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는 다양성 교육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각자 개성을 가진 학생들이 일률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에 따라 창의적으로 배우고 스스로 진로를 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가 발간한 백서에 따르면 “기숙형 공립고 150개, 마이스터고 50개, 자율형 사립고 100개 등 300개의 다양화된 고교를 만들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고, 동시에 농어촌 지역의 고교를 활성화하며, 전문계 고교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돼 있다.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는 온전히 이주호 당시 한나라당의원(이후 교육부 장관)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각종 논문에서 “고교 평준화 정책 시행으로 인한 고등학교 체제의 획일성과 학교 선택권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고교 다양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자율형 학교 확대를 핵심으로 한 구체적 방안들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혀왔다. 이는 곧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져오던 고교 평준화 정책을 전면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한 입시전문가는 “이주호 (전) 교육부 장관의 머릿속에는 전 정권에서 추진한 모든 것을 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고교 평준화 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을 해결한다는 목적으로 등장한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는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장밋빛 기대와 달리 실패작이 돼버렸다. 11년이 흐르는 동안 자사고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당초 목표와 달리 변질됐다. 이명박 정부가 자사고 설립의 목표로 내세운 ‘다양성 교육’은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에 더 잘 진학할 수 있는 교육으로 전락했고, ‘수월성 교육’은 말 그대로 수월하게 지식을 잘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우선 선발되는 교육으로 변했다.
자녀가 자사고에 다니고 있는 부모들로서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정책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미 다니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 자사고 학부모 연합회는 지난 7월 3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사고의 폐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자기 스스로 자사고를 선택한 학생들의 교육열과 꿈을 꺾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부모들이야 “내 자식이 가고 싶다고 하고, 실력도 되고, 나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데 내 돈 주고 내가 보낸다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다만 ‘내 자식만큼은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욕망을 감추고, 자사고를 다양성 교육이 보장되는 양질의 교육기관으로 포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입 성공에 대한 적나라한 욕망을 읽을 수 있는 곳이 서울 자율형 사립고 연합회가 매년 개최하는 ‘예비 고1을 위한 서울 자사고 연합설명회’다. 다양성 교육을 표방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사고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서울 자사고 연합설명회에서 발표한 프레젠테이션의 장면이다.
“자사고는 우리 아이 같은 친구들이 많은 학교”, “1등급은 1등급처럼 살고, 7등급은 7등급처럼 산다.”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을 주장하는 편에서는 “자사고는 고교 서열화·등급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반면 자사고 존치론자들은 “다양성 교육을 놓고 서열화·등급화를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자사고 연합이 설명회에서 제시한 자료를 보면 그들의 주장과 배치된다. 자사고 스스로 학생을 성적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와 같은 친구들이 많은 학교’란 곧 우리 아이와 비슷한 학업·경제수준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 학교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자사고 연합은 또 대한민국 입시의 특징으로 ▲결과에 승복하기 어렵다 ▲입시 탓에 정상적인 교육이 어렵다 ▲99%를 패배자로 남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사고 교육은 ▲‘과정’에 승복한다 ▲입시 덕분에 정상적인 교육이 이뤄진다 ▲99%에게 자부심을 심어준다고 말한다. 이 프레젠테이션이 학부모와 학생을 자사고로 유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과도하게 자극적이고 노골적이다. 대한민국 일반고교 교육은 실패라는 것을 전제로 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실패작이 된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
“뭐 새로운 정보라고…, 고등학교 교사들뿐만 아니라 입시전략을 짜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건 ‘뉴스’가 아니다.”(강남 ㄱ재수학원 관계자)
전북 상산고가 ‘의대 사관학교’라는 프레임을 언론에 만들어 준 것은 김승환 전북교육감이지만, 상산고가 ‘의대 많이 보내는 자사고’라는 사실은 자사고를 목표로 해온 중학교 1학년 이상 부모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 이미 자사고는 소위 명문대와 의대를 가기 위한 ‘입시기관’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각종 ‘자사고 입시 가이드북’을 보면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이드북을 쓴 저자들은 대부분이 대학입시 컨설턴트들이다. 중학교 때부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명문고에 진학해 명문대에 입학하는 과정 속에 ‘자사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한 자사고 입시 가이드북 내용이다.
