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끄트머리, 대통령님과의 마지막 만남 봉하로부터의 반가운 초대 지난 2월,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함께 봉하에 내려가자고 하더군요. 봉하에서 연락이 왔답니다. 칩거에 들어가시고 난 뒤 대통령께서 부쩍 외로워하시는 것 같아 적적하시지 않도록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더군요. 그때가 아마 '대통령의 외로웠던 봄'이 시작되던 즈음일 것입니다. 기뻤습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동안 내려가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습니다만 워낙 찾는 사람도 많고 바쁘실 것 같아 선뜻 나서기 어려웠습니다. 청와대에 근무했다는 인연밖에 없는 저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기회였지요. 봉하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 높지도 않은 산들이 나지막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참 아늑해 보였습니다. 대통령님 사저로 들어섰습니다. 가운데 소박한 정원을 둔 ‘ㅁ’자 모양의 한옥이더군요. 나무와 흙의 질감이 정겨운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서재에서 대기했습니다. 한쪽면은 책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늘 책읽기를 좋아하시고 글쓰기를 즐겨하셨지요. 오래된 책이 많을 거다 싶었는데 오히려 ‘미래를 말하다’ 같은 최근 책들이 더 많더군요. 목소리에 담겨있던 고단함 잠시후 대통령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늙으셨더군요. 염색도, 화장도 안하시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머리는 희끗하시고 좀 지쳐 보이셨습니다. 허리가 안 좋으시답니다. 힘이 넘치고 카랑했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느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부드러움이 아니라 고단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한 안부가 끝난 뒤 대통령께서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딱히 저희가 여쭙지도 않은 주제였습니다. 대통령께 찾아오는 사람들이 두 가지 얘기를 많이 하신답니다. 첫 번째는 아마도 ‘분노’나 ‘허망함’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여정부가 그토록 추구했던 가치였고, 온몸으로 싸워가며 힘겹게 한걸음씩 내디뎠던 민주주의의 진보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가고 있으니까요. 과거의 유물이 된 줄 알았던 공안통치마저 스멀스멀 무덤에서 기어나오고 있으니까요. 두 번째는 ‘억울함’을 하소연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것을 우리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라는 얘기지요. 그때 놓아주었던 권력기관이 이제 와서는 오히려 날카로운 칼끝을 이쪽으로 되돌리고 있으니 억울함은 더하겠지요. 제 식대로 표현하면 ‘누리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한’ 그런 것 아닐까요. 원망하지 마라, 그것이 역사다 대통령께서는 준비된 대답으로 당신의 생각을 풀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면서 프랑스 얘기를 길게 하셨습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왕정복고 운동이 사그라질 때까지 8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가 되어서야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가 그 모양을 갖추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빠르게 발전한 것이고 어찌보면 지금과 같은 역사적 반동은 민주주의 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라는 말씀이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억울해 할 필요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권만 잡았을 뿐이지 언론, 국회, 사회적 세력을 봤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더 강조하셨던 것은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참여정부의 가치와 상반되는 일이고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언급도 있었습니다. 모든 게 되돌아간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며 지금 대통령도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5년의 임기, 마음은 바쁜데 촛불시위는 일어나고 일부 언론은 뜻대로 안되고 거기에 여당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니 얼마나 속이 타겠냐는 것이지요. 분명 독재 시대, 권위주의 시대와는 다른 것이지요. 이 정도까지 시민사회가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진보한 것도 다 우리가 피땀흘려 노력한 덕분이 아니겠느냐는 작은 위로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인간의 길, 화해의 길 대통령께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 중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이 한 줄이 참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의 해석을 갖다 불일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 말은 본인이 그토록 꿈꿔왔던 ‘통합과 화해를 위한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한편으로 대통령님을 믿고 지지해주고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라고도 생각됩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지금 너희들이 겪고 있는 분노와 고통이 모두 민주주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를 위한 한 과정이다. 아마 당신께서는 본인의 죽음마저도 길고긴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담담하게 맞이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신영복 교수는 아우슈비츠에서 일제를 떠올리며 ‘단죄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라고 했습니다.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 없이 통합과 화해만 앵무새처럼 외치는 사람들은 진정한 ’화해의 길‘이 무엇이고, 진정한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cL) 행복하게
(사람 사는 세상 / 행복하게 / 200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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