 간 역할과 책임 회피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 즉 범정부 차원의 효과적인 콘트롤 타워 기능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300만 VS 2200, 그 차이는?
경북 안동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구제역 사태가 국가적 재난으로 치달았다. 300만에 가까운 가축이 살처분 됐고, 피해액만 2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축산농민들의 눈물과 한숨은 물론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들의 과로사나 정신적 충격, 식수 감염 등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역도 국방이다”란 어록이 실감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구제역 사태는 이명박정부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지난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발생했다. 2000년 당시 발생한 구제역 사태에서 살처분 가축은 모두 합쳐 2,200마리에 그쳤다. 국제수역사무국(OIE)으로부터 세계에서 구제역 퇴치를 가장 성공적으로 진압한 모델국가로 인정받아 청정국가 지위를 회복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에는 전국이 AI(조류인플루엔자) 사태에 몸살을 앓았다. 철새가 바이러스를 옮기는 질병의 특성상 초기 진화에는 실패했지만 사태 확산을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1월 25일 저녁 MBC 「PD수첩」은 구제역 재앙에 대한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놨다. 정부 내부 문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20여명의 수의사, 축분업자, 사료운송업자 등이 안동의 구제역 양성판정 농가를 들렀다가 경기, 강원, 경북 일대 80여개 지역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또 살처분 작업에 동원된 포크레인, 덤프차와 같은 중장비가 마음대로 도로를 주행하고 다른 지역으로 작업을 다녔다. 매몰작업에 투입된 인력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지난해 12월 구제역이 파주로 확산됐을 때 파주시는 군부대 투입을 정부에 여러 차례 요청했다. 그러나 군대가 현장에 투입된 것은 2011년 1월 15일, 구제역으로 대부분 농가가 이미 초토화된 뒤였다. 이 국가적 재난상황은 언제 진정될지 아직도 예측이 불가하다.
굳이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위기대응력이다.
공군 소장 출신인 류희인 前 NSC 사무차장(위기관리비서관 겸직)은 참여정부 시절 국가위기 대응시스템 구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지금은 군에서 예편해 충북대학교에서 위기관리론을 가르치고 있다. 국가위기관리의 최전선에 섰던 그가 이젠 학문적으로 위기관리시스템을 좀더 체계화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를 만나 참여정부 국가위기관리시스템의 도입부터 현재까지, 국가적 위기 대응에서 보여준 참여정부와 이명박정부의 차이점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전두환 군부 집권, 위기대응매뉴얼이 없었기 때문”
-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님 덕분이다. 퇴임 전 어느 날, 대통령님이 이렇게 중요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정말 딱 하고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나라는 위기관리에 대한 기본과목조차 제대로 개설되어 있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군복을 벗은 후 이 분야의 학문적인 체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나.
“당선자 시절이다. 2003년 1월 외교안보분과 회의 참석자 20여명과 당선자가 함께 도시락 간담회를 했다. 그때 처음 뵈었는데 참석자들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민망하지만 당시 내가 좀 튀었다. 위기관리분야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자 대통령님은 이미 재난에 대한 대응은 준비되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셨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하시며 연관 업무를 많이 해보셨기 때문에 아마 중앙재해대책본부를 염두에 두신 것 같았다. 나는 각 기관별이 아닌 종합적 대응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집요할 정도로 강조했다. 이틀 후 당선자 비서실측에서 연락이 왔다. 당신이 종합적인 계획을 짜보라고 했다. 그냥 안만 만들자는 건가, 실제 실행안을 만드는 건가 물어보니 실행을 염두에 두고 짜보라고 했다.”
- 종합적인 위기관리시스템에 대해 언제부터 고민했나?
“국민의정부 시절에도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2000년 6?15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 방북하시기 위해 비행기에 올라타시는데 불현듯 한 가지 우려가 됐다. 만약 김 대통령께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그런 국가적 위기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의 경우의 수에 대비해야 하는 군인 출신이라 그런 염려를 한 것 같다.
