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청년에게 꿈을

아이를 쓸모 있게 키우기(1) 아이에게 배우자

pulmaemi 2010. 12. 8. 18:01

청년 실업자가 넘친다. 대학에 들어가고서도 제대로 낭만을 누릴 새도 없이 취업준비에 올인 해도 취업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학 졸업을 늦추는 젊은이들이 둘레에 흔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안 되는 젊은이들은 또 얼마나 많나. 심지어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를 마치고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니 더 이상 말이 안 나온다. 또한 어렵게 취업한 젊은이들조차 불안정한 취업과 앞날을 적지 않게 고민해야 한다. 그러니 언제 한번 제대로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이 모두가 본인이나 사회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공부만 하면 성공한다. 지금 참고 이 다음에 즐겨라.’라는 주문을 셀 수 없이 듣고 자란 사람들이 점점 쓸모없어지는 세상이 되어간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건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여기서는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집중해보고자 한다. 우선 나는 부모의 교육관을 다시 세우는 데서 출발해야한다고 믿는다. 아이들은 물론 이 세상 만물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쓸모 있는 존재다. 풀이나 나무는 물론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 강가에 모래 한줌조차 그 나름 쓸모가 있다.

그런데 경쟁 구조에 맹목적으로 휩쓸리다 보면 멀쩡한 아이를 쓸모없게 만들게 된다. 남과 견주는 거 자체가 본인을 무시하고 쓸모없게 만들지 않는가. 시험문제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열 문제 가운데 일곱 문제를 맞혔다면 맞힌 걸 기뻐하기보다 틀린 세 문제로 아이를 몰아칠 때 아이는 존재감을 잃게 된다.

아이를 쓸모 있게 키우는 건 의외로 쉽다. 아이가 갖는 생명 본성을 잘 살리면 된다.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 첫째, 아이들은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걸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둘째, 아이들에게 일할 권리를 주자. 또는 도움 받는 것보다 도와주는 걸 기꺼이 하게 하자. 셋째, 자신에게 소중한 걸 하는 게 세상에도 쓸모가 크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보자.

먼저 아이들은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걸 더 좋아한다.  아이들은 배우기만 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보통 ‘쓸모 있다’고 했을 때 이는 ‘사회적인 쓸모’를 뜻한다. 배운다는 건 개인적인 것이다. 배우는 건 바로 개인 당사자 자신이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친다는 건 나 이외 누군가를 대상으로 한다. 가르침에는 곧 사회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인간은 누구나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나이가 많고 적고, 남자냐 여자냐를 떠나서. 그런데도 일반 교육에서는 공부를 다 마친 다음에 취업을 해야 쓸모 있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이는 자칫 아이를 쓸모없게 만드는 지름길로 인도하는 꼴이다. 아이는 가정이라는 공간 속에 이미 사회적인 존재다.

그럼. 아이가 어떻게 남을 가르치는가? 간단하다. 부모가 먼저 아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만 주면 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재잘재잘. 만일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고 하자. 아이가 그 책에 흥미가 있다면 아이는 한두 번만 듣고는 그 다음에는 그 책을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한다. 아이가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부모가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보면 좋다.

“어때? 이번에는 네가 읽어줄 수 있니?”

부모가 아이 가능성을 믿는다면 아이 역시 흔쾌히 읽어줄 수 있다. 아니, 아이가 호기심이 살아있다면 한번만 읽어주어도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읽어주겠다고 먼저 책을 빼앗을지도 모른다. 실제 내가 잘 아는 이웃의 다섯 살 난 아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엄마, 잘 들어. 내가 읽어줄 게.”

물론 이 아이는 글자를 모른다. 그렇다. 글자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니, 글자에 구애받으면 아이 상상력을 억압하고 또 아이를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글자보다 아이가 먼저 아닌가. 그림책을 밑그림 삼아 아이는 자기 처지를 도입하면서 자유롭게 재창조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때 아이 이야기가 책과 다르다고 타박하면서 고치려고 하면 안 된다.

“틀렸잖아! 그건 이거야!”

