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레깅스 불법촬영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버스에서 레깅스 바지를 입은 피해자의 하반신 뒷모습을 8초간 동영상으로 촬영한 30대 남성에 대해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으나 2심에서 피해자가 느낀 감정이 성적 수치심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면서 논란이 됐던 사건이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은 부끄러운 감정뿐만 아니라 분노, 공포 같은 다양한 감정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며 다시 재판을 하라고 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6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5월 밤 10시쯤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레깅스 바지 차림의 여성 B씨의 하반신 뒷모습을 휴대전화로 8초간 동영상 촬영했다. A씨의 휴대전화 카메라 방향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한 피해자가 A씨에게 휴대전화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면서 덜미가 잡혔다. A씨는 “내려서 바로 지울게요. 한 번만 봐 주세요”라며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A씨는 불법촬영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의 얼굴도 예쁘고, 전반적인 몸매가 예뻐 보였다”고 범행 동기를 밝혔다. A씨는 1심에서 70만원의 벌금형, 24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명령을 선고받았다. A씨는 형량이 무겁다며 항소했다.
■2심 “레깅스 차림, 성적 욕망 대상 아냐”
항소심에서 판결이 무죄로 뒤집혔다. A씨가 촬영한 피해자의 신체 부위가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의정부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오원찬)가 A씨의 혐의를 무죄로 본 첫 번째 이유는 레깅스 복장이 신체 노출이 적기 때문에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 당시 피해자는 엉덩이 위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운동복 상의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레깅스 하의를 입었다. 항소심은 “외부로 직접 노출되는 피해자 신체 부위는 목, 손, 발목 부분이 전부”라고 했다.
항소심은 두번째 무죄 이유로 엉덩이 같이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지는 신체 부위를 확대 촬영하지 않고 하반신 전신을 촬영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항소심은 “엉덩이 등 성적 부위를 확대하거나 부각하지 않고 사람의 시야에 통상적으로 비치는 부분을 그대로 촬영했다”고 했다.
항소심은 세 번째로 레깅스가 요즘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복이라는 점도 무죄 근거로 내세웠다.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면 왜 많은 여성이 일상복으로 레깅스를 입고 다니냐는 것이다. 항소심은 “레깅스는 피해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 사이에서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있고, 신체에 밀착해 몸매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스키니진과 별반 차이가 없다”며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항소심은 피해자가 느낀 감정은 성적 수치심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피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당시 심정에 대해 “기분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항소심은 “피해자의 진술이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재판부는 불법촬영된 피해자 사진을 판결문 본문에 증거로 첨부하면서 판사들 사이에서 2차 가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대법 “분노도 성적 수치심으로 봐야”
대법원은 사건을 유죄 취지로 다시 재판하라며 사건을 파기했다. 먼저 대법원은 항소심이 성적 수치심을 좁게 해석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협소하게 이해해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을 보호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기분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느낀 피해자의 감정에 대해 대법원은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이용당했다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분노와 수치심의 표현”이라며 “성적 수치심을 유발되었다는 의미로 충분히 이해된다”고 했다.
대법원은 신체 노출 부위가 적다고 해서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가 아니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법원은 “의복이 몸에 밀착해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의 굴곡이 드러나는 경우에도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스스로 노출했어도 본인 의사 반하면 범죄”
대법원은 엉덩이 등 성적 부위를 확대하지 않았다는 점,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널리 활용된 점 같은 항소심의 무죄 근거도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고 했다. “어느 장소에서, 어느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촬영됐는지에 따라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지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므로 피해자도 레깅스를 입고 대중교통을 탔을 것이라는 항소심 논리에 대해 지적했다. 피해자가 스스로 노출이 있는 옷을 입었더라도 본인 의사에 반해 불법 촬영이 되는 등 성적 대상화가 됐다면 성적 수치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거나 생활 편의를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에 의해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함부로 촬영 당하는 맥락에서는 성적 수치심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가 존재한다고 최초로 판시한 것도 의미있는 대목이다. 대법원은 강간죄 등 기존 성범죄의 보호법익으로서의 ‘성적 자유’에 대해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라고 판시해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서 카메라등 이용촬영죄의 보호법익으로서의 ‘성적 자유’는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라고 처음으로 구체화했다. ‘성적 자유’의 의미를 넓게 해석한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적 자유’는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고 최초로 판시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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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1061255001&code=940100#csidxfdc5ff4e675034ba953eb44235c5d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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