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드골의 나라 노무현의 나라

pulmaemi 2010. 10. 26. 12:10


드골의 나라 노무현의 나라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10-25)


윈스턴 처칠은 지난 9월 초 2025명의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차대전 이후 가장 뛰어난 총리로 뽑혔다. 처칠이 좋은 총리였다고 응답한 영국인은 79%로 5명 중 4명꼴이었다. 2위는 대처(47%), 3위는 블레어(39%)였다. 그러나 부정적 평가까지 감안하면 처칠에 대한 영국인의 호감도는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처칠이 나쁜 총리였다고 응답한 영국인은 4%에 그쳤지만 대처와 블레어는 각각 40%와 47%의 영국인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결국 처칠은 종합 호감도에서 100점 만점에 75점을 받았고 대처는 겨우 7점을, 블레어는 마이너스 8점을 받은 셈이었다. 처칠은 몇 해 전 BBC 여론조사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국인 2위로 뽑혔다. 1위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었다. 단순히 이차대전 이후가 아니라 영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처칠은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3대 대통령은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공황과 이차대전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특히 대공황을 능가하는 심각한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과감한 공공 정책으로 서민을 보듬어 안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향수를 느끼는 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루스벨트는 2010년 시에나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미국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러나 자국민으로부터 국난을 극복한 최고의 지도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변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누가 뭐래도 샤를 드골이다. 프랑스인이 드골을 가장 존경한다는 것은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이 시간 낭비일만큼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만 2005년에 드골은 이미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선정되었다. 프랑스인 사이에서 드골은 le general로 통한다. le는 영어의 정관사 the에 해당한다. 단 하나뿐인 장군, 유일무이한 장군이라는 뜻이다. 드골은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맥없이 무너지고 남부 프랑스의 비시에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 정권이 들어서자 영국으로 망명하여 자유프랑스 임시정부를 세우고 프랑스의 수반으로서 열악한 물질적 상황에서도 처칠, 루스벨트에게 조금도 기죽지 않고 프랑스의 국익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고 1944년 프랑스군을 이끌고 파리로 들어와 조국을 해방시켰다.

 

같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지만 영국이 프랑스의 식민지를 가로채려고 한다고 믿었던 드골은 적수인 독일보다 우군인 영국을 더 미워해서야 되겠느냐고 처칠 부인이 애정을 가지고 충고하자 “프랑스는 친구 따위는 없고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고 쏘아붙였다. 드골은 평생 조국 프랑스의 이익만을 생각한 지도자였다. 드골주의는 그런 드골의 조국 수호 정신을 추종하는 드골의 지지자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아무리 자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영국에는 처칠주의는 없고 미국에도 루스벨트주의는 없다. 드골을 짓밟는 우익 지도자는 프랑스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드골주의 정당은 특정 정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드골주의는 프랑스 우익 정당이 국민으로부터 표를 얻기 위해 드골의 노선을 따르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내거는 이름이다. 드골주의는 애국의 보증수표다. 드골은 죽었지만 드골의 조국애는 프랑스의 등뼈로 건재하다.

 

처칠, 루스벨트, 드골은 전쟁이라는 국난을 맞아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다는 점 말고도 살아생전에 자기 나라 국민으로부터 충분히 인정을 받았고 모두 자연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처칠은 1965년 런던 하이드파크 근처에 있던 자택에서 부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90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루스벨트는 유럽 전선에서 승리가 거의 굳어지던 상황에서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찾은 요양지에서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급성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드골은 1970년 고향 집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다가 80세 생일을 두 주일 앞두고 심장마비로 의자에 앉은 채로 죽었다.

 

 

최근 시사저널이 30개 분야의 전문가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여론조사에서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 1위(11.7%)로 뽑혔다. 2위는 고 김대중 대통령(9.5%), 3위는 박정희(9.2%), 4위는 김구 주석(6.4%)이었다.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뽑힌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상해에서 임정 수반으로 대일 항쟁을 벌이면서 풍찬노숙했던 김구 주석은 친일 세력에게 암살당했다.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충격을 받고 심신이 급격히 쇠약해졌으므로 자연사라고 보기가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은 물리적으로는 자결했지만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악랄하고 비열한 정치 보복으로부터 주변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으므로 내용적으로는 이 정권과 이 정권의 앞잡이인 검찰로부터 살해당한 셈이다. 그러나 이 정권은 김구 주석으로부터 장준하 선생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위해서 몸을 바쳤던 의로운 사람들을 어김없이 제거해온 세력의 본산인 조선일보의 앞잡이일 뿐이다. 검찰은 친일 세력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노무현을 제거하라는 특명을 이미 노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지면을 통해 융단 폭격처럼 퍼부은 조선일보의 어명을 떠받드는 주구 정권의 새끼 주구일 뿐이다. 한국에서 모든 악의 뿌리는 조선일보로 통한다.

