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잡동사니

영화로 정치 읽기 ③ 토탈리콜: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은 과연 누구의 생각일까?

pulmaemi 2012. 7. 9. 11:18


토탈리콜: 지금 『내가하는 생각』은 과연 누구의 생각일까?

 미래경영연구소 소장 황 장 수

 

 

1. 최근 영화 토탈리콜이 리메이크 되어 다시 개봉을 앞두고 있다.

 

SF 소설가 필립 K 딕의 1966년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가 원작인 이 영화는 1990년 폴 버호벤이 이미 영화로 만든바 있는데 이번에 다시 만들어져 개봉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인위적 기억 주입 시스템의 노예가 된 주인공이 어느 날 자각 현실을 깨닫고 획일적 기억 주입으로 손쉽게 대중을 통제하는 독재체제를 타도하려는 스토리이다.

즉 『내 기억이 과연 원래 내 자신이 만들어낸 기억인가?』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개성이 독특했다. 사람은 나이가 먹으면서 사회에 순응하고 동화되어 간다고 했는데 지금 나는 20대 운동권 시절보다 더 반항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

과거에는 나 스스로 타고난 기질과 개성이라는 유전적 요인 때문이라 단순히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남들과 다른 사고 행태가 더욱 심화되면서 요즘은 이것이 내 삶의 진화과정에서 굳어져온 반응이 습속화 된 것이라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진화가 아닌 퇴화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내가 알아온 많은 사람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나를 『비정상적』 내지 『또라이』 혹은 좋게 말해 『성격이 강하고 독특하다』고 평가한다.

나는 동문회나 친구들 모임, 동호회, 향우회 등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각종 지ㆍ혈ㆍ학연으로 이루어진 모임에 아예 안 나간다. 친척들 모임이나 지인의 각종 결혼, 장례 등의 참석도 피치 못할 경우에만 가고 봉투나 대신 보낸다.

나는 이런 모임에 가서 나누는 대화나 사고가 전혀 즐겁지 않고 솔직히 고통스럽다.

명색이 사회운동을 오래해 왔고 정치권에 몸 담았다고 하면서 이런 성격을 가진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정치를 할 때도 조그만 공기업 사장을 할 때도 의례적 행사에 참석하고 악수하고 사진 찍고 높은 분 수행하고 하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어느 수준 되면 다들 하는 골프 또한 어느 순간 골프장에 가서 나누는 대화와 골프장에서 보여지는 행태가 보기 싫어 발을 끊었다.

평소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을 보거나 읽은 뒤 나누는 후기에서 나는 남들과는 대체로 상당히 다른 방식의 『오독』을 하는 일이 흔하며 과거 영화 보고 나서 집사람과 해석을 둘러싸고 싸운 적이 여러 번이다.

교회를 20년 가까이 다녔지만 아직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으며 예배시간에 잡념이나 반항이 가득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흔히 한국사회에서 요구되는 나이 듦에 따른 『사회화』 즉, 나이가 들어 결혼, 직장, 승진, 출세, 재테크, 사교, 의례적 허세에서 제로에 가깝다.

아직 내 손으로 집, 땅 한 평 안 샀고 주식, 펀드투자 한번 한 적이 없다.

돈은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쓰지 않는다.

나이 오십을 앞두고 전세에 사니 주변 가족들의 성화도 야단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비정상적인 가격의 집을 사기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기 싫었고 나의 자존심을 꺾고 돈벌이에 나서기도 싫었다.

그러다 보니 큰 돈 벌 기회나 출세할 기회를 여러 번 걷어찼고 나를 비정상적으로 보는 주변 사람은 점점 늘어간다.

이번 총선에서의 불출마 이후 더욱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내가 지금 가지게 된 이런 독특한 나만의 사고는 과연 어떻게 해서 내 생각이 되었고 나는 왜 주변사람들과 생각이 이토록 다른 걸까?