국가원수의 갑작스런 유고에 대비한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총칼로 집권하지 않았는가. 만약 위기대응 매뉴얼이 있었다면 우리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 때부터 위기관리분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 지시에 따라 278개 위기관리 매뉴얼 마련
- NSC 사무처 위기관리센터장을 역임했는데 어떤 업무인가.
“한마디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거다. 국가위기의 징후가 잡혔을 때 관련 기관들이 움직이도록 격발시키고, 총체적인 상황을 진단해 만약 적절한 체계가 없다면 새로 기획해내는 거다. 예를 들면 대규모 인터넷 바이러스 사태를 겪은 후 국가사이버센터를 만들었다.”
- NSC에 대해 설명하자면?
“말 그대로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다.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는 미국이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육군, 해군, 공군이 따로 노는 경향을 발견했다. 승리라는 뚜렷한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각 군별 이기주의 때문에 현장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를 조정하고자 둔 것이 NSC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에 명백히 규정된 회의체다. 그런데 상당기간 법제로만 규정되어 있었고 실체는 없었다. 국민의정부에 들어와서야 소규모 사무처를 두었다. 참여정부 때 종합상황실을 두며 확대 개편했는데 여기에는 보다 남다른 의미가 있다.
전통적인 위기관리분야인 안보 외에 자연재난, 인위재난 그리고 통신마비 등의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었다. 대통령님 지시에 따라 2004년 7월부터 시작해 2005년 11월까지 33개 유형의 표준 매뉴얼과 278개 실무매뉴얼을 완료했다. 덧붙여 여기에는 소방, 방역, 제설까지 상세히 포함되어 있다.”
- NSC 사무처가 맡은 분야가 너무 방대한 것 아닌가.
“현대 사회의 행정사안들은 매우 복잡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단독 부처 소관에서 다수 기관들이 연결된 사안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SOFA(한?미행정협정) 협상을 보자. 내용은 군사협정이지만 주관부처는 외교부고 협상대표는 외교관이다. 한?미 미사일 협상, 4자회담, 6자회담 다 그렇다. 때문에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클린턴 정부도 기존의 NSC를 개편해 종합적인 대응력을 높였다.”
첫 ‘DMZ 산불’ 진압이 가능했던 이유
- 중앙재해대책본부도 있는데 제설, 소방 같은 분야도 NSC사무처가 관리할 필요가 있나.
“한 예를 들어보자. 2004년 3월 중부지방에 때늦은 폭설이 내렸다. 시간당 최고 13cm의 폭설에다 청원군 일대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서 발생한 화물트럭 고장으로 1만여 대의 차량이 37시간 동안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고속도로와 건설교통부, 경찰 고속도로순찰대 등의 관계기관은 이같은 폭설 비상상황에 대비한 공동의 위기관리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아 공동조치가 필요한 제설작업과 교통통제, 고립된 차량 유류지원과 탑승자 대피 등과 같은 긴급조치가 적시에 이뤄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장시간 고립됐던 운전자들은 국가와 도로공사를 상대로 집단피해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2005년 3월 영남지역에 100년 이래 최고의 폭설이 내렸지만 2004년 12월 수립된 ‘대설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에 따라 신속히 대응한 건교부와 도로공사 등의 공동조치에 따라 별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 2005년 12월 호남고속도로 폭설 사태 때도 1,000여 대의 차량이 최장 17시간 가량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으나 위기관리매뉴얼에 따른 대응조치로 2004년 3월과 같은 상황은 재발하지 않았으며 폭설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다른 사례도 있나.
“2005년 4월에 강원도 고성 비무장지대(DMZ)에 산불이 발생했다. 그 전에는 DMZ에서 일어난 산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남측이든 북측이든 DMZ에서 일어난 산불이 급속히 확대될 경우 막대한 피해가 불보듯 뻔한 상황임에도 할 수 있는 대책이란 소화도구를 지참한 군 병력을 철책 남쪽에 배치한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이때 NSC 사무처가 나서 통일부와 국방부가 북한 당국에 전통문을 보내 소방헬기 투입의사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산림청과 해당지역 군부대는 동시에 소방헬기 투입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기대한 시간보다도 이른 시간에 북측으로부터 소방헬기의 DMZ 진입을 수용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이후 NSC 사무처는 국방부와 통일부, 산림청, 소방방재청과의 협의를 거쳐 ‘DMZ내 산불 대응매뉴얼’을 수립했다.”
