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청년 건강

청소년 배달 노동자들은 계약서도 보험도 없이 노동법 밖에서 달리고 있다

pulmaemi 2021. 3. 17. 13:30

"사고 나면 제 돈으로 갚아요"

“여기서는 (근로) 계약서나 부모님 동의서를 작성하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어요. 그냥 콜 수수료는 얼마고,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 오토바이 면허는 있는지만 물어보고….” 경기도 군포시에서 일하는 배달 경력 11개월차 청소년 이진수(가명·18)군의 말이다.

청소년 배달노동자 절반 이상이 근로계약서 등 업무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작성하지 않은 채로 일하고 있으며, 사고 발생 시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보험) 혜택을 받는 청소년 노동자도 극소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경기도 군포시 청소년 노동인권센터와 사단법인 유니온센터·청소년유니온이 작성한 ‘내 생애 첫번째 노동’ 보고서를 보면, 청소년 배달노동자 71명 중 41명(57.7%)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거나 존재 자체를 모른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보고서는 지난해 7월13일부터 8월4일까지 군포지역 청소년(만 15~19살) 배달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심층면접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전국적인 조사 결과는 아니지만, 성인 배달노동자들에 비해 청소년 배달노동자들이 더 취약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청소년 사고 경험 30명 중 산재 처리는 4명뿐

뉴스17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배달 노동자가 도로를 주행하고 있다.

 

일부 배달 대행업체는 근로계약서는 물론 부모나 후견인 동의서조차 받지 않은 채 청소년에게 배달 업무를 맡기고 있었다. 배달 경력 11개월차인 강철민(가명·18)군은 면접조사에서 “애초에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말을 안 한다. 동의서 이야기를 하면 관리자가 ‘다음에 받아와라’라고 한 뒤 이후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응답자 가운데 배달 중 사고 경험이 있는 30명 중 산재보험으로 사고를 처리했다는 노동자는 4명(13.3%)에 불과했다. “개인 비용으로 처리했다”는 응답자는 11명(36.7%), “개인 보험으로 처리했다”는 7명(23.3%)으로 응답자 중 절반(18명) 이상이 업무 도중 사고를 개인 비용으로 뒷수습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8명은 ‘회사 비용으로 사고를 처리했다’고 답했다. 71명 중 절반 이상은 산재보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재 보험료로 얼마를 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44명(62%)이 “모른다”고 답했다.

일부 배달대행 업체는 ‘비용 절감’을 위해 오토바이 보험도 다른 사람 명의로 가입하고 청소년에게 오토바이를 맡기고 있었다. 배달 경력 10개월차인 박승근(가명·18)군은 “저희가 어려서 보험료가 비싸다 보니 업체는 30살 이상인 사람만 보험을 들어놓고 10대는 가입시키지 않은 채 일을 시키고 있다. 그러다 사고 나면 제 돈으로 갚아야 한다”고 토로했다.

유니온센터·청소년유니온은 오는 18일 보고서 내용을 바탕으로 청소년 배달노동자 노동실태를 알리는 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송하민 유니온센터 사무국장은 “청소년 노동자가 일터에서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경험은 우리 사회의 전체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며 “보고서를 통해 청소년 배달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를 직접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업체는 “배달 건수 못 채우면 맞는다” 고객은 “하라는 공부 안 하고…” 욕설

“한 업체는 ‘거기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소문이 났어요. 한번 일하기 시작하면 그만두지 못하도록 폭행이나 (오토바이) 리스비로 압박하고, 사고 나면 수리비를 과도하게 청구해 빚으로 달아두고 계속 출근하게 해요.” 경기 군포시에서 배달노동자로 6개월간 일한 김강윤(18·이하 모두 가명)군은 배달대행업체로부터 겪은 인권침해 경험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김군은 면접조사 내내 “업체의 보복이 두렵다”며 개인정보를 보호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16일 사단법인 유니온센터 등이 작성한 ‘내 생애 첫 번째 노동’ 보고서를 보면, 심층 면접조사에 응한 청소년 배달노동자 9명(배달노동 경력 5개월~1년)은 배달대행업체로부터 폭행과 협박, 부당행위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한 업체는 이른바 ‘관리자 형’을 통해 청소년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배달 경력 11개월차인 강철민(18)군은 면접조사에서 “형들이 나이 어린 애들에게 ‘너네 40건 이상 배달 안 하면 맞는다’고 협박한다”며 “(도망가면) 페이스북에 ‘누구누구 잡히면 죽는다. 잡는 사람 5만원’ 수배를 내려서 잡히면 맞고, 돈을 뜯기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뉴스1배달 노동자

사고 나면 수리비 빚으로 달아놓고, 고객은 ’어린 나이′ 문제 삼기도

오토바이 수리 비용이나 리스비를 불법적으로 청구해 ‘족쇄’를 채우는 업체도 있었다. 10개월간 배달 경력이 있는 박승근(18)군은 “제가 고장 낸 것도 아닌데 (관리자가) 수리비를 청구하는 걸 ‘작업’이라 부른다. 어느 날 관리자가 리스한 오토바이에 스크래치와 고장이 났다면서 수백만원씩 ‘작업’을 걸고, 여기서 돈 갚으면서 일하게 하기도 한다”고 하소연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청소년 배달노동자 71명을 대상으로 오토바이 소유 여부를 물었는데, “자기 소유”라고 응답한 사람은 12명(16.9%)에 그쳤고, 임대료를 내며 사용하는 경우는 42명(59.1%)에 이르렀다. 무상으로 업체 오토바이를 사용한다는 응답은 17명(23.9%)이었다.

‘배달노동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을 마주하거나 ‘어린 나이’를 문제 삼는 폭언을 들었다는 답변도 있었다. 김강윤군은 “문 앞에 두고 가라는 요청을 깜빡 잊고 벨을 눌렀는데 아기가 깼다며 ‘몇 살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배달을 하느냐’며 심하게 욕을 하신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