 

2. 사실 오늘 『한국 대선주자는 왜 저토록 상상력이 빈곤할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다 이 생각이 딴 생각을 낳아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올 대선에 출마하려는 후보자들이 내놓은 대략적 공약을 보면 보편적 복지, 일자리 창출, 복지와 성장의 조화, 국민행복 등 서로 너무 엇비슷하다. 특히 야당의 여러 주자들의 캐치프레이즈는 너무 비슷해 본인이나 캠프 관계자 외에 나머지 국민들은 누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무도 구분 못할 것이다. 오죽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 best라 평가 받겠는가?

그러면 왜 이들 대선주자들은 상상력이 빈곤하고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을까?

이들 또한 주입되어진 의식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출신지역, 계층, 거주지역, 직업, 나이와 세대, 소속, 자산에 따라 사고가 대체로 획일화 된다.

위의 구분에 따라 현 거주지, 사교, 모임이 정해지며 끼리끼리의 문화와 주제에 따라 얽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신지역, 세대, 현거주지에 따라 대체적으로 투표성향이 확연히 구분되고 유권자의 요구를 엑기스화 하여 샘플링하는 정치권은 그들 주 지지자 층을 향한 공약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간에 20~30% 가량 정치적 사고가 고정되지 않고 떠도는 유동층이 있지만 이들의 사고는 대체로 『시의성』과 일치해 파악하기가 매우 쉽다.

사실상 각기 40%에 가까운 숫자는 앞에서 언급한 조건에 따라 무조건 고정 지지층이 되어있다.

이 중 5~10%는 『무슨 무슨 빠』라는 매니아 층이 되어 맹목적 지지에 눈이 멀어있고 이들이 여야 정당의 후보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여야 정당은 여기에 맞춰 약간의 융통성만 주면서 중간 유동층 흡수에만 노력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파격이나 혁신은 모험이 되고 대충 거창하게 시대정신이라 불리는 『시의성』에 맞게 적절히 안전운행만 하면 되는 것이 정치권의 공고한 습관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는 각 당내 하위 후보조차도 과감한 도전이나 도발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매번 자기가 속한 진영의 틀 내에서 그 말이 그 말 같은 비슷비슷한 공약이 난무하고 있다.

정당 외부의 사회단체, 지식인, 언론 등 오피니언 리더 계층 또한 여야 자기의 소속 진영에 따라 치어리더 역할에만 몰두할 뿐이다.

이러니 어찌 대선주자나 정치인에 파격을 요구하거나 진화를 바랄 수 있을까?

이것이 호남사람은 전반적으로 진보이고 영남사람은 대체 보수인 말도 안되는 『조건 진화론』을 낳았다.

 

3. 그러면 왜 한국인은 이토록 획일적으로 사고하게 된 것일까?

 

거대한 중국의 변방에서 그들이 보기에는 오랑캐에 불과한 한국이 수천 년을 살아남아 독자적 글,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유지해온 것은 『한국인 고유의 집요한 적응방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 들어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정치적 민주화와 평등을 지향하는 한국인의 강한 욕구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절차적 민주화와 성장을 동시에 이뤄낸 것 또한 사실이다.

80년대 후반 이후 성장이 가속화되고 소비자본주의가 본격화 되면서 한국 유사이래 처음으로 먹고 자고 입는 의식주가 안정화 되어갔다.

이후 자산축적과 소비문화 등이 어울려 탐욕에 의한 라이프 사이클이 완성되며 이것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면서 『사고의 획일화』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가구 1주택(특히 아파트)가 늘어나고 중산층의 보편화(실제보다 의식이 중산층이라고 느끼게 만든 영향이 크다)가 이루어지면서 『중산층 라이프 스타일』이 규범처럼 무의식 중에 만들어지고 세대를 거치며 굳어져갔다. 이때 태어나서 보육 및 사교육, 고교, 대학진학, 스펙, 직장, 결혼, 주택, 재테크, 출세 그리고 다시 자녀 부양으로 이어지는 한 세대의 라이프 사이클이 완성단계에 이른 것이다.