“의대는 수많은 중학생과 학부모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꼽는 곳이다. 하지만 자연계열 중에서도 최상위권 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는 의대로의 진학은 결코 쉽지 않다. 높은 수준의 학업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렇다면 특별히 의대 진학에 유리한 고교가 있을까. ‘특정 학교에 진학하면 의대에 진학할 수 있다’와 같은 공식은 물론 없다.…(중략)…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입시를 치르기 직전 3년간 몸담는 고교의 교육환경이 학생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수능 성적 의대 합격선 충족한 학생수, 자사고가 최다’라는 제목의 단락을 살펴보면 자사고가 자연계열 상위권 학생들이 많이 모인 과학고, 영재학교에 비해 의대 합격선 충족비율이 높다고 분석한다. 그 이유로 “과학고, 영재학교는 일반적인 고교 교육과정보다 다소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어 재학생들이 ‘수능체제’에 대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의대 지원 가능 학생수(수능 자연계열에서 고득점을 하는 학생수)’ 1위에 선정된 학교는 바로 상산고다(2015년도 기준). 2위가 경신고, 3위가 휘문고다. 전부 자사고다. 일반고인 수지고, 한일고가 뒤를 잇지만 이 두 학교 모두 지역 명문학교로 이미 알려져 있는 곳이다. 6위부터 8위까지는 중동고, 용인한국외대부고, 세화고다. 모두 자사고다.
‘의대 지원 가능 학생수’ 1위 상산고
상산고는 수능으로 의대에 진학하는 데에 특화된 전국단위 자사고다. 이 책은 ‘의대에 진학하려면 자사고를 가라’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의대에 진학할 만큼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꾸준히 포진된 고교는 그러한 성과를 뒷받침하는 교육 및 진학 노하우가 쌓여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내용의 가이드북은 시중에서 흔하게 구입할 수 있다.
교보문고에서 ‘자사고’를 키워드로 검색되는 각종 서적은 30권(품절 포함)에 달한다. 이만기 유웨이 교육평가연구소 소장은 “상산고는 수능형 자사고”라고 말했고,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은 “90년대 ‘수학의 정석’을 풀던 교육에서의 ‘잘함’을 특화시킨 것이 상산고의 정체성”이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학생을 성적으로 나누고, 사회통합전형(학업성적은 우수하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 선발전형)으로 20%를 선발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갈 수 없는 학교가 자사고다.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조사하고 발표한 ‘전국단위 자사고 10개교 학부모 부담금’을 살펴보면(2017년 회계결산 기준), 민족사관고 학생 한 명당 연간 납부해야 하는 학부모 부담금은 2589만여원에 달한다. 고교 3년이면 7768만여원에 달하는 돈을 납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위인 하나고는 연간 1280여만원을, 용인한국외대부설고는 1177만여원, 인천 하늘고는 1122만여원, 상산고는 1088여만원을 매년 납부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개 자사고 가운데 가장 저렴한 납부액을 기록한 광양제철고의 1년 학부모 부담금은 645만여원이었다. 이들 10개 전국단위 자사고의 연간 평균학비는 1133만원이다. 일반고 학비(279만원)의 4배다. 심지어 전국 31개 외국어고 평균 연 학비 764만원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광역 자사고의 연간 평균학비도 720만원으로 일반고보다 2.5배 높다. 돈이 없으면 다닐 수 없는 학교라는 표현이 과장된 말이 아닌 셈이다.
일선고교 입시담당자(교사)는 “자사고는 1학년 때부터 교과서 외에 각종 서적과 원서를 구입해 읽고, 다양한 학교 밖 참여활동이 많은데 그게 전부 돈”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회통합전형으로 입학해서 장학금 받으며 다니더라도 권당 몇만~10여만 원에 달하는 원서구입비, 체험활동비 등으로 나가는 돈은 학생이 부담해야 하다보니 그 돈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반고로 돌아가는 학생들도 있다”면서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한다”고 했다.