 

드골이 프랑스를 탈환한 뒤 독일에 부역한 언론인을 응징한 것은 단순히 4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언론인들의 행태에 분노해서만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변변히 저항 한번 못해보고 맥없이 무너진 것은 이미 1930년대부터 프랑스의 언론이 썩을 대로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투’를 건네는 정치인에게는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고 언론에 굽실거리지 않는 정치인에게는 공갈 협박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제3공화국 시절 프랑스 언론의 관행이었다. 우익 언론은 빨갱이 사냥에는 광분하면서 독일이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를 지원하면서 벌인 게르니카 학살은 모른 척했다. 게르니카 학살의 책임이 독일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프랑스인은 10명 중 3명도 안 되었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익 언론은 자기들 요구를 백 퍼센트 안 들어주는 정부는 무조건 사이비 정권으로 몰아붙였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맞서려고 했던 레옹 블룸 정부에게 우익 언론은 왜 프랑스를 다시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느냐고 악을 썼고 좌익 언론은 민생이나 챙기라며 비아냥거렸다. 프랑스의 등뼈는 이미 무책임한 좌우 언론이 말아먹은 지 오래였다. 등뼈가 녹아버린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진 것은 당연했다. 드골은 프랑스의 등뼈를 다시 세우려면 언론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나마 항독 투쟁 과정에서 친독 프랑스 신문들의 악선전에 시달리던 드골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알베르 카뮈 같은 작가가 찍어내던 <콩바>(전투) 같은 레지스탕스 신문이었다.

 

처칠, 루스벨트, 드골은 눈에 띄고 또 이기면 생색이 나는 전쟁을 벌이면서 영웅이 되었지만 노무현은 눈에도 안 띄고 이긴다 하더라도 생색이 안 나고 욕만 먹기 십상인 전쟁을 혼자서 외롭게 벌였다. 그것은 언론과의 전쟁이었다. 아니,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국민의 이익을 언제나 최상의 가치로 섬겼던 노무현은 공권력과 언론이 건강한 긴장 관계를 맺는 것이 국민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고 보았기에 공직자에게 언론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당당한 처신을 요구했고 언론 권력에게는 사실에 입각한 정당한 비판을 요구했을 뿐이다. 기자실이라는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말고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음습한 언론 권력 담합의 해체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국민의 이익보다는 사익과 자기 밥그릇이 언제나 우선인 한국의 언론은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물어뜯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육신은 물어뜯을 수 있을지 몰라도 노무현의 정신은 물어뜯을 수가 없다. 노무현은 시사저널과 미디어리서치가 얼마 전에 실시한 별도의 여론조사에서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 뽑혔다. 또 한국대학신문이 200개 대학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벌인 정치인 선호도 조사에서도 1위로 뽑혔다. 처칠, 루스벨트, 드골은 타국과 싸워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에 타국과의 전쟁이 일단락된 상황에서는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수밖에 없지만 노무현은 다르다.

 

노무현은 타국과 싸운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를 짓밟는 자국 안의 소수 특권 세력에 맞서서 혼자서 외롭게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노무현을 존경하고 이 시대의 영웅으로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안다. 그들은 반칙을 하지 않고 부당한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노무현 정신을 실천하면서 싸우려는 사람들이다.

그 싸움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드골처럼 자기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운 사람이 생전에 존경받고 천수를 누리고 눈을 감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 첫걸음은 공익을 추구하는 의인에게 침을 뱉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사기꾼을 영웅으로 떠받들어온 언론을 응징하는 것이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 편집국장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자 본인은 사임하고 사장에게도 1931년 만주 침공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언론의 책임을 방기하고 군부의 주구가 되어 국민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간 책임을 지고 신문을 폐간하자고 건의했다. 아사히신문도 8월 23일 사설에서 독자에게 사죄했고 11월 7일에는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고 전쟁으로 몰아간 책임을 지는 뜻에서 사장 이하 편집국 간부가 모두 물러나고 앞으로는 국민을 섬기는 기관으로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힘쓰겠다고 선언했다. 천황 폐하를 떠받들면서 조선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내는 데 앞장섰고 국민이 아니라 독재자를 섬기면서 사세를 넓히는 데만 골몰하면서 그런 처신을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는 조선일보와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주인 의식이 있는 존재만이 반성을 할 줄 안다. 언제나 종주국과 독재자라는 상전의 꽁무니에만 매달려서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존재에게는 반성은 사치다.

 

노무현이 긍정의 리트머스지라면 조선일보는 부정의 리트머스지다. 긍정의 리트머스지는 너그러울 수 있다. 정책 때문에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정책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의 리트머스지는 너그럽지 않다. 자신의 급진적 노선을 노무현이 따르지 않았다고 참여정부를 까면서 언론 권력 조선일보와 사이좋게 지내는 진보 먹물과 진보 정치꾼은 용납할 수 없다. 조선일보는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회주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에 기생하는 먹물과 정치꾼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노무현은 조선일보에 맞선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에 맞섰다. 기회주의적 신문은 기회주의적 국민을 양산하고 기회주의적 국민은 기회주의적 대통령을 뽑는다. 기회주의에 맞서는 신문이 있어야 기회주의에 저항하는 국민이 양산되고 기회주의에 저항하는 국민이 기회주의에 저항하는 대통령을 뽑는다. 기회주의와 싸우는 신문만이 기회주의와 싸우는 대통령을 지켜낼 수 있다.

 

드골의 나라는 <콩바> 같은 드골의 우군 노릇을 하는 신문이 있는 나라였다. 노무현의 나라에는 그런 신문이 없었다. 노무현에게는 기회주의에 맞서 끝까지 함께 싸워줄 신문이 없었다. 보수 진보를 떠나 기회주의에 맞서 싸우는 언론이 없는 한 한국에서 노무현 같은 의인은 절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

 

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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