즉, 80년대 이후 30여 년 이상 이런 사이클이 그때 낳은 자녀가 다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중산층 생활양식』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양식』은 세대를 거쳐 『아비투스』가 된 것이다.

대체로 이에는 중산층의 수준보다 높은 상류층의 소비, 생활, 사교, 교육 행태를 문화적으로 모방한 방식이 주로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돌잔치, 유치원, 사교육, 특성화 고등학교, 대학진학, 결혼, 장례, 재테크 등에서 나타나는 대체적 중산층의 문화소비 양식이 어울리지 않게 겉치레와 과소비에 치중하는 이유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4. 문제는 이러한 물질적 소비가 중산층의 의식과 삶의 양식을 어떻게 지배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일까?

 

오늘날 자본주의는 후기 소비 자본주의 사회라고 일컬어 진다.

즉, 생산이 위주가 된 산업자본주의에서 이제 소비가 중심이 된 소비자본주의 시대가 된 것이다. 과거 대량생산, 대량소비에서 이제 소량 다품목 생산 차별소비의 시대로 발전한 것이다.

차별소비란 자신의 계층을 타인과는 다른 배타적 지위임을 드러내는 소비행태를 말한다. 미국의 제도학파, 경제학자 『베블렌』은 이를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라는 글에서 이러한 차별소비라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 경제학을 정밀히 분석한 바 있다.

또 60년대 말 프랑스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에세이스트 『기 드브로』는 『상황주의자』를 자처하며 현대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달이 대중을 문화적으로 빈곤화 시키며 자동화된 생산이 대량소비 사회에서 의식을 획일화 시키며 이데올로기를 물질화 시킨다고 주장한바 있다.

이러한 소비이데올로기는 본질보다 외양, 현실보다 환상, 원본보다 복사가 더 선호되게 만들며 이를 자극하는 광고, 홍보, 이미지의 유포, 문화의 상업화 등 스펙터클을 통한 감각의 남용을 통해 이미지를 현실과 착시하게 만든다.

즉 실제 처한 현실보다 인터넷, TV 등 미디어 등을 통해 전해진 『가상의 소비사회』가 대중의식을 마비시키고 그것이 지배적 생활양식이 되어 보편적 의식까지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5000원짜리 밥을 먹고 동일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시급 5000원 미만이 30시간 일하여 15만 원짜리 빈폴 셔츠를 입는 것이나 월급 150만 원짜리 경리 여직원이 300만 원짜리 루이뷔통 백을 메는 것이나 월급 250만원 신입사원이 결혼 예물로 1000만 원짜리 샤넬 백을 구매하는 것은 우리가 후기 소비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가 되었고 이것이 우리의 생활양식으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월급쟁이 평생의 저축, 재테크가 아파트 한 채로 남은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5. 문제는 『차별소비』는 결국 『가격의 차별』을 말하기에 소비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러한 늘어나는 소비비용의 감당을 정상적 임금소득으로는 대부분이 불가능 해지기에 너도나도 부동산 금융자산 투기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생산양식의 한계는 생산성의 둔화를 부르고 투기로 집중된 경제는 위기를 부르게 되어있다.

평균 이윤율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투자는 둔화되며 소비는 축소된다.

결국 제조업은 축소되어가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질 낮은 서비스 직종만 늘어가며 일자리 또한 줄어들고 있다.

차별 소비가 가능한 대상은 축소되어 어느 날 자기의 소비행태와 자기의 계급이 불일치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명품백이 명품계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국 다수는 언젠가는 원래 제 계층으로 다시 추락하고 사회는 소수의 살아남은 자와 다수의 추락한 자로 양분되어 간다.