문제점이 많다면 자사고 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전부 일반고로 일괄 전환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도 않고 정부의 입장 또한 애매하다. 정부 역시 자사고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짜고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정치적 셈법에 휘둘리는 모양새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지난 6월 20일 이뤄진 전북교육청의 상산고 자사고 재지정 취소처분에 대해 보름이 지나도록 어떠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아무리 교육감이 재지정 취소를 해도 교육부의 승인이 없으면 취소처분이 내려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조건부 재승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2년의 유예기간을 둔 뒤 재심사를 하고, 그 전에 교육감이 요구하는 요건을 만족시키는 식이다. 여당에서조차 ‘상산고 편들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사고 폐지 논란의 정치적 셈법
교육부는 2017년 11월, 1단계 조치로 자사고와 일반고의 모집시기를 일원화하고, 2단계로 자사고 평가를 통한 단계적 일반고 전환을 추진하는 내용의 로드맵을 발표했다. 2단계까지 완성되면 3단계는 고교체제의 전반적 개편작업에 들어간다. 교육부는 지난해 1단계 조치에 해당하는 ‘고입 동시 선발’을 시행, 자사고와 일반고의 모집시기를 합쳤다. 자사고 우선선발을 없앤 것이다. 자사고 지원자의 일반고 중복지원도 금지했다. 이 조치에 반발한 자사고들이 헌법소원을 내면서 중복지원 금지는 유예하고, 동시선발만 이뤄졌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4월 자사고·일반고 중복지원 금지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1단계 조치는 절반의 성과만 이뤄낸 셈이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자사고 재지정 평가가 2단계 조치다. 7월 4일 기준으로 평가대상인 8개 전국단위 자사고의 재지정 평가는 하나고를 제외하고 모두 마무리됐다. 전북 상산고가 현재까지 유일하게 교육청의 재지정 취소 결정이 내려진 학교다. 하나고는 이미 12점 감점을 받은 상태에서 평가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16개 광역 자사고는 안산 동산고(경기)와 계성고(대구), 해운대고(부산)만 평가가 마무리됐다. 안산 동산고와 해운대고는 기준점(70점)에 현저히 모자라는 점수로 재지정 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인천 포스코고는 7월 9일, 서울 13개 자사고는 7월 10일 평가결과가 나온다. 전국 자사고 8개교 중 1개교만이 재지정 취소처분을 받았고, 서울 13개 자사고 역시 전부 재지정 취소처분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하는 교육관계자들은 없다. 즉, 대부분의 학교가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에는 계속 자사고 형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현재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자사고의 자발적 일반고 전환이다. 실제 2019학년도 자사고 42곳 가운데 18곳에 신입생 미달사태가 벌어졌고, 28곳은 경쟁률이 하락했다. 학부모 부담금 의존도가 높은 자사고로서는 미달사태가 지속될 경우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우리 교육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 있느냐 여부다.
상산고가 ‘의대 입시 사관학교’로 전락할 동안 교육당국의 누구도 이를 지적하고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전북교육청은 재지정 평가과정에서 다양성 교육은커녕 입시를 위한 국·영·수 위주의 교과과정을 운영하고, 문·이과 통합도 하지 않은(문과가 2개, 이과 10개) 상산고에 대해 ‘다양한 선택과목 편성·운영’ 항목에 5점 만점을 줬다. ‘기초교과 편성비율’ 항목 역시 5점 만점이다. 79.61점이라는 점수는 어쩌면 후하게 내린 평가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태근 전 이투스 평가이사는 “지금부터라도 교육청이 정확한 자사고 평가기준을 마련해 설립 취지와 존재 이유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그 근거에 따라 일반고로 전환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평가 근거와 규정에 따라 절차를 진행할 때 문재인 정부의 교육방향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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