이런 말들은 아이에게 상처가 되고, 자신감을 잃게 만들며,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키울 뿐이다. 틀렸다는 건 부모 기준이다. 부모가 글자를 바로 가르치고 싶은 욕심. 아이는 아이 식으로 재창조했기에 틀린 게 아니다. 틀렸다는 말을 쉽게 하는 건 아이의 존재를 흔드는 꼴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가 세상을 잘못 받아들인다고 여기에 되고, 세상과 배움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심지어 부모조차 아이한테는 두려운 대상이 되면서 점차 아이는 말을 잃게 된다. 말만 하면 틀리고, 말만 하면 부모가 고치려고 하니 그나마 아이는 말을 안 함으로써 최소한의 숨통을 유지하는 것이다. 만일 아이가 말을 잃었다면 부모는 근본에서 자녀교육을 고민해야 한다.  

아동 문학가 이오덕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다시 나대로 살려 쓰면 어린이는 시인이자, 동화작가이며, 화가이고, 작곡가이며, 요리사다. 농부도 되고, 교사도 된다. 아이는 자신이 만나는 순간마다 이를 내면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재창조해낸다.

그러니까 아이가 그림책을 자기 식으로 창조해내는 걸 부모는 즐기고, 가능하다면 아이 입말을 살려 기록해두면 좋다. 이렇게 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걸 알기에 또 다른 책도 누군가에게 읽어주고 싶어 한다. 이게 어디 책 만인가? 자신이 듣고 보고 행한 모든 걸 말하고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이를 잘 살려줄 때 아이는 자연스럽게 쓸모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다만 어려운 건 부모나 교사가 아이의 생각을 들어줄 형편이나 여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실 한 반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있고, 교사가 정해진 진도를 나가야한다면 이런 식의 교육방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이가 가르치는 존재가 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부모 역시 바빠서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없다면 이 역시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는 교육 철학의 문제가 된다. 아이를 키우는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교육비를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해야 하는 시간이라면 그 일부만 투자해도 아이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거니까. 부모가 교사가 될 능력이 없다고 아이를 내칠 필요는 없다. 사실 어느 부모가 충실한 교사역할을 할 수 있겠나. 적지 않은 교사들도 자기 역할이 버겁다는데 하물며 부모는 말해서 무엇 하랴.

그러나 부모는 교사 역할로 아이를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그냥 아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면 된다. 교사 역할은 어렵지만 학생 역할은 쉽다.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쩌다가 가끔은 아이가 경험이 많은 부모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도 있다. 그거야 기꺼이 답을 해 줄 수 있다. 답을 모르면 함께 알아보자고 하면 된다.

이렇게 아이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겪어나가는 힘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누군가 들어준다면 아이는 관심 분야가 확장되고 깊어지면서 체험하는 영역도 넓고 깊어진다.

또한 누군가를 가르쳐보면 어떤 걸 안다는 것도 그 질적인 내용에서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 하면서 친구들에게 기꺼이 설명을 해주는 친구가 점점 더 공부를 잘 한다는 사실. 그 이유는 친구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더 풍부히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아는 걸 넘어 상대가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는가 까지 스스로 터득하기 때문에 한결 창조적으로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친구가 잘 이해를 못한다면 좀더 쉬운 문제를 내어 이해를 돕고자 한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목말라 하는 갈증을 채워주는 맞춤 교육이 된다. 이런 경험은 이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된다. 쓸모는 먼 미래에 생겨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에 있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자라다보면 점차 부모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어 성장한다. 아이는 이렇게 나날이 새롭게 성장하는 반면 부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고, 늙어간다. 그러니 부모는 아이를 통해 배우고 또 아이의 성장에너지를 받아 조금이나 젊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아이 좋고, 부모 좋은 길이다. 덩달아 세상에도 좋다.

이렇게 성장한 젊은이들은 섣불리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려들지 않는다. 부모가 그러했듯이 기꺼이 상대방에 귀 기울이고 들어보고자 한다. 그게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설사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서더라도 적절하게 질의응답을 하면서 교육을 진행하게 된다. 교육 역량은 자신이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가르치면서 배운 사람은 얼마든지 배우면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십여 년을 오직 배우기만 한 사람은 설사 ‘가르치는 자격증’을 땄더라도 가르치는 걸 두려워한다.

아이를 쓸모 있게 만드는 그 첫째 관건은 바로 부모가 아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배우는 데 있다.  

 

 

                                                                                           '아이는 자연이다'의 저자 김광화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