“매뉴얼은 초동단계에 쓰이고, 운영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
- 그렇게 좋은 시스템을 MB정부는 왜 폐지했나.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그게 정말 이해가 안된다. 노 대통령께서 했던 모든 걸 뒤집으려 했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아마 몰라서, 진짜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한다. 너무나 안타깝다. 요즘 다시 슬그머니 NSC 기능을 복원한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정부 내 외교안보분과 기능과 행정 분야가 분리되어 있는 이상 조직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복원이라고 할 수 없다.”
- NSC 사무처 폐지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뭔가.
“정보유통이 막한 것이 안타깝다. 이건 매우 중요한데, 이전 정권에선 국정원 직원 수천 명이 수집하고 분석한 수백만 건의 정보들이 주로 대통령을 위해 존재했다. 그 수많은 정보들은 국정원장이 대통령을 독대할 때 보고하는 내용으로 쓰이는 것 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때로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께서는 공식적으로 국정원장, 검찰총장과의 독대를 거부했다. 그러자 기존 정보유통시스템에 변화가 생겼다. NSC 산하 정보관리실에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NSC는 그 정보들을 다시 분석해 필요한 부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유통시켰다. 즉 정부의 기능이 더 향상될 수 있었다. NSC 사무처가 폐지되며 그러한 정보유통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 사실 이 질문이 제일 하고 싶었다. 산불도, 제설도 매뉴얼이 있는데 구제역도 있을 게 아닌가.
“지금 구제역은 재난이 아니고 재앙 수준이다. 매뉴얼은 당연히 있다. 그런데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결국 사람으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다. 즉 운영의 묘가 중요하다. 참여정부 위기관리센터가 만들어졌을 때 처음에는 공무원들이 질책을 당할까봐 보고를 꺼렸다. 그러나 청와대 위기관리센터가 자신들과 동반자라는 것을 인식하자 너도나도 서로 보고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가 항상 같이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할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이런 작은 사안도 청와대에 보고하나 싶을 정도의 문제들도 보고되었다. 지금은 그런 수평적 소통과 관계의 문화가 단절됐다. 또 공무원들이 보고할 곳이 마땅치도 않다. 이번 재앙의 원인도 늑장보고와 늦장대처로 인한 초동 진압실패 아닌가.”
“한밤에 상황실에 긴급히 달려 온 대통령”
- 노 대통령을 오랫동안 모셨는데 국가위기에 대해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대처했나.
“한마디로 왜곡 없이, 절삭 없이 그대로 국민들께 전달하려고 하셨다. 좀 불리해도 국민들에게 다 공개했다. 국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통한 신뢰 유지를 하려 했다.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피드백을 통해 국민들과 함께 위기에 대응하려고 하신 것이다. 참여정부에서 미스터리 사건은 없지 않는가.
이명박 정부와 비교하자면 논란이 되고 있는 천안함 사건 같은 경우 국방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정보를 공개했다. 그런데 초기에 거의 정보를 닫았다가 질질 끌려가며 조금씩 공개되다보니 오히려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 특별히 기억에 남는 노 대통령과의 에피소드는.
“처음 첨단상황실을 개장할 때 오셔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과 2005년 3월 낙산사 화재 때 한밤중에 상황실에 급히 내려오셔서 강원도지사, 지역 군단장 등과 직접 통화하며 대응방안을 찾으셨지만 끝내 소실되는 장면을 화상으로 지켜보며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인터뷰 후기 로그
필자는 90년대 중반에 강원도 인제 인근에서 최전방 GOP 사병으로 근무했다. 많은 분들이 말을 하듯 DMZ는 천혜의 자연이다. 그러나 산불에는 속수무책이다. TV 다큐로 천혜의 자연이 숨쉬는 ‘그 곳’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듬성듬성 불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군부대 훈련 중 발생하는 불꽃이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노무현재단
출처 : http://www.knowhow.or.kr/foundation_story/story_view.php?start=0&pri_no=99956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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