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의 ‘깽판’과 윤증현의 ‘깽판’ & 조선일보 두 얼굴

pulmaemi 2009. 3. 2. 07:54

- 같은 발언이라도 누구 입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극과 극

(데일리서프 / 문한별 / 2009-02-28)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26일 한 강연에서 국회에 불만을 표시하며 '깽판' 운운하는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국회가 깽판이라 세제 혜택을 못 주고 있다"는 말이 바로 그것. 그는 또 "국회가 저 모양이라 민생법안 처리가 안 되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거나 "선거는 도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거침없이 쏟아냈다.

 

경제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여와 야의 극한 대치로 정부가 마련한 여러 민생법안들이 시급히 처리되지 못하고 늦춰지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고 속상해서 한 말이겠지만, 그러나 윤 장관의 '국회=깽판' 발언은 여러모로 듣는 이의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우선, 국회가 아무리 한심스럽게 보였을지라도 그러나 국회는 국민 대표기관이자 민의의 전당이요, 그 안에서 일하는 국회의원들은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함부로 하대하고 무시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란 소리다. 이명박 정부 눈에 평소 국회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일개 행정부처의 수장이 감히 국회를 향해 '깽판' 운운하며 비하하는 말을 입에 담을 생각을 했을까.

 

국회를 얕보는 오만한 발상뿐만 아니라 발언의 정확성도 문제다. 국회가 현재 파행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한나라당 탓이 크다. 긴급한 민생법안도 아닌 미디어법을 야당과 협의도 없이 날치기 강행처리 하려다 일을 이따위로 어렵게 만든 것 아닌가. 따라서 윤 장관이 굳이 현 사태의 책임을 물어 비판하고자 한다면, 국정 파트너인 한나라당을 나무라야 옳다. 정부와 소통·협력해서 민생경제를 살리는데 앞장서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망치고 있는 여당의 꼬라지가 그의 눈엔 안 보이는 걸까.

 

▲ 2월 28일 자 조선일보 사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우리의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게 있다. 바로 '깽판' 발언을 대하는 언론, 곧 조선일보의 이중적 태도다. 조선일보는 윤 장관의 '깽판' 발언을 28일 자 사설로 다루면서 <장관한테 "깽판 국회" 소리 들어 싸다>(제목)이라고 이례적으로 옹호했다. "정부 부처 장관이 입법부를 향해 한 말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친 발언"이긴 하지만, "그러나 어느 국민도 이 말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듯한 게 요즘의 분위기"라는 게 조선일보의 변.

 

조선일보는 이어 25일 한나라당의 미디어 법안 전격 상정 이후 전면 마비상태로 접어든 국회 상황을 자세히 전하면서 "장관이 국회에 대고 "깽판" 운운해도 국민이 덩달아 '그래 싸다' 할 형편이 돼버리고 말았다"는 말로 사설을 매조지 했다.

 

그러나 같은 '깽판' 발언이라도 조선일보가 싫어하는 정치인 입에서 나오면 반응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조선일보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악연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후보 시절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는 발언을 조선일보가 얼마나 악랄하게 우려 먹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게다.

 

당시 조선일보는 노 후보의 '깽판' 발언을 2002년 5월 29일 자 1면 상단에 큼지막하게 배치해 부정적 여론을 불 지피고, 그 다음 날 <“남ㆍ북만 성공하면 깽판 쳐도…”>란 사설을 작성해 거듭 말의 경박함을 꾸짖고 나섰다. "선의로 해석하면, 남북대화가 활성화돼야 발전할 수 있다는 논지의 강조 어법이라고 짐작"은 되지만, 그러나 "한 나라의 국가원수를 지향하는 정치인으로서 최소한의 말의 절제는 지켰어야 했다"는 거다.

 

조선일보는 "국민은 특정 정치인이 사용하는 말을 통해 그의 사고의 폭과 깊이, 품성과 품위를 가늠하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평가한다"면서, "만일 노 후보가 대통령이 돼 청와대 회의나 각료회의에서 ‘깽판’ 운운해보라. 국내외에서 나라의 격이 어떻게 그려지겠는가…. 국정을 책임지려는 인사의 이야기론 그냥 흘려보내기 힘들다"고 추상같이 비판했다.

 

똑같은 '깽판' 발언이라도, 노 전 대통령에겐 그 진의와 상관없이 말의 품위를 따져 비판하고, 윤 장관에겐 말의 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진정성만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조선일보의 두 얼굴이 새삼 무서워 보이지 않는가. 이런 두 얼굴의 신문이 언론을 빙자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며 멋대로 '깽판'치고 있다는 사실이?


※ 출처 -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8072

 

ⓒ 문한별 편집위원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1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