사교육, 고교, 대학진학, 취업과정에서 『신분 재생산 양식』은 이러한 계층 구분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고 이후 직장, 결혼, 주택 등에서 굳어진 계층구분은 고착화 되어간다.

지금 중산층의 의식을 지배하는 생활양식과 정치의식, 즉 지ㆍ학ㆍ혈연과 계층, 세대에 따라 획일화된 의식은 80년대 이후 천민 중산층 사회구조에서 굳어진 습속이다.


진보와 보수, 여야 정당을 지지하는 고정계층 또한 철저히 그 내부에서 양분된다.

진보, 보수 내 각기 상층을 차지하며 사회의식을 생산해내는 언론, 지식인, 사회단체 등 주도계층과 정치인은 정치활동의 결론에 대한 최대의 정치적 수혜자들이다. 이들의 생활양식 또한 진보 보수 좌우 가릴 것 없이 근본적으로 소비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관계와 조건에 따른 중산층 계급이 이들 의식을 확산, 대중화 시키는데 이들은 철저히 정파의 이해가 자기개인에게 미치는 이익을 따진다.

지난 2002년 노통에 열광했던 이들 수도권 30~40대 화이트칼라들이 2007년 대선에서 MB에게도 돌아선 것은 소비자 계층 상승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으로 진보 보수 내 각기 하층계급이 있다. 이들은 서민보수, 무슨 무슨 빠 형태로 대체로 극렬한 정치적 지지자 집단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기가 고정시킨 정파에 무조건 표를 던지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비정규직, 일용직, 파트타임, 소자영업자, 무직자, 구직자, 빈곤층 등으로 대별되는 이들의 의식은 대체로 정치과잉 아니면 정치잉여인데 어느 쪽이나 모두 자기 계층의 이해를 제대로 영악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이용되어지거나 소모되어진다.

 

정치인들은 변화보다 자신의 진영내 매뉴얼을 마치 시대정신인 듯 포장시키고 거기에 과도한 의식을 부여한다.

대중은 좀비처럼 이를 확산시키고 열광하며 소모되어진다.

진영 내 상층은 정치활동 결과에 관계없이 그 진영 논리에 다른 현실적 이익을 이미 충분히 취하고 있는 기득권이다.

불쌍한 것은 인터넷, SNS, 거리에서 이념에 소비되어지는 진영 내 하층 계급이다.

(진영 내 중간층은 현실적 이해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움직이고 정치 결과에 따른 이익은 볼 수 있지만 손해 볼 일도 별로 없다)

 

내 의식이 독특하다고 취급받는 것이나 대선후보들 의식과 공약이 비슷한 것 또한 소비문화 사회와 진영적 필요에 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다수 대중들의 삶의 패턴과 생활양식이 일정하게 굳어져 있고 각기 그 계층과 조건에 따라 진보, 보수, 여야로 굳게 나누어진 의식 또한 알고 보면 그 또한 원래 자신의 생각이 아닌 주어지고 주입된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은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과 정치과잉과 이해를 조장하는 상층계급이 내 생각과 사고에 주입시킨 『남의 의식』인 것이다.

 

6. 문제는 현재 진보보수, 여야의 정치의식 그 자체가 소비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가짜 나의 의식』을 깨뜨리기가 불가능 하다는데 있다.

 

정치 또한 따지고 보면 포스트 모던한 사회의 소비문화가 만들어낸 양식 중 일부가 아닌가?

정치의식의 생성 전파과정, 홍보, 여론조사, 기획, 브랜드 네이밍, 모바일 경선, 완전국민경선, SNS, 팟캐스트, 캐치프레이즈, 토론 등 거의 모든 정치양식이 후기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전파 양식과 거의 흡사하지 않은가?

정치 또한 현 시대에서는 일종의 의식에 대한 소비양식에 불과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사고체계가 과연 나의 것인지 끊임없는 자각이 필요한 세상이다.

리메이크 되어 새로 개봉하는 영화 『토탈리콜』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우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